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팽기(서진) 문서 참고하십시오.
彭錡
생몰년도 미상
[clearfix]
1. 개요
중국 삼국시대의 도적.2. 행적
225년 12월에 양주 파양군에서 도적으로 있던 팽기는 자칭 장군이라 칭하고 위나라를 위해 오를 토벌하겠다고 선전하며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오나라의 군현을 함락시켰으며, 이에 손권은 주방을 파양태수로 임명해 이릉대전 때 새로 모은 해번이라는 이름의 부대를 이끈 해번독 호종과 협력해 이들을 토벌하게 한다.한편 위나라에서는 이런 엄청난 소식이 들리니 이를 이용해 오나라를 정벌해야 된다고 한다. 이에 조예가 손자에게 물어보니 손자는
파양에 사는 종족들은 앞뒤로 자주 의병을 일으켰지만 그 무리들은 약하고 지모도 얕아 되돌아서 번번히 흩어졌습니다. 옛날 선황께서는 일찍이 비밀리에 도적들의 형세를 논평하고 동포에서 만 명을 죽이고 배 천여 척을 획득했는데, 수일 사이에 배를 부리는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강릉이 포위되어 한 달이 지났으나 손권이 1천 몇 백명을 가지고 동쪽 문을 지키니[1] 그들의 땅이 붕괴하거나 흩어지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법률이 엄하고 상하 사람들이 서로 유대를 갖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팽기가 아직 손권의 뱃속에 들어 있는 커다란 질병이 될 수는 없을지 걱정됩니다.
라고 하니 과연 손자의 말처럼 227년 1월에 팽기는 주방에게 사로잡혀 무창으로 보내지게 되고 주방은 소의교위의 직책을 더하게 된다.3. 기타
팽기가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었다는 기록은 오나라가 움직이는 군사의 숫자와 비슷할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숫자인데, 오주전에는 바로 뒤의 내용이 이 해에 지진이 연달아 발생했다는 내용이다. 지진으로 인해 난민이 발생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일단 《자치통감》에도 팽기가 반란을 일으키고 붙잡혔다는 기록과 손자와 조예의 문답이 있을 뿐 별다른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난 이유는 영 알 수 없다.<오주전>에 의하면, 팽기의 반란이 있은지 11년 뒤인 236년 10월에 팽단이 같은 지역에서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팽단은 팽기의 친족일 가능성이 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