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8E3D8><colcolor=#000> 작센의 공자 프란츠 크사버 Prinz Franz Xaver von Sachsen | ||
이름 | 독일어 | 프란츠 크사버 알베르트 아우구스트 루트비히 베노 (Franz Xaver Albert August Ludwig Benno) |
폴란드어 | 프란치셰크 크사베리 (Franciszek Ksawery) | |
출생 | 1730년 8월 25일 | |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 ||
사망 | 1806년 6월 21일 (향년 75세) | |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 ||
배우자 | 마리아 키아라 스피누치 (귀천상혼) (1765년 결혼 / 1792년 사망) | |
자녀 | 루트비히, 클라라 마리아, 요제프 크사버, 엘리자베트 우르술라, 마리아 아나, 베아트릭스 마리, 쿠니군데 아나, 마리아 크리스티나 자비나, 체칠리에 마리 | |
아버지 | 아우구스트 3세 |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 |
형제 |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아나, 마리아 요제파, 카를,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알베르트 카지미어, 클레멘스 벤체슬라우스, 마리아 쿠니군데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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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작센 선제후국의 공자이자 군인. 일명 '크사버 왕자'라고 불리며 7년 전쟁 시기에 작센군 총사령관으로서 활약했다. 루이 16세와 카를로스 4세의 외삼촌이다.[1]2. 일생
2.1. 초기 경력
1730년 8월 25일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의 넷째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군대에 관심이 많았고 1748년까지 형 카를과 함께 스위드 근위대장 요제프 안톤 백작에게 교육받았다. 나중에 요제프 안톤 백작을 대신해 가정교사가 된 콤테 데 벨렝가르드에게 혹독한 교육을 받았으나 학업에서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군사학에 몰두했다.2.2. 7년 전쟁
1756년 8월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작센을 침공하자, 피르나에 자리잡은 작센군에 입대하여 이에 맞서 싸우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작센군이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와해되어버리고 종국에는 항복을 선택하는 과정을 똑똑히 목도했고 약 1만 8천 명의 병사가 프로이센군으로 강제로 편입되는 것 역시 지켜봤다. 이후 그는 1757년 1월 바르샤바로 망명한 아버지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그에게 주어진 병력은 기병대 4개 연대와 비정규부대로 구성된 장교 178명과 기병 3,250명 뿐이었다. 그는 이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에 가담했고, 이후 프라하 전투, 콜린 전투, 모이 전투, 로이텐 전투에 참가하여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는 이 공적으로 1757년 12월에 중장으로 진급했다.이 시기, 프랑스군 역시 프로이센군에 강제로 편입되었다가 프랑스로 탈출한 작센 병사들을 모아서 새로운 작센 보병 군단을 편성했다. 이 보병 군단은 12개 연대 1만 명으로 구성되었다. 1758년 초, 크사버는 프랑스군에 들어가 이 작센 보병 군단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는 빈과 뮌헨을 거쳐 6월에 베르사유에 도착해 작센 군단과 합류 했고, 이후 프랑스군과 함께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1758년 6월 23일 크레펠트 전투에 참가한 그는 자신의 임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했지만 프랑스군이 패퇴하는 걸 막지 못했다. 이후 1759년 봄, 그는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의 지휘 아래 배속된 작센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의 군단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로부터 장비를 지급 받았으며 프로이센, 하노버, 헤센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로 무장했다. 또한 프랑스로부터 24문의 대포를 선물받았다.
1759년 8월 1일 민덴 전투에 참가한 크사버는 프랑스군이 지리멸렬한 전투력을 보이며 패주하는 과정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였다. 이후에도 프랑스군의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자신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그였으나 1761년 2월 15일 랑엔잘차 전투에서 4개의 보병 연대가 섬멸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2.3. 이후의 경력
1763년 10월 5일,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가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이 즉위했으나 폴란드 왕위를 상실했고 불과 73일 만인 12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크사버는 그의 어린 조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작센을 부강한 국가로 키우기 위해 개혁 정책을 착수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765년 10월, 크사버 왕자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를 대리하여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가 폴란드 왕으로 즉위한 것에 대해 지지하는 문건에 서명했다. 이제 작센은 폴란드에서 더 이상 어떠한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안토니아는 자신의 뜻에 위배되는 결정을 내렸다며 강력하게 반발했고, 결국 크사버 왕자는 1768년 9월 15일 섭정에서 물러나 프랑스로 거주지를 옮겼다.
1775년 5월, 크사버 왕자는 트르와 근처의 폰트-수르-센을 1,312,000 프랑으로 구입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장교로서 한동안 평온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급히 프랑스를 떠나 한동안 로마에서 살았고 1793년 작센으로 돌아와 자벨리츠 성에 은둔했다. 그 후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던 크사버 왕자는 1806년 6월 21일 사망했다. 향년 76세.
크사버 왕자는 생전에 1744년부터 1790년까지의 기간 동안 수많은 서신들을 작성했다. 이 서신들은 20개의 큰 상자에 보관되었는데, 그 무게는 총 2,500kg에 달한다. 이 서신들은 현재 프랑스 기록보관소에 보관되어 지금까지 연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