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더스크롤 시리즈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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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e Madness of Pelagius엘더스크롤 시리즈에 나오는 책. 엘더스크롤 2: 대거폴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광기의 펠라기우스'로 알려진 펠라기우스 셉팀 3세의 일생을 주제로한 책이다.
2. 본문
원문
펠라기우스의 광기
Tsathenes 지음
3E 199년, 삼촌 안티오쿠스 1세의 영광스러운 통치가 끝날무렵, 탐리엘 제국의 황제가 될 웨이레스트 왕실의 왕자 토리즈 펠라기우스 셉팀이 태어났다. 매그너스 왕은 안티오커스와 사이좋은 형제였기 때문에 웨이레스트 왕실은 펠라기우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펠라기우스 생후 10년동안은 나라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의 광기가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펠라기우스가 막 1살이 될 무렵, 안티오쿠스가 사망했고 공주 킨티라가 만인의 환호를 받으며 옥좌에 올랐다. 킨티라 2세는 펠라기우스의 사촌이자 숙련된 신비주의자, 그리고 마법사였다. 만약 킨티라가 앞으로 일어날 불행을 알 수 있었다면 궁전을 떠났을 것이다.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학술논문에 나와있지만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킨티라 2세의 권력은 어머니 포테마(흔히 솔리튜드의 늑대여왕으로 불리는)의 지원을 받은 펠라기우스의 사촌 유리엘에게 침해받고 있었다는데에 동의한다. 대관식이 1년 지났을 무렵 킨티라는 글렌포인트의 함정에 걸려 제국 지하 감옥에 수감된다.
유리엘 왕자가 옥좌에 올라 유리엘 3세로 즉위하자 탐리엘 전역이 전란에 휩쓸렸다. 특히 여제가 수감되어 있는 하이 락 지역의 전투가 치열했다. 펠라기우스의 부왕 매그너스는 형 세포루스와 동맹을 맺어 찬탈 황제에 대항해 웨이레스트 왕가는 유리엘 3세와 포테마 여왕의 분노를 샀다. 펠라기우스와 그의 형제자매, 어머니 유세일라는 발피에라 섬으로 피신했다. 유세일라는 디레니 일족 출신이며 지금도 이 작은 섬에 디레니 일족의 저택이 존재한다.
펠라기우스가 발피에라 지역에서 지낸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간병인과 방문자들 덕문에 많은 기록이 있다. 그를 만난 모든 사람들은 그가 잘생기고 운동, 마법, 음악에 관심있는 매력적인 소년이라고 묘사했다. 외교관들의 아첨임을 감안하더라도 펠라기우스는 셉팀 왕조의 미래에 축복같은 존재로 보였다.
펠라기우스가 8살일때 세포루스는 이치닥 전투에서 유리엘 3세를 살해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세포루스 1세를 칭했다. 그의 치세 10년 동안 세포루스는 포테마와의 전쟁에 매달렸다. 펠라기우스의 첫 번째 전투는 포테마의 죽음으로 전쟁이 종결된 솔리튜드 공방전이었다. 전투의 공로로 세포루스는 펠라기우스를 솔리튜드의 왕으로 삼았다.
솔리튜드의 왕이 되자 펠라기우스의 기행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황제의 사랑받는 조카이기 때문에 솔리튜드를 방문하는 외교관 중 펠라기우스를 비난하는 자는 적었다. 처음 통치 2년 동안은 펠라기우스의 체중 증감이 매우 두드러졌다. 왕위에 오른지 4개월 후 에본하트에서 온 외교관은 펠라기우스를 '건강하고 관대한 영혼과 자신의 허리만큼 넒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라고 묘사했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후 그를 방문한 퍼스트홀드의 공주는 그의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왕이 내 손을 잡았는데 마치 해골 같이 느껴졌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정말로 매우 허약해 보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솔리튜드 공방전 3년 후, 세포루스는 독신인채 사망했다. 결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도 없었다. 유일한 혈육은 펠라기우스의 부왕 매그너스였기 때문에 매그너스는 웨이레스트를 떠나 임페리얼 시티로 가 매그너스 1세 황제가 된다. 매그너스는 연로했고 펠라기우스는 생존해 있는 왕자 중 가장 나이가 많았기에 탐리엘의 모두는 센티넬에 주목했다. 이즈음 펠라기우스의 기행은 악명높았다.
센티넬의 왕으로서 그의 행동에는 많은 전설이 있지만 제대로 기록된 것은 매우 적다. 펠라기우스는 실베나르의 어린 왕자와 공주들을 가두어 두고 문 밑으로 서명없는 선전포고문서를 보낼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펠라기우스가 지역 축제에서 옷을 벗은채 연설을 했을때는 그의 고문들이 그를 더욱 더 유심히 지켜봐야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매그너스 1세의 명으로 펠라기우스는 유서 깊은 다크 엘프 귀족가문의 아름다운 상속녀 카타리아 라'아딤과 결혼을 한다.
다크 엘프와 노르드의 왕이 결혼하는 것은 그다지 인기가 없다. 결혼의 이유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두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매그너스 1세는 라'아딤 가문이 속한 에본하트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에본하트의 이웃에 위치한 모운홀드는 제국 초기부터 역사적으로 동맹이었고 바렌지아 여왕의 부군은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에본하트가 유리엘 3세와 포테마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다.
결혼의 다른 이유는 카타리아의 개인에 대한 것이다. 카타리아는 그녀의 미모만큼이나 외교적 수완이 좋았다. 펠라기우스의 광기를 막을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카타리아 그녀였다.
3E 145년 5월 8일에 매그너스 1세는 수면 중 사망했다. 펠라기우스의 여동생 졸레스가 솔리튜드의 왕위에 올랐고 펠라기우스와 카타리아는 임페리얼 시티로 향해 탐리엘 제국의 황제, 황후 대관식을 치렀다. 펠라기우스 머리에 왕관이 씌워질 때 정신을 잃었다고 하는데 카타리아가 부축해주어 옥좌에 매우 가까이에 있던 사람 몇몇만 이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많은 펠라기우스의 이야기처럼 이것 역시 명확히 증명되지 않았다.
펠라기우스 3세는 실질적으로 탐리엘을 통치하지 않았다. 카타리아와 원로위원회가 모든 결정을 내려 펠라기우스를 곤경으로부터 구원해주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 3세의 통치에 관한 일화는 존재한다.
아르고니안 대사가 블랙로즈에서 황궁으로 왔을때 펠라기우스는 마치 마치 아르고니안 언어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킥킥거리는 소리만으로 대화하려고 했다고 한다.
펠라기우스는 결벽증 기질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고 황궁을 방문한 많은 손님들이 새벽부터 바닥을 닦는 소리에 잠을 깼다고 한다. 펠라기우스가 하인들의 작업을 시찰하는 동안 그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갑자기 바닥에 배변을 했다는 설화는 아마도 사실이 아닌 듯 하다.
펠라기우스가 황궁을 방문하는 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펠라기우스를 요양원으로 보내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카타리아는 펠라기우스가 제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6년간 황제는 다양한 시설과 요양원에 머물렀다.
제국의 배신자들은 이 기간에 많은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펠라기우스에 대한 은밀한 실험과 잔혹한 고문에 대한 소문이 거의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카타리아 황후는 황제가 떠난지 얼마가 지나서 임신을 하게 되었고 황후의 불륜에 대한 소문이나 제정신인 황제를 유폐했다는 등의 음모론이 떠돌았다. 카타리아가 밝혔듯이, 그녀는 펠라기우스의 밀실을 찾은 후 임신하게 되었다. 다른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황후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그녀와 새 남편 라리아트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아이는 유리엘 4세로서 오랫동안 제국을 통치했다고 잘 알려져있다.
어느 따뜻한 1월의 밤 펠라기우스 3세는 비트니 섬의 키나레스의 사원의 밀실에서 열병에 걸려 3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카타리아는 46년을 더 통치하고 그녀와 펠라기우스 사이의 유일한 자녀 카신데르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펠라기우스의 기행은 백성들에게 그의 삶과 죽음을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사망한 2월 2일 (기록이 부정확하기 때문에 정말인지 아닌지 모르지만)은 모든 바보짓이 허용되는 '미치광이 펠라기우스'의 날로 경축되고 있다. 그리고 셉팀왕조 역사에 있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황제로 명성을 얻게되었다.
펠라기우스의 광기
Tsathenes 지음
3E 199년, 삼촌 안티오쿠스 1세의 영광스러운 통치가 끝날무렵, 탐리엘 제국의 황제가 될 웨이레스트 왕실의 왕자 토리즈 펠라기우스 셉팀이 태어났다. 매그너스 왕은 안티오커스와 사이좋은 형제였기 때문에 웨이레스트 왕실은 펠라기우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펠라기우스 생후 10년동안은 나라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의 광기가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펠라기우스가 막 1살이 될 무렵, 안티오쿠스가 사망했고 공주 킨티라가 만인의 환호를 받으며 옥좌에 올랐다. 킨티라 2세는 펠라기우스의 사촌이자 숙련된 신비주의자, 그리고 마법사였다. 만약 킨티라가 앞으로 일어날 불행을 알 수 있었다면 궁전을 떠났을 것이다.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학술논문에 나와있지만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킨티라 2세의 권력은 어머니 포테마(흔히 솔리튜드의 늑대여왕으로 불리는)의 지원을 받은 펠라기우스의 사촌 유리엘에게 침해받고 있었다는데에 동의한다. 대관식이 1년 지났을 무렵 킨티라는 글렌포인트의 함정에 걸려 제국 지하 감옥에 수감된다.
유리엘 왕자가 옥좌에 올라 유리엘 3세로 즉위하자 탐리엘 전역이 전란에 휩쓸렸다. 특히 여제가 수감되어 있는 하이 락 지역의 전투가 치열했다. 펠라기우스의 부왕 매그너스는 형 세포루스와 동맹을 맺어 찬탈 황제에 대항해 웨이레스트 왕가는 유리엘 3세와 포테마 여왕의 분노를 샀다. 펠라기우스와 그의 형제자매, 어머니 유세일라는 발피에라 섬으로 피신했다. 유세일라는 디레니 일족 출신이며 지금도 이 작은 섬에 디레니 일족의 저택이 존재한다.
펠라기우스가 발피에라 지역에서 지낸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간병인과 방문자들 덕문에 많은 기록이 있다. 그를 만난 모든 사람들은 그가 잘생기고 운동, 마법, 음악에 관심있는 매력적인 소년이라고 묘사했다. 외교관들의 아첨임을 감안하더라도 펠라기우스는 셉팀 왕조의 미래에 축복같은 존재로 보였다.
펠라기우스가 8살일때 세포루스는 이치닥 전투에서 유리엘 3세를 살해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세포루스 1세를 칭했다. 그의 치세 10년 동안 세포루스는 포테마와의 전쟁에 매달렸다. 펠라기우스의 첫 번째 전투는 포테마의 죽음으로 전쟁이 종결된 솔리튜드 공방전이었다. 전투의 공로로 세포루스는 펠라기우스를 솔리튜드의 왕으로 삼았다.
솔리튜드의 왕이 되자 펠라기우스의 기행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황제의 사랑받는 조카이기 때문에 솔리튜드를 방문하는 외교관 중 펠라기우스를 비난하는 자는 적었다. 처음 통치 2년 동안은 펠라기우스의 체중 증감이 매우 두드러졌다. 왕위에 오른지 4개월 후 에본하트에서 온 외교관은 펠라기우스를 '건강하고 관대한 영혼과 자신의 허리만큼 넒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라고 묘사했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후 그를 방문한 퍼스트홀드의 공주는 그의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왕이 내 손을 잡았는데 마치 해골 같이 느껴졌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정말로 매우 허약해 보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솔리튜드 공방전 3년 후, 세포루스는 독신인채 사망했다. 결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도 없었다. 유일한 혈육은 펠라기우스의 부왕 매그너스였기 때문에 매그너스는 웨이레스트를 떠나 임페리얼 시티로 가 매그너스 1세 황제가 된다. 매그너스는 연로했고 펠라기우스는 생존해 있는 왕자 중 가장 나이가 많았기에 탐리엘의 모두는 센티넬에 주목했다. 이즈음 펠라기우스의 기행은 악명높았다.
센티넬의 왕으로서 그의 행동에는 많은 전설이 있지만 제대로 기록된 것은 매우 적다. 펠라기우스는 실베나르의 어린 왕자와 공주들을 가두어 두고 문 밑으로 서명없는 선전포고문서를 보낼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펠라기우스가 지역 축제에서 옷을 벗은채 연설을 했을때는 그의 고문들이 그를 더욱 더 유심히 지켜봐야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매그너스 1세의 명으로 펠라기우스는 유서 깊은 다크 엘프 귀족가문의 아름다운 상속녀 카타리아 라'아딤과 결혼을 한다.
다크 엘프와 노르드의 왕이 결혼하는 것은 그다지 인기가 없다. 결혼의 이유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두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매그너스 1세는 라'아딤 가문이 속한 에본하트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에본하트의 이웃에 위치한 모운홀드는 제국 초기부터 역사적으로 동맹이었고 바렌지아 여왕의 부군은 붉은 다이아몬드의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에본하트가 유리엘 3세와 포테마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다.
결혼의 다른 이유는 카타리아의 개인에 대한 것이다. 카타리아는 그녀의 미모만큼이나 외교적 수완이 좋았다. 펠라기우스의 광기를 막을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카타리아 그녀였다.
3E 145년 5월 8일에 매그너스 1세는 수면 중 사망했다. 펠라기우스의 여동생 졸레스가 솔리튜드의 왕위에 올랐고 펠라기우스와 카타리아는 임페리얼 시티로 향해 탐리엘 제국의 황제, 황후 대관식을 치렀다. 펠라기우스 머리에 왕관이 씌워질 때 정신을 잃었다고 하는데 카타리아가 부축해주어 옥좌에 매우 가까이에 있던 사람 몇몇만 이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많은 펠라기우스의 이야기처럼 이것 역시 명확히 증명되지 않았다.
펠라기우스 3세는 실질적으로 탐리엘을 통치하지 않았다. 카타리아와 원로위원회가 모든 결정을 내려 펠라기우스를 곤경으로부터 구원해주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 3세의 통치에 관한 일화는 존재한다.
아르고니안 대사가 블랙로즈에서 황궁으로 왔을때 펠라기우스는 마치 마치 아르고니안 언어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킥킥거리는 소리만으로 대화하려고 했다고 한다.
펠라기우스는 결벽증 기질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고 황궁을 방문한 많은 손님들이 새벽부터 바닥을 닦는 소리에 잠을 깼다고 한다. 펠라기우스가 하인들의 작업을 시찰하는 동안 그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갑자기 바닥에 배변을 했다는 설화는 아마도 사실이 아닌 듯 하다.
펠라기우스가 황궁을 방문하는 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펠라기우스를 요양원으로 보내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카타리아는 펠라기우스가 제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6년간 황제는 다양한 시설과 요양원에 머물렀다.
제국의 배신자들은 이 기간에 많은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펠라기우스에 대한 은밀한 실험과 잔혹한 고문에 대한 소문이 거의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카타리아 황후는 황제가 떠난지 얼마가 지나서 임신을 하게 되었고 황후의 불륜에 대한 소문이나 제정신인 황제를 유폐했다는 등의 음모론이 떠돌았다. 카타리아가 밝혔듯이, 그녀는 펠라기우스의 밀실을 찾은 후 임신하게 되었다. 다른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황후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그녀와 새 남편 라리아트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아이는 유리엘 4세로서 오랫동안 제국을 통치했다고 잘 알려져있다.
어느 따뜻한 1월의 밤 펠라기우스 3세는 비트니 섬의 키나레스의 사원의 밀실에서 열병에 걸려 3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카타리아는 46년을 더 통치하고 그녀와 펠라기우스 사이의 유일한 자녀 카신데르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펠라기우스의 기행은 백성들에게 그의 삶과 죽음을 사랑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사망한 2월 2일 (기록이 부정확하기 때문에 정말인지 아닌지 모르지만)은 모든 바보짓이 허용되는 '미치광이 펠라기우스'의 날로 경축되고 있다. 그리고 셉팀왕조 역사에 있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황제로 명성을 얻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