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19:29:53

학당

學堂

1. 개요2. 종류
2.1. 관립 학당2.2. 사설 학당2.3. 외국의 학당
3. 여담

1. 개요

학당이란, 고려 시대조선 시대서원·향교·성균관 외에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수도의 각 부(部)마다 관립 교육 기관으로 세워진 학당과 사설 학당이 있다. 이 둘은 이름은 같지만 성격이 조금 달랐는데, 대강 관립 학당은 중등교육기관격이고, 사설 학당은 초등교육기관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개화기에 설립된 근대 교육 기관들도 종종 학당이라는 이름을 쓰곤 하였는데, 배재학당(1885년 설립)·이화학당(1886년 설립)·숭실학당(1897년 설립)·배화학당(1898년 설립) 등이 그 예이다.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모두 학교라는 이름으로 정착되면서 현재는 쓰이지 않는 말이 되었다. 다만, 이때 설립된 학교들 중에서 여전히 재단 이름에는 학당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학교들이 있다.

현재 학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기관에는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과 같은 어학당과 기타 공공기관인 세종학당재단 등이 있다.

2. 종류

2.1. 관립 학당

관립 학당은 성균관부설학교로서 수도의 각 부(部)에 설치된 관립 교육 기관으로, 오늘날로 따지면 성균관이 대학교, 관립 학당은 중학교·고등학교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지방에 있던 향교에 대응되나, 수도 각 부의 학당 안에는 문묘를 따로 두지 않았다는 것이 향교와의 사소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10세 이상의 양인 아동에게 입학 권한이 주어졌고, 주로 소학(小學)과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가르쳤다. 성균관의 관원이 학도들의 교육을 맡았으며, 학당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성균관 입학 자격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학생 정원은 학당마다 100명이었으며 재사(齋舍, 기숙사) 제도를 마련하여 학비 및 운영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하였다. 나라에서는 학생의 교육을 위하여 학전(學田)이라 불리는 토지와 노비·잡물 등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연안에 있는 여러 섬들의 어장(漁場)을 주어 그 세(稅)로써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최초의 관립 학당은 1261년(고려 원종 21년)에 개경에 설치되었던 동부학당(東部學堂)과 서부학당(西部學堂)이다. 이는 고려 시대 후기에 가서 유학 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데에 따른 조치였다. 이후 중부·남부·북부에도 학당이 설치되어 최종적으로 개경에는 5개의 학당이 세워졌으며, 이를 일컬어 오부학당(五部學堂)이라고 한다.

조선도 이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여 한양으로 천도를 한 후에 5부에 학당을 두었으며, 기존 개경에 있던 학당들은 모두 철폐하고 개성 성균관을 개성향교로 격을 낮추어 개성 지방의 중등교육을 전임하도록 하였다. 한양 천도 후에는 학당 건물들이 따로 마련되지 않아서 도성 내에 있던 사찰의 건물들을 빌어다 쓰기도 하였는데, 1411년(태종 21년)에 남부학당이 먼저 성명방(誠明坊)[1]에 교사(校舍)를 마련하였다.

또한 1411년 11월에는 예조의 건의에 따라 송나라의 외학제(外學制)를 토대로 오부학당의 학제가 마련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오부학당은 성균관으로 하여금 업무를 분담하여 교육하게 하고, 6품관 2원(員)을 교수관(敎授官), 7품 이하관 5원(員)을 훈도(訓導)로 삼되 반드시 왕의 재가를 받은 뒤에 교육임무를 전담하며, 아울러 성균관에서의 임무는 맡기지 않는다.

2. 학당의 정도는 10세 이상된 아동에게 입학을 허가하고, 15세에 이르러 소학(小學)의 공(功)을 이루면 성균관에 진학하게 한다.

3.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100명인데 만약 그 정원이 비게 되면 예조와 성균관의 관원이 학당에 나아가서 생도들의 실력을 시험하여 그 중 성적이 우수한 자를 성균관에 진학하게 하여 결원을 보충한다.

4. 학당 생도들의 학과공부를 권려하는 법은 성균관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다.

5. 학당의 학령(學令)은 성균관의 식(式)에 따른다.

6. 성균관원이 학당의 교육을 맡게 되면 교훈(敎訓)만을 맡기고 다른 업무는 겸임시키지 않는다.

이후 중부·서부·동부의 각 학당 건물들도 차례로 신축되었는데, 중부학당은 남부학당 건물을 빌려 쓰다가 1422년(세종 4년) 12월 북부 관광방(觀光坊)[2] 교사(校舍)를 마련하였고, 서부학당은 한성부 북쪽에 있던 경고(京庫)를 학사로 사용하다가 1435년(세종 17년)에 서부 여경방(餘慶坊)[3]에 교사를 마련하였으며, 동부학당은 사찰 건물을 사용하다가 서부학당이 새 교사를 마련한 그 즈음에 새 교사를 마련하였는데, 1438년(세종 20년) 3월에 동부학당의 건물을 북평관(北平舘)으로 사용하게 됨에 따라 동부 창선방(彰善坊)[4]에 있던 유우소(乳牛所)[5]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북부학당은 끝내 설립되지 못하고 1445년(세종 27년)에 폐지되었으며,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중학·동학·남학·서학의 사학이 종6품의 아문(衙門)으로 법제화됨으로써 한성부에는 4개 학당만을 두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이 4개의 학당을 일컬어 사부학당(四部學堂)이라 일컬었으며, 사학(四學)이라고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부학당의 건물은 모두 소실되었고, 훗날 사부학당은 재건되었으나, 이 당시 조선에서는 관학(官學)보다는 사학(私學)이 대세로 자리잡음에 따라 정원미달 등의 문제를 겪었고, 결국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2. 사설 학당

나라에서 수도에 세운 학당 외에도 개인이 세운 학당들이 마을마다 있었는데, 학당에서 교육을 맡은 이가 바로 훈장(訓長)이었다. 이들은 수도에 있었던 관립 학당과는 달리, 아동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명심보감·소학 등을 가르치는 정도의 기초적인 교육을 전담하였다. 또한 법제 안에서 설립·운영되지 않았고, 학당 건물을 따로 마련하지 않은 채 훈장의 집에서 운영되었으므로 교육 기관이라기 보다는 유치원 내지는 학원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2.3. 외국의 학당

영어로 '학당'을 번역한 말로는 '아테네움(Athenaeum)'이 있는데, 아테네 학당이라는 이름의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사실 아테네움이란, 전근대 한국에서 있었던 학당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게, 학자들끼리 모여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일컫는 것으로, 연구회·토론회나 학문 클럽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조금 더 본래 의미에 가깝다.

3. 여담


[1]중구 남학동[2]종로구 중학동[3]종로구 세종로[4]흥인지문공원 자리[5] 젖소를 기르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