1. 태동기
한국 교육방송의 뿌리는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6월 18일 KBS 부산방송국에서 전시 프로그램으로 매 15분씩 <라디오 학교>란 프로그램을 방송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 전시용 프로그램은 현장학습에 도움이 되지 못하나 학교방송의 필요성 및 가능성을 인식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60년 미국에서 프레드 로저스가 같은 발상으로 교육방송을 열기도 했다.서울 수복 후 1956년 5월 4일부터 매주 월/수/금요일마다 국어, 사회, 음악 3과목을 오전/오후로 나누어 주 6회 및 PTA 시간 1회를 합해 주 7회짜리 라디오 학교방송을 실시했으나 방송 프로그램이 교육과정을 토대로 체계적으로 짜여진 게 아니라서 완전한 방송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1959년 4월 1일부터 서울시내 교육 실무자의 협조를 받아 방송시간을 45분으로 늘렸으나, 1962년 8월 19일 KBS 개편에 따라 학교 방송이 중단되었다. 반면 TV교육방송은 1956년 9월 1일 HLKZ-TV에서 <어린이 시간>이란 프로그램을 방영했다가 그해 12월에 종영되었다.
2. 개척기
1962년 12월 14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선진국에서 실시하는 본격적 학교방송을 검토한 끝에 교육방송 부활 계획을 세우고, 문교부 중앙시청각교육원 및 공보부 서울중앙방송국이 기술협조하는 학교방송을 실시토록 지시하였다. 이에 중앙시청각교육원에서 서둘러 준비를 갖추고 1963년 3월 11일을 기해 국민학교 교육과정에 따른 각 학년별 국어, 사회, 자연, 음악 등 4개 과목과 학교 방송뉴스, 교육상담실, 일요음악회, 학교탐방, 반공도덕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해 매 1시간씩 <라디오 학교방송>이란 이름으로 KBS 전국방송을 개시하였다. 이와 더불어 교과진도에 맞추어 1학기분 방송내용이 수록된 <학교방송 교사용 지도서>를 발행해 전국 국교에 배포하는 등 한국 교육방송은 소규모임에도 형태를 갖춰나갔다. 특히 문교부가 이 방송을 편성/제작케 한 것은 방송을 하나의 교육매체로서 교육현장에 활용케 한 획기적 시도였다.TV 교육방송은 1969년 1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문공부 초도순시 때 KBS-TV 운영개선 방법과 광고방송 폐지, 교육방송 강화를 각각 지시한 후 문교-문공 양측이 2달 간 협의를 거쳐 광고방송이 폐지된 그해 어린이날을 기해 TV학교방송이 시험방송되었다. 동년 7월 30일까지 지속된 시험방송 기간 동안 TV방송에 적합한 교과목 및 방송대상 학년이 조사되었고, 이후 9월 1일 ~ 1970년 2월 28일까지 실시된 2차 시험방송에선 대상 학년별로 각 교과내용을 일선 학교 교과진도와 일치토록 시도했다. 이에 따라 문교-문공 양측에서 관계관 회의를 열어 방송 대상을 국교 고학년 ~ 중학 전학년까지로 확정 후 과학/예체능 중심으로 토요일을 뺀 매일 10~11시까지 학교수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편성하고 1970년 어린이날을 기해 비로소 TV교육방송을 정식 실시했다.
당시 문교부 중앙시청각교육원 역시 TV학교방송 교사용 지도서를 내고 교과별 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적극적 자세를 취했으나, 크게 활용되지 못함에도 KBS-TV 주관으로 기획/제작/방송까지 도맡았다. KBS 측에서는 <학교방송 프로그램 가이드>, 중앙시청각교육원은 <TV 학교방송>이란 제목으로 각각 교사용 지도서를 내고 일선 학교에서 활발히 활용하길 기대했으나, 1973년 4월 9일 KBS 프로그램 개편으로 또다시 중단되었다.
3.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방송 준비
1972년에 한국교육개발원이 설립되어 독자적 교육방송 건설을 위해 '기술지원국'을 두었고,[1] 2년 뒤에 교육방송을 위한 라디오/TV 방송시설 및 송신시설 설치를 명시한 '한국교육개발원 육성법'이 제정되면서 우리 교육방송 역사에 전환기가 형성되었다. 1982년에 발간된 <한국교육개발원 십년사>에 따르면 이 조치는 한국 교육 및 교육방송의 장래를 위한 획기적 조치였다고 해석되었는데, 위와 같은 조치는 정부로서도 방송을 통한 교육이 학교 교육내용의 핵심부분을 달성하도록 한 큰 결심이었다. KEDI 개원 초기부터 중추 과제였던 '새 교육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은 고도로 발달된 전문매체를 교육에 적용하여 교사와 학생들을 간 재래식/비능률적 수업형태에서 해방코자 했던 것이다. 고로 1~4차 소규모 시범과정에서 TV/R 프로그램이 중요한 투입자료로서 활용되었다. 1975년 9월부터 착수된 1차 종합시범을 계기로 이들 프로그램이 전국구 방송망을 통해 수업현장에 투입될 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라 정부 각 부처와 공동사용이 기대되는 기구식 송신시설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교육방송 송신체제로 채택된 T-COM 송신망이 기술상 어려움으로 중단되어 정식 개국은 지연되었으나, E-M 사업으로서 프로그램을 계속 개발해내 교육방송 실현에 대한 직접적 대비책으로도 공헌했다.반면, KEDI 측이 1974년부터 인수해 운영중인 라디오 학교방송은 E-M 사업과 연계성을 지니면서 지속적으로 제작/방송해왔다. 아울러 초/중 교육 발전사업 변화에 따라 방송의 기본계획이 수정되고, 이는 방송체제를 어떻게 갖추느냐 하는 문제였다. 즉 1975년 KEDI 기본사업계획에 따르면 새 수업체제 지원활동으로서 교육TV 및 라디오 프로그램을 시범학교에만 일차적으로 방송토록 했다. 그러나 1976년 수정안에 따르면 새 수업체제 지원으로서만이 아니라 청소년을 위한 사회교육방송, 미취학 아동대상 방송 및 학교교육 방송 등을 포함한 종합적 방송체제로 운영토록 했으며 일반 학교 및 가정에까지 확대해냈다. 기존 사업계획에선 1일 평균 수업시간에서 1/3을 TV수업에 할애토록 전제했으나 수정안에선 1/6 ~ 1/8로 대폭 줄였다. 이것은 교육방송 체제를 단순히 교육경비 감소 수단보단 교육체제의 '교육력'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의 전환이었다.
이로써 TV 프로그램 제작에 대한 각종 기계 설비도 소규모 흑백TV 설비에서 일반 학교, 교사, 미취학 아동을 대상에 포함시킨 컬러TV 제작시설로 바뀌게 되었다. 이리하여 훌륭한 계획으로 우수한 프로그램을 전국적으로 방송해내 학교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지역 간 교육적 불균형을 해소시키며, 국가의 교육목표 달성을 앞당기는 교육방송의 대원칙이 성립되었다. 이에 KEDI는 방송시설을 마련키 위해 '방송기술자문위원회'를 설치한 후 종합적 TV 및 FM라디오 방송 체제에 대한 기술검토를 실시하였다. 자문위의 건의를 반영한 '교육방송 기재확보 방안'은 미국국제개발처(USAID)를 통해 미국 내 방송기술전문기관에 의해 재차 검토된 후 최종안이 결정되었다. 1975년 8월 16일에 미국 방송시스템 기술자 하비 J. 애버홀드(Harvey J. Aberhold)가 내한해 방송기재 선정부터 설치에 이르는 기술협조에 열성을 다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방송기재 설치 도중 10월 8일에 쓰러져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후에 숨졌고, 정부에선 그에게 훈장까지 추서해 노고를 기렸다. 반면 방송시설은 AID 자금으로 도입해 USAID 측과 협의 끝에 미국 AMPEX 사로 낙찰되어 1975년 4월 22일부터 방송기재를 발주하였다.
1974년 5월 14일부터 서울 성동구 우면동[2] 총 16,000평 짜리 대지에 착공된 947평 짜리 KEDI 스튜디오 건물 공사가 1975년 8월 31일 완공되어 한달 전부터 도입된 방송기재를 설치하였다. 당시 우면동 스튜디오는 컬러TV 프로그램 제작이 가능한 TV 스튜디오 및 스테레오 제작이 가능한 라디오 스튜디오를 각각 2개씩 설치했고, TV 채널 2개 송출이 가능한 TV주조정실 및 라디오 주조정실를 매체마다 각각 2개를 완성해냈다. 이후 1976년 2월 20일에야 총 159만 6백 9불이 투입된 스튜디오 공사가 완성되었다. 이로써 KBS 것을 빌려쓰던 교육방송 시범 프로그램도 우면동 새 스튜디오로 옮겨졌고, 라디오 역시 우면동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시범용 교육방송 프로그램은 1975년 1월 16일로 가허가된 충북 제천군 봉양면 주포리[3]에 있는 교육방송 송신소에서 UHF-TV 채널 20(HLGM-TV) 및 26번(HLGN-TV), FM 104.9Mhz(HLGM-FM)[4] 등 3개 계통으로 방송토록 되었다.
교육방송 송신시설로 채택된 T-COM 방식 송신소는 원래 T-COM/웨스팅하우스 사에서 한국 통신과 방송 수요를 경제적으로 안전하고 신뢰성 있게 단기간에 충족시키겠다는 제의와 타당성이 인정되어 교육방송을 위한 송신시설로 채택된 것이고, 미국수출입은행(EXIM) 차관 7백만 불로 도입해 설치한 것이다. 제천 주포리 41,698평 짜리 대지에 세워진 T-COM 방식 송신소는 매우 순조로이 건설되어 1975년 4월 14일에 시험 전파를 쏘았고, 12월 12일엔 우면동 스튜디오에서 조정하는 컬러TV 프로 2개를 봉양 송신소에서 상공 1만 피트에 뜬 기구 송신기를 통해 전국에 시험전파를 쏘아올렸으며, 경기 안양서국민학교 시범수업에 적극 투입됨으로써 교육방송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1974년 12월부터 1975년 2월 15일까지 강풍 및 적설 등에 의한 대형사고가 5번이나 터져 최종 성능시험조차 마치지 못한 채 T-COM 시설이 한국 기상조건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1977년 9월 10일 제32차 경제장관협의회에서 T-COM 사업을 종결토록 결정한 후 즉시 T-COM 사에 대해 계약조건에 따라 사업 계획 해제 및 배상을 요구했다. T-COM 측에선 캠프 회장 등 4명을 한국으로 파견하고 1978년 2월 17일부터 5일간 한국측 대표와 협의 끝에 위와 같은 이유로 계약기간 내 완수하지 못해 부득이 해지한 후 T-COM 사는 한국 내 교육방송망 건설에 대한 배상금으로 1,308만 9천 달러를 현금 및 장비로 공급할 것에 합의했다. 더불어 웨스팅하우스 및 T-COM 역시 한국 정부 및 국민들에게 국내 교육방송 지연에 대해 유감을 표하고 국내 교육방송사업 추진에 최대한 협조하도록 약속했다.
이것으로 1972년 12월 28일에 가계약된 T-COM 사업은 중단되었으나, 교육방송 사업 자체는 계속되어 새 교육방송망 건설계획을 세운 후 전파관리국, 문교부, 문공부, KBS, KEDI 5개 기관 실무진이 분석/검토 후 1977년 12월 27일 제57차 경제장관협의회에서 교육방송 송신방식을 지상파로 수정키로 합의하였다. 1978년 3월 4일 국무총리실로 T-COM 종결에 따른 송신방식 변경 및 추진상황을 보고하자 당월 10일부로 교육방송 주관부서 결정시까지 송신 기자재 발주를 보류하라는 지시가 있었으며, 7월 26일에 최규하 총리로부터 지시가 내려졌는데, 지시 내용은 교육방송국 설치를 KBS 명의로 하고, 교육방송 기본편성은 문교-문공-KEDI-KBS 합동 위원회를 구성하고 상호협의해 결정하되, 그 외 프로그램 제작은 KEDI, 송출은 KBS가 하도록 했다. 특히 송신은 지상파로 전환해 교육방송을 UHF-TV 및 FM 각각 1개 계통으로 설치토록 했다. 위 지시에 따라 KEDI 송신 업무를 맡은 직원들은 KBS로 이직했고, T-COM사로부터 받을 배상장비 규격 수량 등도 KBS가 주관토록 했으며 수차례 걸친 회의를 거쳐 1979년 4월 14일 T-COM사와 배상 시행에 대해 KBS에 7,621,930불짜리 TV 송신장비를, KEDI에 2,339,492불짜리 녹화장비를 보내도록 하는 등으로 합의하여 배상절차를 끝맺었다. 한편 교육방송 기본편성을 협의키 위해 '교육방송심의위원회 규정'이 제정되었으나 얼마 후 폐기되었다.
4. 중등교육 채널
교육방송 개국 준비가 모두 완비된 상태에서 실현 가능 계기를 만든 건 1980년 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해소방안'을 마련하면서 '교육 'TV 과외방송'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KBS는 이에 앞서 그해 6월 16일부터 국영수 위주로 TV 가정고교방송을 시작했으며, 방송시간은 평일 밤 11시 10분에서부터 12시 40분, 재방송은 평일 오전 5시 30분에서부터 7시까지 편성했으나,[5] 운영방법에 대해선 교육계로부터 비판이 일었다. 이것 때문인지 위 해소방안에선 현행 TV 가정고교 방송 운영내용을 개선해 대상과목을 종전의 국영수에서 전 과목으로 확대하고, 학습방법은 암기식 학습에서 순수 보충수업 형식으로, 방영시간 확대, 강사를 고교 교사 또는 교수로 대체토록 했다. 이뿐만 아니라 1981년부터 교육전용 채널 신설도 덧붙였다.위 조치에 따라 KBS는 가정고교방송을 8월로 끝내고 9월부터 KEDI가 TV 고교방송 제작을 개시하여 KBS에서 11개 과목으로 방송을 개시했다. MBC에서도 9월 1일부터 가정고교방송이 시작되었다. 11월 대입예비고사 이후 종전 11개 과목이 15개 과목으로 확대되었으며, 심야시간대과 평일 오전시간대에 가정고교방송이 편성되다가 1981년 2월 2일에 정식으로 KBS 3TV가 발족했고[6] 과외방송을 KBS 3TV로 옮겼다.[7] 당시 교육채널 프로 제작은 KEDI가 학생 및 교사 대상 프로를, KBS가 사회교육 프로를 담당토록 했다. 당초 방송시간 기준으로 50:50 비율로 제작했다가 후에 다소 조정되었다.
5. KBS 3TV 시절
자세한 내용은 KBS 3TV 문서 참고하십시오.6. EBS 교육방송 개국
1990년 12월 27일 오전 9시, KBS에서 분리독립한 후 KEDI 교육방송본부가 교육방송원[8]으로 개편되면서 EBS TV, EBS FM라는 이름으로 재개국했다. 이 때부터는 KBS와는 연관없이 한국교육개발원의 지원하에 송출했으며[9] 독립법인 방송사로서 본격적인 교육학습 채널임을 자임했다. 채널번호는 이전 그대로 13번과 FM 104.5MHz로 유지되었다.그렇지만 KBS에서 독립하는 과정에서 운영주체가 문교부, KEDI, KBS로 3원화되면서[10] 이해관계가 오히려 복잡해진데다가, 특히 문교부(후에 교육부로 개편)에서 EBS 편성권을 쥐면서 EBS 제작진과 마찰이 이래저래 잦았고, 교육방송이라는 명분이 있었음에도 중요한 수신료 수입을 가져오지 못한데다가 예산배정도 미흡했던 탓에[11] 1990년대 당시에도 교육열이 상당했음에도[12] 상당한 재정난에 직면하게 되었으며[13], 결국 1990년대 중반부터 협찬광고라는 명목하에서 상업광고를 편법적으로 편성하게 되었을 지경이 되었다.[14] 이 때 상황이 어느정도였는지 공보처에서 전문적인 교육방송국 신설을 명목삼아 기껏 KBS로부터 분리했음에도 KBS 산하로 다시 되돌리는 안이 문민정부 초중기때 검토되었을 정도였다. 막상 KBS나 EBS나 재통합을 탐탁지 않게 여겨서 결국 무산되었지만. KBS 통합 무산 이후 1997년 1월 13일 '한국교육방송원법' 제정/시행에 따라 3월 12일에는 한국교육방송원으로 독립하여 한국교육개발원 산하에서 분리되었고, 9월부터는 공식적인 상업광고를 개시했다.
참고로 이런 '정권에 의한 TV교습채널 발족'은 1990년대에 한번 더 되풀이되는데, 1997년 8월부터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당시 시험송출을 하고 있던 무궁화 3호 방송위성을 이용한 '과외방송'을 실시한 것.[15] 위성 1채널은 수능방송을, 위성 2는 중학 교과과정 위주였는데 특히 위성 1의 강사진이 매우 대단했다. 영어에 이근철(!)(전 KBS 2FM 굿모닝 팝스 진행자), 국어에 이원희[16], 이만기[17], 수학은 박승동. 참고로 EBS 영어회화의 간판이자 서울메트로(2000~2005)와 서울도시철도공사(1999~2012) 영어안내방송의 주인공이었던 수전 맥도널드(Susan McDonald) 는 여기서 그간 안 보여주던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선보였다.
7. 공영 교육방송 한국교육방송공사 출범
2000년 1월 12일 '한국교육방송공사법' 제정 후 3월 13일부터 시행되어 한국교육방송원이 2000년 6월 22일, 독립법인 한국교육방송공사로 출범하게 되면서 KBS, MBC, SBS와 함께 한국의 4대 지상파 방송으로 통하게 되었다. 2000년 12월에 인터넷 교육방송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004년에는 본격적으로 수능특강 중심의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인 EBSi를 시작했으며 2008년부터는 IPTV를 통한 실시간 송출이 실현되었다. 채널번호는 아날로그TV는 13번[18]/43번에서 송출하고 있고 디지털TV는 10-1번을 유지하고 있다.[19] 2012년부터 어학 라디오인 i-radio가 홈페이지를 통해 매일 20시간씩 오전 5시와 새벽 1시 사이에 서비스되고 있다.2004년 8월에는 EBS FM 방송시설이 재래식 아날로그 오픈릴 테이프 시스템에서 디지털 테이프리스 시스템으로 교체되었다. 비압축 웨이브 파일을 쓰는 KBS의 장비와 같은 회사 제품인데도 MP2 파일을 더 많이 쓰는 듯.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의 등에서 샘플링 주파수가 어긋나는지 고음부에서 음이 깨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추가로 폭우때 관악산송신소-우면동 방송센터 간 라디오 전용회선망 장애 현상으로 라디오 방송 음이 뚝뚝 끊길 때가 간혹 있다고.[20]
8. 우면산 산사태와 신사옥 이전 비리
2011년 7월 27일 오전, 서울특별시 지역의 대규모 폭우로 인해 방송국 근처의 우면산이 산사태로 무너지면서 방송국 안으로 흙과 물이 차고 들어오는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지대가 낮은 기계실에 물이 차며 상시전원공급이 끊어졌고, FM 라디오 스튜디오 쪽에도 물이 차면서 생방송(모닝스페셜 1부) 도중 진행자, 스태프가 대피했다(오전 8시 48분경). 오후 4시 지상파TV-EBS플러스1-EBS플러스2-EBS잉글리시 등 TV매체는 모두 지상파TV의 화면을 그대로 송출했고, FM 라디오는 모닝스페셜[21] 1부 생방송을 마지막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음악만 틀었다. 이것도 비상전력을 돌려서 방송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끊겼다 나오다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래는 자체 UPS를 이용하여 방송했으나 용량이 바닥나자 예비용 발전기를 긴급 공수했다. 다행히도 예전 방송자료는 도곡동 사옥[22]에 보관하던 상황이었기에 우면산 산사태에 의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23]라디오 방송은 그날 저녁 6시(English Go! Go! 프로그램)[24]에 긴급복구되었으며 현재는 모두 정상 복구된 상태. 산사태 당일 라디오 편성표 산사태의 여파로 약 85억 원의 장비 피해와 스튜디오 파손이 발생하여 타 방송사들이 지원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당시 상황에 대한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대응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방송과기술 저널을 통해 보도되었다. 링크 (아카이브1)
이 산사태의 여파로 2010년대 초반부터 사옥 이전을 추진하였는데, 신사옥 부지 결정이 정치적 비리 스캔들로 커져서 복잡해지고 있다.
초안은 일산으로 신사옥을 이전하는 것이었으나, 직원들의 반대로 우면동 스튜디오 부지를 함께 사용하던 한국교육개발원이 어차피 지방으로 이전하니까 그쪽으로 이전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계획이 엎어지고 다시 일산 신사옥으로 가기로 최종 결정된 것.
하나 뚜껑을 열어보니 40대 후반에 2010년 초에 방통위(위원장 최시중) 낙하산으로 EBS 이사 자리를 꿰찬 김학인[25]이라는 자가 이 우면산 알토란 땅을 740억에 단독응찰로 매입한 것. 애초에 방송통신위원회 빽으로 EBS 이사 자리를 먹었던 김씨는 EBS 일산 사옥이전 결정에 EBS 이사로서 관여한 후, 기존의 사옥후보지였던 강남 금싸라기 우면동 후보지를 주저앉히고 염가에 꿀꺽.
그리고 자신이 운영하는 평생교육시설인 EBS를 이 과정에 방통위원장이던 최시중이 직간접적으로 EBS 이사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기사가 경향신문을 비롯한 언론사에 보도되었다.
한편 초안을 뒤엎는 과정에 연관되어있던 당시 방통위원장 최시중(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은 다른 금품 수수 사건(파이시티 인허가 비리)에 연루되어 구치소에서 수감 중 법원허가도 없이 삼성병원 VIP실에 머물러 물의를 빚었으며, 결국 뇌물수수로 2심에서 징역 (2년 6월 실형, 추징금 6억원)이 선고...되었으나, 겨우 2개월여만에 이명박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다. 역시 대단한 최측근.
더불어 그 뒤 EBS 전직 이사 김학인은 교비 240억 원을 횡령[26], 법인세 50여억 원을 탈세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가 2013년 1월 11일 서울중앙지법 최동렬 부장판사 판결에 의해 207억원 횡령에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판결로 풀려났다. 이 게 얼마나 솜방망이 처벌이냐면, 프로야구에서 횡령/배임 행위를 한 이장석은 징역 3년 6개월을 받고 복역 중이라는 것이다. 그가 횡령한 돈은 둘째로 하더라도, 2억원의 불법적인 국회의원 공천자금의 결과(김학인을 협박하여 10억대 건물을 받아 구속된 여직원의 증언)로 부당하게 획득한 EBS 이사 직위를 이용하여 헐값에 꿀꺽한 공사 소유의 우면동 땅은? 공사인 EBS의 재산은 결국 국민들의 세금인데 사후 처리는 요원해보인다. 다시 말해서,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서 재수사도, 책임치려고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사자 면면이 거액의 뇌물수수로 징역이 확정된 당시 대통령(이명박) 최측근, 혹은 역시 거액(밝혀진 것만 207억원)의 교비 횡령 및 불법 공천헌금 범죄자... 해당 우면산 토지의 가치가 상당하기 때문에 언젠가 재수사하게 된다면 관련된 의혹이 주렁주렁 나올지도... 현재 아무런 재수사 소식도 없거니와, 국회 문체위원장(안민석 의원)이 주최하고 사단법인 한류문화산업포럼이 주최한 대한민국 한류대상에서 국제교류대상, 2018년에 대한민국 경영대상 교육문화예술부문 수상 등으로 이미지 세탁에 완전히 성공해 잘 나가고 있다.
여러 논란 끝에 고양시 일산에 사옥을 이전하는 것으로 결정해 신사옥 건립 사업의 추진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위치상으로는 주엽역 일산서구 생활권이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일산동구에 속한다. 일산호수공원이 포함된 장항동이 일산동구 관할이기 때문.
2017년 8월 7일부터 한류월드 신사옥으로 이전했으며 9월 중 공식 입주가 완료되었다.[27] 일산 사옥으로 이전하면서 EBS의 제작/방송/커뮤니티센터를 하나로 합쳤는데, 한류월드에서도 구석에 처박혀있다보니 외부 방문객은 없다시피하다.[28]
2023년 현재는 지역 랜드마크처럼 되어 있는데, 인근에 킨텍스 원시티도 입주해 있고 원마운트도 있어서 주변 인구는 많이 늘어나 있다. 점심시간에 커피 들고 삼삼오오 산책하는 직장인들이 보인다면 십중팔구 EBS 직원들이다.
9. 경영난과 내부 분열, 사실상 암흑기의 서막
2019년에는, 박치형 당시 EBS 부사장이 2013년까지 제작 중이였던 '다큐프라임-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의 제작을 중단시킨 것에 대한 여파로 노조 등에서 퇴진 요구당하는 등 상당한 비판을 받았고, 김명중 당시 EBS 사장 및 경영진과의 갈등과 겹쳐 결국 징계 해고당했다.# 다만, 그는 2022년에 EBS를 상대로 진행된 해임 무효 소송에서는 승소한 상태다.#공영방송 위상 하락, 수신료 분리징수 시행 등으로 인해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2023년 후반기(김유열 사장 체제)에 들어 노조 측은 "김유열 사장 퇴진 요구"로, 사측은 "단협 해지 통고"로 맞서는 등 노사 갈등이 극단화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며, 2024년 2월에는 아예 노조의 폭로로 이른바 분식회계 의혹까지 불거진 상태다.#
자세한 내용은 김유열 문서
의 논란 및 사건 사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그리고 이 와중에 EBS의 이사장이 강제 해임되고 보수언론 출신 부사장이 임명되는 등 윤 정부가 EBS를 자기들 입맛대로 정치도구화하려 하고 있어 우려스럽다.#[29]
방통위를 통해 정식 임명된 김성동 신임 EBS 부사장[30]의 출근을 EBS 노조가 법을 어겨 가며 집요하게 방해했으며, 결국 첫 출근이 무산되었다.# 이에 대해 보수 성향의 언론 단체인 '공정언론국민연대'에서는 "노조의 행위는 전형적인 이중 잣대이자 위선"이라며 노조의 위법 행위에 대해 비판했다.#, #
특히 EBS는 2003년부터 시청률을 비공개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시청률 무용론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부분의 부실기업 혹은 이른바 '브랜드 인지도 만년 꼴찌' 기업이 저지르는 일종의 수법이자 실책이다. 결국 EBS가 시청률에서 좋지 못한 결과를 받자 아예 대놓고 시청률 무용론 운운하여 시청률을 숨겨 시청자들의 알 권리를 침해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들의 경영난까지는 숨겨질 리가 만무하다. 애초에 재무지표 공시는 기업의 의무사항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EBS가 그나마 내세울 만한 남은 강점마저 OTT에 잠식당할 날이 멀지 않은 데다가, 사실상 국영방송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방송국 특성상 윤석열 정부(2024년)에서 8~9월 쯤이면 MBC와 함께 이사진이 친 정부 인사들로 물갈이[31]되어 프로그램 전면 대개편에 들어가게 되는 등 암울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결국 2024년 8월 1일, EBS는 PBS처럼 기부 캠페인을 벌이는 지경에 이르렸는데, 문제는 해당 기부 캠페인에서 추천되고 있는 구독요금제인 'EBS Play+'는 KBS보다도 낮은 VOD 서비스 질, 아동/청소년/(중증)장애인 가족 등이 진정 필요한 컨텐츠의 부족 문제로 인해 넷플릭스 등 OTT의 아성을 넘기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교육공영방송이 필요한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또한 그대로 신뢰하기엔 문제가 많다.
[1] 1976년부터 '교육방송부'로 개편.[2] 현재의 서초구 우면동. 1975년에 강남구로 분구되었다가 1988년에 현재의 영역이 되었다.[3] 현 제천시 봉양읍 주포리. 1980년 제천시 승격과 함께 제원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991년에 환원되었고 1995년에 도농통합과 함께 현재의 봉양읍으로 승격되었다.[4] 104.9MHz 주파수는 현재에도 이 방송의 후신인 EBS FM이 인근의 원주 백운산 송신소에서 사용하고 있다.[5] 이후로 방송시간이 너무 늦다라는 여론으로 10시 30분으로 옮겨졌다.[6] 컬러시험방송 등 방송 준비 자체는 KEDI가 1975년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1·2TV와는 달리 교육 및 학습목적으로 송출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EBS와는 성격이 달랐다.[7] 다만 KBS 3TV가 일요일을 제외하면 오전방송은 일절 편성하지 않았기에 평일 오전시간대 가정고교학습 재방송은 유지되었고, 1980년대 중반 이후로 평일 오전시간대 과외방송 재방송은 폐지되었지만 1991년 봄개편으로 KBS 뉴스광장과 MBC 뉴스와이드 시작이전까지 아침뉴스 시작전에 <MBC 생활영어> 등 학습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관행은 남아있었다.[8] 공식 명칭은 한국교육개발원 부설 교육방송[9] 단, 송출시설 관리는 2021년 현재에도 여전히 KBS가 '교육TV', '교육FM'이라는 이름으로 위탁하여 관리하고 있다.[10] 엄밀히 말하자면 KBS 제작업무에서 손을 떼기는 했지만 송출업무는 여전히 맡고 있고, 현재도 맡고 있는 중이다.[11] KBS가 시청료 징수율이 낮고 징수원들의 인건비가 늘어서 EBS로 수신료 수입이 배분된다면 재정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문교부 등에게 로비를 해서라는 썰이 있는데 웃긴건 당시까지만 해도 KBS 1TV에서 멀쩡하게 광고가 나오던 시절이었다는 것이었다.[12]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 당시에 인기를 끈 청소년 소설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살펴봐도 당대의 교육열도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90년대 초 케이블 방송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스포츠 전문 채널은 하나만 배정되었고, 그나마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출자한 한국스포츠TV 혼자 응모했는데, 교육 채널은 무려 3개가 배정되었고, 경쟁률도 2:1에 달했다.[13] 1992년 당시에는 EBS 총 제작비가 KBS에서 편성한 대하드라마인 삼국기보다도 적었을 정도였는데 당대 방송정책이 얼마나 졸속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14] 당시 ID광고는 코리아나화장품이 CI 변경 직전까지 ID광고를 진행했다.[15] 이로서 무궁화위성 시험방송은 KBS 위성 1, 위성 2 외에도 EBS 위성 1, 위성 2까지 총 4개 채널을 송출하게 되었다.[16] 당시 양재고 교사. 2010년 지방선거에서 곽노현과 맞붙었던 서울시교육감 후보와 동일인물이다.[17] 현 유웨이에듀 대표.[18] 후술하겠지만 케이블은 SO마다 다른데 디지털(8VSB)은 10-1번으로 송출되며 13번은 지역민방(8VSB는 6-1또는 5-1, 전환뒤에 13-1로 송출돼서 복수의 채널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이 송출되고 있다.[19] IPTV는 olleh tv와 B tv가 13, U+tv가 14. 나머지 지상파 3사가 5(SBS), 7(KBS2JTBC), 9(KBS1), 11(MBC)을 고정적으로 차지한 것과는 차이가 난다. 만일 KBS가 KBS2를 폐지하지 않는 이상 12번으로 채널 재배정 받을 확률이 크다.[20] 우면산 산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인 오전 8시경에도 이런 장애가 발생하여 생방송 중에 잠시 사과멘트가 나오기도 했다.[21] 당시에는 1부는 오전8시~9시, 2부는 9시~10시에, 총 2시간 방송되었다. 이는 2022년 현재도 마찬가지.[22] 도곡동 구 사옥에는 다이소 본사가 입주하였다.[23] 이와는 별개로, 이후에 진행된 디지털 아카이빙 작업 중 일부 원본 베타캠 비디오 테이프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일부 방영분(다행히도 대부분은 재방송용 테이프이긴 했지만)이 영영 폐기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24] 당시 진행자는 썬킴.[25] 평생교육시설인 한국방송예술진흥원(또는 한국방송아카데미)이라는 운영하는 이사장. 말하자면, 전문학교 개념의 평생교육원이다. 절대 한예종이 아니다!![26] 중국에다 땅 투자를 했다고 한다.[27] 현재 홈페이지 상의 주소와 약도는 일산으로 변경된 상태다.[28] 견학신청란에 따르면 9월 중 정식 입주를 한다고 답변이 올라왔기 때문.[29] 사실, 정작 윤 정부 이전에 자기들 입맛대로 '교육 정치도구화'를 시도한 쪽은 다른 누구도 아닌 EBS 자사다. 이는 윤 정부 이전 시기에서 발생된 김정은 미화 사건, 까칠남녀의 젠더 갈등 유발 논란, 딩동댕유치원 PD의 "성교육은 정치교육" 발언 논란# 등 일련의 사건사고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윤석열 정부의 EBS 장악 시도는 누구보다 교육을 정치도구화하는데 주력해 온 EBS가 자초했다. 그리고 KBS, MBC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의 지배에서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도 상당한 불안 요소 중 하나다.[30] 전 월간조선 편집장으로, 신천지 미화 및 정치적 편향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31]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