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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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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ells_egyptian_ship_red_sea.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reek_Galleys.jpg
고대 이집트의 갤리. 그리스 시대의 트리에레스. 그리스 해군에서 1987년에 복원한 갤리선 올림피아스 호의 사진을 복사 붙여넣기해서 만든 사진이다.
파일:external/4.bp.blogspot.com/Ben_Hur_1953_720p_mkv.jpg 파일:attachment/b0005121_4a83af7888c74.jpg
영화 벤허 초중반의 해전에 등장하는 로마 해군의 갤리선. 로마군선 특유의 발리스타 포탑용 망루와 도선 전투용 도개교 '코르부스(까마귀)'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1] 16세기의 갤리선 모형.
1. 개요2. 역사3. 쇠퇴와 몰락4. 대중매체에서의 갤리선
4.1. 영화4.2. 게임4.3. 소설
5. 미니어처6. 유명한 갤리선

1. 개요

Galley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지중해의 지배자였던 범선의 한 종류다. 그리스로마에서 주로 사용했지만, 이집트페르시아에서도 유사한 배들을 사용했고 그 배들도 갤리라고 부른다.

2. 역사

노를 주로 쓰고 돛을 보조로 쓴다라고 한국어 사전에는 나와있지만 실은 그 반대이다. 노를 젓는다는 건 상상 이상의 중노동으로서, 제아무리 숙련된 노잡이라고 할지라도 노만으로 배를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전투 시 민첩한 기동을 위해 노에 집중하던 군함도 평상시에는 돛으로 다녔다. 더욱이 당시의 노 젓기법은 수많은 노잡이들이 전부 작은 노를 하나씩 붙잡고 젓는 센실레(alla sensile)[2] 방식이라 비숙련자가 손을 댔다간 노가 엉켜 대참사가 나게 된다.

때문에 당시 갤리선의 노잡이는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철저하게 자유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노예 노잡이들은 나라가 망할 것 같은 비상상황에서나 보이는 존재들이고, 이 경우 비숙련자들인 노예들의 사기라도 올려 노를 열심히 저을 수 있도록 해방을 약속해주었다.

이처럼 노잡이들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재산이나 병역이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던 고대 지중해의 아테네에서는 빈민층도 부유층과 대등한 정치적 권리를 가지는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었다. 육군 중심 국가였다면 중장보병 정도는 되어야 병역에 기여했음을 인정받아 어느 정도의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즉, 값비싼 중장보병의 무기와 갑옷을 마련하고 유지할 수 있는 재산이 있어야만 참정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아테네는 해군도 중시되었고, 그만한 활약과 공적을 보였다. 그래서 무기와 갑옷을 마련할 돈이 없는 빈민층들도 해군의 노잡이로 기여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갤리선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지중해는 대양과 달리 바람이 불규칙하고 변덕스러웠기 때문에 상선이고 전투선이고 할 것 없이 노라는 보조적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갤리선이 유리했고, 이쪽이 주력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투 시에는 돛을 내리고 노만으로 조정하였다.

그리스 초창기 갤리선은 아르카익 시대에 등장한 펜테콘테로스(πεντηκόντερος, penteconter)다.[3] 영어로는 펜테콘터 또는 펜타콘터라고 읽는다. 뜻은 '50개의 노'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25쌍의 노잡이들이 배를 저었다. 상선으로도 쓰이기도 했고, 전투함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후 디에레스가 등장했고, 주로 3단(트리에레스)에서 5단(펜테레스) 갤리선이 전투의 주력이었는데 여기서 몇 단이라는 것의 의미는 갑판의 수로서 3단은 3층의 복합갑판에 각각 노잡이와 노가 있다라는 식이다. 즉 단수가 높을수록 노잡이가 더 많은 것이기 때문에 배의 크기와 기동성에서 유리했다. 당시 해전은 상대방의 옆구리를 노려 충각으로 들이받거나 나란히 접현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주된 전술이었는데, 덩치도 좋고 기동성도 나은 고단 갤리선이 더 강했다. 그러나 후술하는 것처럼 실제로는 3단 이상 올라가진 못했다.

페르시아 해군은 대부분 1단 갤리선(모니리스)이었기에 살라미스 해전 당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연합군의 3단 갤리선을 이기지 못했고, 알렉산더 대왕 사망 이후 디아도코이 전쟁 무렵부터 출현한 5단 갤리선은 헬레니즘 제국 해군의 주력함이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Trireme_cut-fr.svg.png 파일:external/www.cs.drexel.edu/quinquereme_2.jpg
3단 갤리선의 노 배치 단면도. 5단 갤리선의 노 배치 단면도.
명칭은 '5단'이지만 당시 갤리선은 용골이 없다는 구조적 한계 때문에 3단 이상은 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실제로는 3단 구조에 한 조의 노잡이가 5명으로 배치되어 5단선이라고 불렸다.
7단선, 10단선도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3단 구조였다.
3단 갤리선에는 없던, 노를 보호하는 돌출 구조물이 현측에 설치된 것도 중요한 개량점이다.
파일:271531436_5148898618478017_1425366506829475448_n.jpg
최초의 쌍동선 중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국왕 기함 '40단선'
헬레니즘 제국 시대가 되면서 갤리선들은 경쟁적으로 갤리선을 대형화시켰는데, 노잡이의 수를 늘린 10단선, 20단선도 등장하였고, 그중 가장 최대의 함선은 20단선 2척을 붙여 쌍동선으로 만든 '40단선'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하지만 이런 초대형 함선들은 노가 길어지면서 추진 효율이 나빠지고 움직임이 둔해져 해전이 벌어지면 직접 전투에 뛰어들기보다는 넓은 갑판이나 전투탑 위에 발리스타, 카타풀타 등 투사무기를 설치하고 먼 거리에서 화력지원을 하는 정도로 사용되었다.

헬레니즘 제국들이 몰락한 후에 지중해의 지배자는 5단 갤리선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페니키아인이 세운 국가, 즉 카르타고였다.

그러나 여기서 나타난 변수가 로마인이었다. 로마는 소형선 이상을 몰아본 적 없는 농경민족이었으나, 포에니 전쟁에서 신병기인 까마귀(코르부스)를 앞세워 카르타고를 격파하였다. 까마귀는 일종의 다리를 세워놓은 구조물로서 고정용 밧줄을 끊으면 상대방의 배에 내리꽂혀서 양쪽 배를 고정시켜버린다. 이렇게 되면 항해술을 발휘할 여지는 없고 잘 훈련된 로마 군단병들이 무제한으로 건너갈 수 있었기 때문에 용병과 뱃사람들로 이루어진 카르타고군보다 훨씬 유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포에니 전쟁 당시에 로마군의 5단층 갤리선은 많은 병력을 탑승시키기 위해서 카르타고 측 5단층 갤리선보다 좌우폭이 더 넓었다고 한다. 덕분에 배의 안정성이나 병력 탑승 공간 등에서 카르타고보다 유리했으나 그만큼 배의 무게가 늘어나서 속도가 줄어든 데다 배를 다루는 숙련도 등에서도 카르타고보다 떨어져서 선상백병전을 위해 가변식 도개교인 까마귀가 도입되었다.[4] 반면 카르타고 해군은 숙련된 군선 운영능력을 바탕으로 한 충각전술을 선호했다.[5]

그러나 까마귀를 장착할 경우 무게가 늘어나고 바람의 영향을 더 크게 받게 되어 결과적으로 배의 안정성이 매우 크게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고, 결국 코르부스는 얼마 안 가 사라진다. 그 대신 갑판 위에 작은 성채 같은 전투용 탑이 설치되어 접현전 시 적함의 갑판에 발리스타, 투창, 화살을 높은 위치에서 쏟아부을 수 있게 개량되었다. 그리고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함재 발리스타하르팍스라는 갈고리가 달린 창을 발사해 적함을 붙들고 끌어당겨 아군 병사들이 등선육박전을 할수 있도록 하여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해전에서 격파한다.

이런 로마식 도선 전술이 먹히지 않았던 상대는 바로 켈트족. 갈리아 전기에는 로마와 켈트의 해상전에서 켈트 쪽의 배가 범선이라서 더 크고 높으면서 튼튼해 개전 초기에 켈트족이 선단을 요새처럼 사용해 높은 위치에서 아래로 원거리 무기들을 사용해 로마 해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 기록이 나온다. 거기다가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해당 지역의 갈리아인들은 거친 바다에서의 항해 경험이 풍부했다. 그러나 당시 켈트족의 배에 이동수단이 돛밖에 없다는 점을 노려 돛을 무력화시키고, 접근전에 로마군이 더 강하다는 점을 활용해 최대한 접근전으로 끌고가 적의 배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전법을 사용해 로마군이 승리하게 된다. 마침 도망가던 갈리아 범선들도 바람이 멈춰서 전부 로마군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파일:15613948258_a45836f0a1_b.jpg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악티움 해전 기념비의 일부분
아래쪽의 큰 배는 5단선, 위쪽의 작은 배는 리부르니안을 묘사했다.
갑판 위에 작은 성채 같은 전투용 탑이 설치된 것이 로마 갤리선의 특징이었다.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를 사실상 내해로 장악해버린 로마 제국은 해적만 퇴치하면 큰 문제는 없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배의 발전이나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전면전이 없어졌으므로 점차 전함급 위상을 가진 5단선(퀸커림)들이 전부 퇴역하고 오늘날의 순양함이나 구축함 정도의 역할을 하던 2단선인 '리부르니안'이 주력함으로 되었다.[6] 리부르니안은 동로마 제국 시대에 더 개량되어 '드로몬'으로 발전한다.
파일:main-qimg-7ae9d8c284c724ebdbc173faa0f8b19b-lq.jpg
서로마 제국 붕괴 후 북해를 주름잡던 바이킹들도 '랑스킵'(영어로 롱 쉽이라고도 부른다)이라는 갤리선을 타고 북해를 누볐다.

한편 서로마 제국 붕괴 이후의 신흥 해양 세력인 베네치아제노바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 역시 단수가 낮은 갤리선을 사용했다. 이런 도시국가들은 인구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노잡이들도 전투에 참가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려면 다단 갤리선은 불편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흔히 생각하는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갤리선 노예가 대중화된 것은 152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 이유는 이 시기에 여러 사람이 하나의 큰 노를 젓는 '스칼로치오'라는 새로운 노젓기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인데, 이전에 쓰던 '센실레'(alla sensile)[7] 방식은 노꾼 하나가 작은 노를 하나씩 잡고 저었기에 노가 많은 갤리선의 경우 숙달된 노꾼이 아니면 엉키기 쉬웠다. 그래서 이때는 노꾼이 상당한 고급 인력이었고, 노꾼도 자유민들을 모병해서 동원했다.[8]

그러나 '스칼로치오'(a scaloccio) 방식은 여러 사람이 하나의 큰 노를 젓는 방식으로, 노 하나에 4명이 붙어서 노를 조종할 때 노의 통제는 노의 제일 끝에서 조종하는 1명뿐이었기에 숙련자가 별로 필요하지 않았고, 이때부터 노예나 죄수들을 노잡이로 쓰는 것이 일반화되어 스페인이나 바르바리 해적, 오스만 제국은 물론 심지어 성 요한 기사단까지도 노예 선원들을 사용했다. 이렇게 여럿이 하나의 큰 노를 젓는 스칼로치오 방식이 보편화되면서 노잡이의 대우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 스칼로치오 방식은 노를 저을 때 제일 끝의 노를 직접적으로 부리는 노잡이만 숙련자면 충분했기 때문에(다른 노잡이들은 거드는 일만 한다) 예전처럼 숙련자가 많이 필요하지 않아 자연히 노예들을 노잡이로 부리게 되었고, 처우도 바닥을 치는 게 일반적이었다.[9][10]

여담으로 노예를 쓰는 갤리선은 배 전체에 악취가 진동했다고 한다. 수백 명의 노예들이 씻지도 못하고, 땀과 오줌, 똥내에 절어 사슬에 묶여있기에 사람들은 갤리선이 지나가기만 해도 악취에 몸을 떨었고, 항구에서는 배가 도착하기 전에 냄새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탑승한 갤리선이 항구에 들어오면 그 날로 항구에 보관된 모든 식량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도 힘든 일에 시달리며 제대로 먹지도 못했기 때문에, 일단 음식을 먹을 기회가 오면 마구잡이로 폭식을 하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했다.

프랑스의 갤리선 노예들1,프랑스의 갤리선 노예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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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쇠퇴와 몰락

하지만 1500년 경이 되면 갤리선의 유행도 서서히 가라앉게 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도스 섬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면서 동지중해가 완전히 오스만 제국의 것이 되었고, 오스만 제국이 동방의 물산을 전부 장악하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는데다 이슬람 해적이 해로를 위협하기까지 하니 서구권에서는 이윤은 줄고 위험은 커진 지중해보다는 새로운 미지의 땅을 향해 나가는 길을 선택했고, 스페인,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같은 신흥 해상 강대국의 등장으로 바다의 패권을 다투는 무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 쪽으로 옮겨갔다.

문제는 갤리선이 대서양 같은 대양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점이다. 대서양같은 큰 바다는 지중해에 비해 풍랑이 거센 대신 풍향이 일정하다는 특징이 있는데, 갤리선은 선체가 길쭉하고 직선형이라 파도에 많이 휘둘리는 반면, 범선은 바람만 잘 따라가면 노 없이도 항해할 수 있으니 노잡이와 노가 들어갈 공간까지 몽땅 화물칸으로 바뀌어 적재량도 많고 경제성도 좋았다. 한편 갤리선은 노가 해수면에 닿아야하기 때문에 선체를 높이는 것도 한계가 있었으며,[11] 흘수[12]가 낮아 파도가 높은 먼 바다의 경우 파도가 칠 때마다 흔들림이 심하고 갤리선 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와 침수할 위험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복합돛이 등장하면서 범선도 불규칙한 바람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게 되면서 갤리선의 역풍 대응이 쉽다는 장점이 무색해졌다.

대포의 발달도 갤리선의 몰락을 앞당겼다. 범선은 양 선측에 다량의 대포를 적재할 수 있었다. 자그마한 브릭같은 범선도 20문 가까이 탑재할 수 있고, 전열함 같은 본격적인 주력전함은 보통 80문, 많게는 100문이 넘게 대포를 탑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갤리선은 선측에 이미 노가 들어서 있기 때문에 대포를 적재하기 곤란했다. 판옥선이나 다른 범선처럼 여러 층의 갑판을 쌓고 대포 층과 노잡이 층을 분리하는 방법, 또는 베네치안 갤리어스처럼 갑판에 포탑을 증설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렇게 하자니 노 때문에 대포를 무조건 높은 층에만 배치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노 잡는 사람과 빈 공간이 아래에 있고 쇳덩이인 대포의 위치가 높으면 무게중심이 높아져 풍랑에 전복되기 쉬워지고, 게다가 대포를 좀 강한 걸 쓰다가는 대포 사격 반동과 파도가 합쳐져 배가 전복될 가능성이 커진다. 강한 대포일수록 대체적으로 무겁단 건 덤이다.[13] 덕분에 갤리선은 대포를 별로 탑재하지 못하는데, 가장 커다란 베네치안 갤리어스조차 14문 정도밖에 탑재하지 못했을 정도다.[14] 판옥선 같은 경우 지하철 한칸(19.5m) 조금 넘는 크기에 20문의 대포와 100명 넘는 인원, 다수의 노를 실었지만 이건 연안방어용 전투함이라 처음부터 장거리 항해를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사실 최대 단점은 바로 보급이었다. 식량도 그렇지만, 특히 '식수'. 사람은 물 안 마시면 죽고, 노잡이처럼 중노동을 하면 식수 소모량도 급증한다. 전투용이라면 군수물자를 실어야 해서, 상선이면 상품을 실어야 해서 선체에 식수를 저장할 공간이 부족했고, 하루나 이틀에 한 번씩은 식수를 보급받아야 했다. 다급한 정보를 전하기 위한 전령 역할이면 모를까, 이 보급거점이 없다면 갤리선은 무력화된다.[15]. 당연히 식수 보급처가 없는 대양에서는 못 쓰고, 지중해와 흑해 지역에서도 해안선이 적대적 육군에게 점령당하면 빠져야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갤리선은 해안선을 따라 계속 돌아야 하는 항해 방법이 강제되는 선박이다.

무풍지대에서는 갤리선이 좋을 것 같지만, 무풍지대는 적도 주변과 북위/남위 30도 인근에서 발생하는데 유럽에서 북위 30도를 보려면 모로코 남부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나마도 서아프리카에서는 무풍지대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멕시코 인근 해안인 사르가소 해의 무풍지대가 유명하지만, '지대'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현상은 특정 지역에서만 발생했기 때문에 그곳을 피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따라서 애초에 무풍 지대로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으며, 무풍지대를 돌파하겠답시고 갤리선으로 사람이 노저어서 대서양을 건넌다는 무모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흔한 오해가 범선은 바람이 적당한 방향에서 불어주지 않으면 선회조차 못한다는 것인데, 무풍지대만 아니라면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든 간단히 선회가능하다. 1830년대 기준으로 속도로는 산들바람만 불어도 갤리선과 비슷한 3~4노트 가량을 낼 수 있고 강한 바람이 불면 8노트까지도 근접한다. 클리퍼 같이 속도에 집중한 후기형 범선은 1854년 Champion of the Seas가 하루 평균 19노트를 기록했을 정도. 참고 다만, 이같은 속도를 달성한 건 톱 세일이나 갤런트 세일은 물론 로얄 세일, 스카이 세일 등 여러 종류의 이 개발되고 구리 도금 및 철제 부품의 보편화가 이루어진 19세기 이후의 일이며, 그 이전에는 아주 유리한 바람이 불 때나 10노트 이상이 가능했고 앞서 말한 산들바람에는 2노트, 일반적인 풍속에는 4~5노트 정도가 한계였다. 때문에 그래도 갤리선이 유리한 지중해에서는 1600년대까지, 대서양 연안 국가들보다 항해기술이 부족한 바르바리 해적들은 17세기까지 갤리선을 널리 사용했지만 결국 이들도 18세기 이후에는 대부분 범선으로 바꾸게 된다.

스페인은 연안 방어용도로 갤리를 운영했고 다른 나라도 해안 방어용도로 노를 쓰는 건보트를 운영한 적이 있지만, 연안방어에만 한정된 용도를 쓰느니 불편함을 감소하더라도 범선을 쓰는 게 나았고, 애초에 연안 방어의 주력은 해안포대였던 데다가 시대가 흐르면서 점점 원양에서 해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야말로 없는 것보단 나은 신세였다. 그리고 갤리선은 기범선이 개발되자 귀신같이 종적을 감추었다. 추가로 기범선의 개발로 인해 더 이상 함선에 노꾼이 필요 없어졌으며 이로인해 배에서 노도 삭제되었다. 노꾼이었던 사람은 인원이 크게 줄어 화부가 되었는데 모터선이 개발된 이후부터는 그나마 화부도 없어졌다.

결과적으로 18세기에 이르면 전 지중해에서 현역으로 남아있던 갤리는 50척 정도에 불과했고, 그 절반은 지중해에서만 활동하던 베네치아 소속이었다. 심지어 18세기부터는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조차 갤리선을 버리고 지벡을 사용했을 정도. 반면, 지형이 좁고 복잡하던 발트 해에서는 19세기까지도 사용되었는데 그나마도 본격적인 해전에 투입되기보다는 일종의 상륙함에 가까웠다.

현대에는 당연히 사라졌고, 아주 가끔 리인액터들이 직접 제작해서 갤리선으로 항해를 재현하는 정도로만 남아 있다. 레저, 스포츠 용으로 흔히 사용하는 카누카약 등은 갤리가 아닌 보트에 속한다.

4. 대중매체에서의 갤리선

고대 갤리선의 경우 채찍질을 하며 노예들에게 노젓기를 시키는 것이 클리셰처럼 나온다.

4.1. 영화

4.2. 게임

4.3. 소설

5. 미니어처

파일:zvezda galley-vert.jpg
프라모델로는 러시아 즈베즈다에서 시리즈를 내놓고 있다.

분명 인기는 많지만 그 빼곡한 노로 인해 제작 난이도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또한 그 때문에 가격이 범선 모델을 가볍게 돌파하기에 제대로 된 모형을 가지고 미니어처 게임 해전을 벌이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 대신 페이퍼 크래프트로 만든 게임은 존재한다. 다른 회사의 미니어쳐 군단과 같이 쓰는 공생적인 모델이다.

그리고 RC모델로도 만들어진 바 있다. 안에 사공들까지 움직인다.

6. 유명한 갤리선



[1] 그런데 이 시대에는 이미 코르부스는 훨씬 경량화된 하르팍스로 교체되었으므로 두개가 동시에 있는 저 모습은 재현 오류다.[2] 흔히 센사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탈리아어이기 때문에 정확한 발음은 센실레가 맞는다.[3] 영어 표기는 이외에도 pentekonter, pentaconter, pentecontor or pentekontor라고 표기하기도 한다.[4] 로마 5단층 갤리선에서 노잡이를 제외한 탑승 전투병력은 최대 120명이었다.[5] 카르타고의 경우는 노잡이를 제외한 5단층 갤리선 탑승 병력이 최대 60~80명 정도였다고 한다.[6] 일리리아 해안지대에 살던 부족인 리부르니아족이 해적질을 할때 타던 쾌속선의 설계를 개량한 것이어서 리부르니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7] 영어식 발음인 '센사일'로도 불린다.[8] 이때도 노예를 아주 안 쓴 건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는 말 그대로 나라의 운명이 멸망 직전일 정도로 정말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전혀 쓰지 않았으며, 먼저 자유민으로 신분을 올려 주거나 전후 자유민으로 올려주기로 계약한 뒤 노잡이로 고용하는 식이었다. 이 경우의 대표적인 예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운명이 경각에 달한 아테네가 벌인 아르기누사이 해전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이 있다.[9] 당시 노잡이들의 옷은 단벌뿐이었고, 하루에 주는 식량은 하루 한 끼에 그 수준은 다이제 비스켓 한 봉지 정도의 열량. 이거 하나로 하루를 중노동하며 버텨야 한다.[10]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도 프랑스에서 갤리선 노예로 구른 적이 있었다.#1,#2[11] 선체가 너무 높으면 적재가 없을 때와 적재가 가득할 때 선박의 높이 차이가 커서 노를 다루기 힘들었다.[12] 배가 바닷 속에 잠겨있는 깊이를 의미하며, 만재 흘수선 이상으로 배가 잠겨있다면 과다적재로 배가 침몰할 위험이 커진다.[13] 이건 범선도 사정이 마찬가지라서 아랫층엔 무겁고 멀리 나가며 반동이 큰 '롱 건'을, 윗층엔 사거리가 짧지만 가볍고 반동이 적은 '카로네이드'를 배치하는 게 보편적이었다.[14] 대항해시대 시리즈 같은 게임에서는 50문 이상 탑재하는 경우도 있는데 뻥이다.[15] 사례는 다르지만 이순신의 판옥선 함대가 전라도 통영에서 경상도 부산을 공격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16] 철기시대로 발전하면 다시 한 번 삼단 갤리선 (Trireme)으로 업그레이드 가능.[17] 실제로 최종 업글 형태인 갤리온이 돼서야 이름과 외형이 일치한다.[18] 타국의 캐러밸처럼 어업, 수송, 전투가 모두 가능하다. 물론 제해권 싸움에서 이놈만 가지고 싸울 생각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캐러밸과 비슷하다.[19] 조력이 일정 이하면 함대 전체 속도가 50% 감소하는 지역. 패치 전에는 아예 통과불가능한 소위 "조력벽" 지역이었다.[20] 내파의 개념을 특정 지역 진입 조건상 (예시 - 서인도지역은 내파 50, 동남아지역은 내파 80부터 지역 진입 가능)으로 해석, 높은 티어의 배는 무조건 낮은 티어 배 대비 내파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