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22:58:31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2007년 포르투갈의 공영방송국(RTP)이 포르투갈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포르투갈인 100명'을 선정. 단, 중복 투표가 포함됨.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알바루 쿠냘 아리트리데스 드 수사 멘데스 아폰수 1세 루이스 드 카몽이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주앙 2세 인판트 동 엔히크 페르난두 페소아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 바스쿠 다 가마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살게이우 마이아 마리우 소아르스 파도바의 안토니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에우제비우
16위17위18위19위20위
프란시스쿠 사 카르네이루 조르제 누누 핀투 다 코스타 누누 알바르스 페레이라 주앙 페레이라 드 알메이다 주제 무리뉴
21위22위23위24위25위
아고스티뉴 다 시우바 에사 드 케이로스 에가스 모니스 디니스 1세 페르난두 노브레
26위27위28위29위30위
주제 에르마누 사라이바 아니발 카바쿠 실바 움베르투 델가도 조제 아폰수 루이스 피구
31위32위33위34위35위
마르셀루 카에타누 페드루 누네스 안토니우 비에이라 플로르벨라 이스팡카 페르디난드 마젤란
36위37위38위39위40위
마리아 지 루르드 핀타실구 주앙 1세 소피아 드 멜로 브레이네르 안드레센 안토니아 페레이라 파더 아메리쿠
41위42위43위44위45위
안토니우 다마지우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마누엘 1세 주제 사라마구 아라곤의 이사벨
46위47위48위49위50위
카타리나 에우페미아 카를루스 파레지스 주제 소크라트스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 루이 드 카발로
51위52위53위54위55위
브리테스 지 알메이다 알베르투 주앙 자르딩 알마다 네그레이루스 바스쿠 곤살베스 알바루 시자 비에이라
56위57위58위59위60위
벨미로 데 아제비로 수사 마르틴스 마리아 두 카르모 세아브라 안토니우 안드라지 카를루스 1세
61위62위63위64위65위
마리자 비제우의 엘레노르 호자 모타 안토니우 테이셰이라 레벨루 아폰수 3세
66위67위68위69위70위
비토르 바이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허만 호세
71위72위73위74위75위
마리아 2세 카를루스 로페스 아폰수 코스타 폰테스 페레이라 드 멜루 가구 코티뉴
76위77위78위79위80위
히카르두 아라우주 페레이라 마누엘 소브리뉴 시몽이스 마누에우 마리아 바르보자 드 보카주 헬리오 페스타나 조르주 삼파이우
81위82위83위84위85위
안토니우 샹팔리모 안토니우 로부 안투느스 질 비센트 마리아 헬레나 비에이라 다 실바 미겔 토르가
86위87위88위89위90위
나탈리아 코레이아 에드가 카르도주 페르낭 멘데스 핀투 루시아 수녀 알프레도 다 실바
91위92위93위94위95위
요한 21세 다미앙 드 고이스 주앙 4세 조아킹 아고스티뉴 아델라이드 카베치
96위97위98위99위100위
알메이다 가헤트 안토니우 젠틸 마르틴스 안토니우 바리아슈에스 파울라 레고 마리아 조앙 피레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파일:1000007840.jpg
Pedro Álvares Cabral
(1467 또는 1468 ~ 1520)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포르투갈의 군인, 탐험가.

2. 생애

포르투갈의 귀족 출신으로 페르낭 카브랄과 이사벨 데 고베이아 사이에서 태어나 1497년에는 수당 지급, 국왕의 고문, 그리스도 기사단 의복 착용 등의 다양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바스코 다 가마의 뒤를 이어 32세에 제2차 인도 탐험대 선단의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3척의 함선을 이끌고 1500년 3월 9일에 항해를 떠나 인도의 희망봉을 향해 항해했다.

그러나 항해 도중에 풍랑을 만나 남서쪽으로 표류하다가 4월 22일에 브라질에 도착하여 지금의 바이아 주의 포르투 세구루 해안에 해당하는 곳에서 그 곳의 언덕을 몽치 파스코아우(Monte Pascoal, 부활절 언덕)이라 명명하고 포르투갈의 문장이 그려진 나무 십자가를 해변에 세워 일리아 지 베라크루스(Ilha de Vera Cruz, 진정한 십자가의 섬)라 명명하고 포르투갈의 영토임을 선언하며 이 해안을 탐사했다.

그러다가 카브랄이 실수한 것이 뒤를 이어 브라질에 온 탐험가들이 알게 되어 테하 지 베라크루스(진정한 십자가의 땅)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5월 2일에는 동쪽으로 출발해 희망봉을 돌다가 5월 29일에 배 4척이 침몰했다.[1] 9월 13일에 캘리컷에 도착해 통치자 자모린으로부터 교역소를 짓도록 허락받았지만 포르투갈 인과 이슬람 상인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포르투갈 수비대의 대부분이 전사하자 캘리컷 시를 포격하면서 이슬람 선박 10척을 나포해 그 승무원들을 모두 처형했다.

코친으로 가서 정중한 대접을 받다가 비단, 고급 목재, 향로, 향신로 등 뿐만 아니라 많은 보물 등을 6척의 배에 실었으며, 카랑골로스, 카나노르 등에도 입항해 화물을 실어 1501년 1월 16일에 포르투갈로 출발했다. 그러나 도중에 2척의 배가 침몰해 배 4척만 남은 상태로 6월 23일에 포르투갈의 테주강 어귀를 통해 귀환했다.

3. 여담

브라질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전에도 브라질에 도달한 사람이 많은데, 1500년 이전에 독일의 항해사인 마르틴 베아임이 탐험했다. 또한 스페인의 항해사로는 알론소 데 오헤다, 비센테 아녜스 핀손, 디에고 데 레페, 알론소 데 멘도사, 포르투갈의 항해사로는 두아르트 파셰쿠 페레이라가 1498년에 탐험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가 최초로 브라질을 탐험한 인물로 알려진 것은 브라질을 탐험한 사람 중에서 왕실에 공식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며, 이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각각 자신들이 발견한 영토에 대해 확정하는 조약인 토르데시야스 조약 이후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영토임을 확정짓기 위해 보내진 것이다.


[1]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이 때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