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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7 11:41:35

팀 던컨/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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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BA 데뷔 이전2. 샌안토니오 스퍼스3. 은퇴 후4. 국가대표5. 코치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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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BA 데뷔 이전

어린 시절의 던컨은 원래 버진 아일랜드의 국가대표급 수영선수였다. 그러나 14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데다 미국령 버진아일랜드를 강타한 허리케인 휴고[1]로 집을 잃고 더불어 버진 아일랜드의 유일한 국제규격 수영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괴로움에 수영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던컨의 매형은 슬퍼하는 던컨에게 괴로움을 잊게 하고자 농구를 배우게 했고 던컨 역시 이에 흥미를 느끼고 농구를 시작했다.[2] 그리고 우연히 알론조 모닝이 그의 친구들과 버진 아일랜드로 놀러와 농구를 한 적이 있는데 던컨과 농구를 했고 마침 그 때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코칭스탭이 그를 보고 장학금과 입학을 제의했고 던컨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ACC 컨퍼런스의 중하위권 학교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시절엔 데이브 오돔[3] 감독의 가르침을 받았다. 대학교 2학년 시절부터 이미 두각을 나타내 농구부를 전국대회 단골 포지션으로 유지시켰다. 3학년 때에는 토니 러틀랜드[4] 등과 함께 뛰며 UMASS마커스 캠비와 함께 NCAA 최고의 인사이더로 인정받고 있었다. 당시 3학년이던 캠비는 1996년 드래프트에 얼리엔트리하여 토론토에 2번픽으로 지명받지만, 던컨은 대학을 마치기 위해 1년 더 남길 선택한다.[5]

대학생 신분으로 드림팀3와 대학선발과의 연습경기에 참여한 던컨은 실질적인 대학대표팀의 원맨 리더로서, 곧 리그에서 라이벌이 될 드림팀3의 센터 3인방(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샤킬 오닐) 모두와 맞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 제아무리 연습경기라지만 던컨은 그 셋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거의 대등한 수준의 경기를 펼치는 파란을 선보였다. 물론 이미 탈 NCAA급 선수로 인정받고 NBA에서도 통할거란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NBA는 아직이 아닐까라고 평가하던 전문가들의 의견도 이 경기를 통해 확 바뀐다.

결국 1997 드래프트는 그야말로 명실공히 팀 던컨 드래프트라 할 정도로 그의 1순위 지명은 '사람은 먹어야 산다' 수준으로 당연시될 정도로 던컨은 불세출의 초특급 유망주로 평가받게 되었다. 특히 리빌딩이 절실했던 보스턴 셀틱스는 공공연하게 팀 던컨을 노리고 있음을 드러내며 탱킹을 통해 동부 컨퍼런스 꼴찌를 획득했고, 트레이드를 통해 댈러스 매버릭스의 지명권도 얻어와 1픽을 뽑을 확률을 무려 35% 수준으로 확보해놓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다. 확률이 확률이었던지라 당시 많은 언론이 던컨의 셀틱스행에 초점을 맞췄고, 던컨 본인 또한 셀틱스의 일원이 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2. 샌안토니오 스퍼스

그러나 그 시즌의 1픽은 뜬금포로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가져갔다. 전 시즌 데이비드 로빈슨이 6경기 만에 무릎 부상으로 시즌아웃되어 20승 62패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한 덕분에 드래프트에서 세 번째로 높은 확률을 갖고 있었는데, 1픽을 획득하여 던컨을 지명하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이는 비단 샌안토니오만의 호사가 아니라 던컨에게도 역시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된다. 1픽으로 뽑힌 선수들은 루징 프랜차이즈에서 고군분투하면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팀 던컨은 처음부터 60승도 가능한 강팀에 드래프트 됨으로써 그야말로 준비된 로얄로드를 걷게 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오매불망 던컨을 노려왔던 셀틱스는 두 장의 로터리가 각각 3픽과 6픽에 걸리며 졸지에 닭 쫒던 개 신세가 되어버렸고[6] 이 와중에 전 시즌 전체 승률 꼴찌였던 밴쿠버는 3픽 안에도 못들고 4픽이 되어버리는 피박을 쓰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던컨의 스퍼스 행은 본인에게나 팀에게나 서로 최상의 결과를 낳았다.

루키시즌 82경기 전 경기를 선발 출전해 평균 21.1득점 11.9리바운드 2.5 블록을 기록하며 신인으로서 이례적으로 ALL NBA 퍼스트팀과 디펜시브 세컨드팀에 동시에 입성하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했다. 신인상 수상은 그야말로 덤. 당시만 해도 4대 센터를 비롯해 평균 20-10급 스탯의 빅맨들이 우글거리던 시절이다보니 던컨의 저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건지 감이 안 올수도 있는데, 신인이 데뷔 첫 해 퍼스트팀에 들어가는 케이스는 대부분이 NBA 초창기에 몰려있고 그 이후로는 오로지 래리 버드와 팀 던컨 둘 밖에 없으며 그 버드도 신인 첫 해에는 디펜시브팀에 선정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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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입단 2년차만인 1999년, 트윈 타워의 명성을 알리며 우승과 동시에 파이널 MVP를 수상한다. 사실 로빈슨과의 데뷔는 던컨에게 있어 다양한 면에서 매우 행운이었는데, 물론 가장 큰 행운은 역시 수준급 강팀이자 NBA 최상급 스타 플레이어가 조력자를 자처해주는[7] 팀에 데뷔할 수 있었다는 점.

3년차인 2000년에는 시즌 말미에 무릎부상을 당해 플레이오프때 뛰지 못했고 팀도 1라운드에서 피닉스 선즈에 패해 일찌감치 탈락했다. 이 때 우승 2연패를 달성하기 위해서 던컨이 다소 무리해서라도 컴백을 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포포비치 감독은 그런거 그냥 무시하고 던컨을 푹 쉬게 했다.[8] 3년차를 마치고 첫 번째 FA 자격을 획득한 던컨은 이적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올랜도 매직이 최고 대우와 더불어 팀 던컨-그랜트 힐 듀오 결성이라는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바람에 실제로 던컨은 올랜도와 계약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당시 스퍼스는 주전들이 대부분 노쇠했지만, 올랜도는 향후 5년간 8개의 1라운드 신인 지명권을 갖고 있을 정도로 전도유망한 상황이었다. 던컨 아니라 그 누구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막판 스퍼스 팀 관계자들과, 데이비드 로빈슨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바꿔 스퍼스와 재계약하며 잔류했다.[9]

올랜도 행이 무산된 것에 재미있는 점 하나는 팀 던컨의 전 부인 에이미 던컨의 역할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던컨과 에이미는 오랜기간 교제 중이었는데 종종 팀 던컨의 경기를 보기 위해 스퍼스 팀 비행기에 팀 던컨과 동행하는 일이 있었다. 던컨이 올랜도에서 큰 환영을 받고 구애를 받던 중 에이미는 그 당시 올랜도의 감독이었던 닥 리버스에게 자신이 종종 올랜도 팀 비행기에 팀 던컨과 함께 동행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대부분의 팀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별 생각없이 거절했다. 그러나 에이미는 그 대답에 별로 마음이 들지 않았고, 닥 감독의 부인와 대화 후 에이미는 마음을 굳힌 듯 샌안토니오로 돌아가게 되며 던컨도 그녀를 따라 샌 안토니오로 귀향하고, 던컨이 돌아오자 샌 안토니오는 결국 던컨을 잔류시키는데 성공하게 된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이렇게 된다더라 물론 그 이후 던컨은 에이미와 결혼은 했지만 결국 이혼으로 치닫게 되는 결과가 있던 걸 보면 올랜도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할 듯. 닥 리버스가 웬수였다[10] 다만 닥 리버스는 이 일화에 대해 부정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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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든 로빈슨에게 에이스 자리를 물려받은 던컨은 리그 최고급 빅맨으로 성장했지만 2001년과 2002년에는 샤킬 오닐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게 가로막혔다. 그러나 2002-03 시즌, 전시즌에 이어 두번째 정규시즌 MVP를 수상한 던컨은 피닉스, 레이커스, 댈러스를 차례로 꺾으며 파이널에서 뉴저지 네츠를 이기면서 두번째 파이널 MVP까지 차지함과 동시에 데이비드 로빈슨에게 은퇴선물로 우승반지를 선사한다. 2003년 플레이오프 당시 스퍼스의 평균 출장시간,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블록 슛 1위가 모두 던컨이었을 정도로 완벽한 더 맨 우승이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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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부터 팀의 리더가 된 던컨은 당시까지는 인지도 낮은 외국인 선수였던 마누 지노빌리토니 파커, 악랄한 수비수 브루스 보웬, 클러치때만 빛나는 파워 포워드 로버트 오리 등을 이끌게 된다. 2004년 레이커스와의 세미파이널때 5차전에서 0.4초를 남기고 득점에 성공했으나 데릭 피셔에게 통한의 어부샷을 맞고 패배했다. 2004-05 시즌에 다시 파이널에 가서 디펜딩 챔피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대결하는데, 극악의 수비대결 끝에 다시 파이널 MVP를 수상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방송국과 NBA총재(디트로이트, 샌안토니오를 제외한 전 북미 시청자 포함)는 극수비팀끼리의 파이널경기로 시청률 저하를 우려했고 실제로 역대 최저급의 파이널 시청률을 기록했다.[12]

당시 리그는 빈스 카터,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등의 스윙맨이 인기를 끌고 있었으나, 그러든 말든 데뷔때부터 2005년까지 쭉 All-NBA 퍼스트팀 자리를 차지하며 자기 할 일만 했고 샌안토니오를 서부 끝판왕 자리에 올려놓았다. 노화가 시작되어 에이스 자리를 토니 파커에게 물려준 후에도 기본기가 워낙 충실해서 몰락하는 일 없이 꾸준히 자기 몫을 해주었다.

2006-07 시즌엔 패기만만한 르브론 제임스가 이끌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만나 4-0 완승을 이끌며 개인통산 네번째 우승을 달성한다. NBA 역사상 가장 원사이드였던 이 시리즈에서 던컨의 스탯은 18.3득점 11.5리바운드 2.3블록. 18득점에 0.446의 낮은 야투율에서 알 수 있듯이 공격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돌격대장 포인트 가드 토니 파커가 0.568이라는 굉장한 야투율로 평균 25득점을 몰아넣으며 클리블랜드의 수비를 붕괴시키며 우승하게 되었고 이 공로로 토니 파커는 07년 파이널MVP를 수상하게 되었다. 한편 망연자실한 르브론에게 던컨은 앞으로 이 리그는 너의 것이 될 것이다.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물론 내가 은퇴한 뒤에[13]

2010-11 시즌에 와서는 간만에 국대 차출을 피한 지노빌리와 이혼남 파커의 다이나믹 듀오의 난동, 신불사 맷 보너, 이제 어느 정도 적응한 제퍼슨, 무섭게 성장하는 조지 힐 등 팀원들의 컨디션이 너무 좋은 관계로 자기의 롤이 줄어들면서 출전시간도 줄어들고 스탯도 엄청 떨어졌다.[14] 근데 이 양반은 자기 스탯이랑 출장시간에 전혀 관심이 없다. 스퍼스 팬들은 '이제 갈 때가 됐구나' 하면서 없는 사람 20득점 10리바운드도 못하는 주제에 0.9조던이나 처먹는 욕심쟁이 취급하는 반면에, 다른 팀 팬들은 속는 것도 한 두번이지 또 플옵가면 돌변할 거란 걸 알기 때문에 절대 믿지 않는다.

물론 최근 몇 년 동안 플옵에서 종종 방전이 되면서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NBA의 수많은 센터들이 일류, 초일류 할 것 없이 30대 중반 나이에 급노화되어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것에 비하면 던컨은 굉장히 잘 버티는 축에 속하나, 팀이 스퍼스이고 여전히 팀의 중심이다보니 방전으로 인한 플옵 뒷심 부족의 책임은 어쩔수 없이 지게 되었다. 플옵은 DNP-OLD 못한다 특히 2011-12 시즌 플옵에서는 유타 재즈, LA 클리퍼스의 빅맨들을 상대로 속된 말로 관광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전성기 모습을 보여주나 싶었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인 오클라호마와의 경기에서는 단축시즌에 몸을 너무 빨리 끌어올린게 독이 되어서 방전이 되어버렸다.

2012-13 시즌에 들어와서는 체중 감량을 통해서 예전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으며, 몇 년동안 보여줬던 플레이 중에서 가장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다. 오랜만에 센터 포지션으로 퍼스트팀에 다시 들었고 플레이오프 통산 500블록을 기록하기도 했다.

팀은 승승장구하며 6년 만에 다시 NBA 파이널에 진출하며 마이애미 히트와 만났는데, 대니 그린이라는 새파란 후배가 반짝 활약해서 3승 2패가 된 이후 6차전에서 말년에 파이널 MVP 하나 더 먹겠다는 듯이 대활약하며 미친 존재감을 뿜었으나 지노빌리의 대역귀짓과 대체선수인 티아고 스플리터의 잉여스러움 때문에 플레이시간 조절이 실패해서 막판에 방전, 6차전을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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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던 7차전, 6차전에 이어서 매치업상대인 크리스 보시를 완전히 물먹이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4쿼터가 끝나기 직전 골밑 레이업과 팁인을 모두 실패하면서 그답지 않게 땅을 치면서 아쉬워했고, 우승컵은 마이애미에게 양보해야했다. 이것이 던컨 커리어 최초의 파이널 준우승.

2013-14 시즌, 던컨은 74경기에 출장해 평균 15.1득점 9.7리바운드 3.0어시스트 0.6스틸 1.9블락을 기록하며 소속팀을 정규시즌 서부 1위이자 리그 전체 1위로 견인했다. 토니파커, 카와이 레너드를 비롯한 다른 키 플레이어들이 잔부상으로 로스터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철저한 몸관리를 통해 팀의 플랜에서 한번도 이탈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던컨의 스퍼스는 노비츠키가 이끄는 8번시드 댈러스와 격돌했다. 카터, 노비츠키, 던컨, 지노빌리를 비롯한 포스트조던 시대의 영웅들이 노장이 되어 투혼을 보여주는 모습은 팬들에게 승패를 떠나 깊은 감동을 선사했고, 던컨 또한 1경기에서 27득점을 기록하며 기울어져가는 경기를 뒤집어서 이기는 등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댈러스의 릭 칼라일 감독이 들고나온 스위칭 디펜스 위주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스퍼스는 그런 댈러스를 상대로 7차전 대혈투 끝에 승리를 거두고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 진출했다. 댈러스의 구단주 마크 큐반은 시리즈가 끝난 뒤 팀 던컨이 어서 빨리 우승을 하고 커리어에 만족을 느낀 뒤 은퇴해버렸으면 좋겠다는 반농담성 인터뷰를 하며, 지난 17년간 서부의 지배자로 군림한 이 위대한 빅맨에게 우회적으로 존경심을 표했다.

이어진 세미파이널에서 벤치가 약한 포틀랜드를 상대로 낙승을 거둔 던컨의 스퍼스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2년 전 자신들에게 역스윕의 굴욕을 안겨준 듀란트와 웨스트브룩의 오클라호마를 상대했다. 오클라호마 최강의 샷블락커 이바카가 부상으로 결장한 첫 두경기에서 던컨은 오클라호마의 허약한 포스트를 박살내며 맹활약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부상에서 빠르게 회복된 이바카가 3경기부터 다시 선발출장을 시작하자, 던컨 또한 노쇠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며 원정 2경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리즈가 7차전까지 갈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감독 포포비치는 5차전을 앞두고 이바카에 막혀 잉여인간이 되어버린 티아고 스플리터를 선발에서 제외하고, 외곽슛이 좋은 맷 보너와 보리스 디아우를 활용하여 이바카를 밖으로 끌어내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것은 보리스 디아우의 다재다능함과 팀 던컨의 골밑파괴력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벼랑끝 전술이었는데, 팀 던컨은 보리스 디아우가 이바카를 밖으로 끌어내는 사이에 22득점 12리바운드를 찍으며 오클라호마 골밑을 파괴, 감독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그리고 이어진 6차전에서 엘리미네이션 위기에 몰린 오클라호마는 정규시즌 MVP 케빈 듀란트와 리그 최고의 돌파력을 가진 러셀 웨스트브룩, 그리고 레지 잭슨과 이바카를 앞세워 강력하게 저항해왔다. 던컨은 경기내내 이바카의 강력한 수비력 앞에서 고전했으나, 팀의 운명이 걸린 연장전에서 절묘한 풋웍과 슛터치로 1:1을 계속해서 성공시키며 소속팀 스퍼스를 2년 연속 NBA 파이널로 끌어올렸다. 마이애미와 스퍼스는 이렇게 2년 연속으로 NBA 파이널에서 격돌하게 되었으며, 같은 팀이 2년 연속으로 NBA 파이널에서 만나는 것은 97~98년 시카고 불스와 유타 재즈 간의 파이널 이후 처음이다. 아울러 던컨은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모두 파이널에 진출하게 되는 쾌거를 이뤘다.

그리고, 6월 6일(한국시간 기준) 마이애미 히트와의 파이널 1차전에서 21득점(FG 9/10 90%), 10리바운드라는 나이를 의심케 하는 활약을 펼치면서 스퍼스의 110-95 승리를 이끌었다. 거기에 파이널 4차전에서 매직 존슨의 플레이오프 더블 더블 횟수, 카림 압둘자바의 플레이타임 합계 기록을 모두 제치고 1위를 차지한다.

수많은 레전드들이 경기를 지켜본[15] 대망의 파이널 5차전. 1쿼터는 르브론이 맹활약하면서 마이애미가 유리하게 가는 듯 했으나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마이애미를 폭격하면서 우승을 결정지었다. 이로서 던컨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우승을 모두 차지한 위대한 선수가 되었다.

2013-14 시즌까지 통산 24,904득점 13,940리바운드 3,832어시스트 915스틸 2,791블락. 평균으로 환산시 19.9득점 11.1리바운드 3.1어시스트 0.7스틸 2.2블락. 2010-11 시즌부터는 2012-13 시즌의 30.1분을 제외하고 20분대 출전시간을 기록하고 있으며 커리어 20-10 기록이 깨졌다. 흔히 스탯으로 평가할수 없는 선수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카림 압둘자바, 윌트 체임벌린, 칼 말론[16]같은 대괴수들 때문에 가려서 그렇지 막상 보면 스탯이 나쁜 것도 아니다.[17][18]

그리고 다가온 2014-15 시즌 한국기준 12월 6일 멤피스 그리즐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완전체에 가까워진 마크 가솔과의 매치업에서 통산 4번째 트리플 더블을 했다!!! 14득점 10리바운드 10어시스트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2015년 11월 3일, 뉴욕 닉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통산 954승으로 한 팀에서 역대 개인 최다승을 거둔 NBA 선수가 되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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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스퍼스에서 통산 1001승을 거두며 그렉 포포비치-팀 던컨은 감독-선수 듀오로서는 NBA 역대 1위에 오른다.

2016년 현 시점에도 현역으로 계속 뛰고 있는데 드디어 그도 어쩔수 없이 늙는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3월 20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경기에서는 선수 생활 동안 딱 두번 해본 벤치에서 경기를 보여주는 모습을 보여줬고, 사실 거의 활약하지 못했기에 플옵에서 골든스테이트를 만날때도 벤치를 지키지 않을까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중. 20년간 이런식으로 뻥쳤지만 올해는 진짜가 될지도.... 실제 기량도 상당히 많이 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수비에서도 나이를 먹은탓에 발이 상당히 느려져서 힘겨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공격력 역시도 상당히 많이 떨어진 상황.

2016년 1월 2일 안방 경기에서 데뷔 이후 1360 경기 만에 처음으로 무득점을 기록했다.[20] #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고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와의 플레이오프 2라운드 4차전에서 12분을 뛰었지만 슛 한번 시도하지 못하면서 무득점을 기록하고 말았다. 그의 커리어에서 플레이오프 무득점 경기는 이것이 처음. 그저 세월이 무상할뿐이다.

결국 팀이 원정 엘리미네이션에 몰린 2라운드 6차전 경기에서, 전반전부터 오클라호마에게 압도당하는 상황에서도 19득점 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후반전의 추격을 이끌며 투혼을 불살랐지만 결국 팀은 전반전의 큰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며 시즌이 종료되고 말았다. 11점차로 따라온 상황에서 첫번째 포제션을 실패하고, 다시 포제션을 잡은 상태에서 경기 종료 3분 남기고 9점차로 만들기 위한 덩크를 시도했지만 서지 이바카의 블락에 막히고 바로 이어진 속공에서 케빈 듀란트가 덩크로 13점차로 만들자 씁쓸해하던 던컨의 모습은 많은 팬들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렉 포포비치 감독은 무언가를 암시하는지 그가 4쿼터를 풀타임으로 뛰도록했고, 카메라도 그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결국 경기 종료후 컨퍼런스 파이널로 올라간 오클라호마 선수들을 따뜻하게 격려해준 던컨은 격려를 마치고 관중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며 라커룸으로 들어갔다.[21]

16년 7월에 들어서 최근 은퇴를 진지하게 고민 중이며 곧 거취를 팀 관계자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라고 한다. 원래 왼쪽 무릎이 안좋았는데, 오른쪽 무릎 부상까지 겹쳐서 힘든 상황이라고. 은퇴 여부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댈러스 총기난사 사건으로 인해서 잠시 발표를 보류했다. 자신의 뉴스로 사건이 잊혀지는 것을 원치 않아서라고 그리고 한국시간 2016년 7월 11일 오후 11시쯤 결국 은퇴를 발표했다. 은퇴하는 모습까지 참 던컨답다. 치를 떨었을 선수들조차 축하해주면서 훈훈하게 은퇴하였는데 선수생활 큰 구설수 없이 팀을 우승후보에 올려놓은 아름다운 선수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NBA의 많은 선수들은 그의 은퇴식이 결정되자 새로운 인생에 대한 축하를 해주었는데 그중에는 지겹도록 싸웠던 코비, 노비츠키, 르브론 등 많은 선수들이 있다. 던컨이라면 치를 떨었을 법한 댈러스 구단주 마크 큐반도 "스퍼스와 매버릭스의 게임에서 던컨을 배웅해주지 못하는게 너무 화가 난다. 하지만 네가 플레이하는 것을 볼 수 있어 즐거웠어." 라면서 축하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스퍼스 팬페이지나 스포츠 기사들의 댓글들을 봐도 타팬들도 와서 고마웠다, 축하한다 등의 메세지들이 많은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리그에서 사랑받고 존중받았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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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Three [22]

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아직 별다른 행적으로 보이지 않으며 조용히 자신의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다. 던컨 답게 은퇴식 같은건 가지지 않았고 포포비치 감독과 RC 뷰포드 GM이 그에 대해 회상하는 인터뷰를 했다. 후에 던컨은 자신의 어렸을 적 친구이면서 온라인 라디오 방송을 운영중인 라쉬드 클래런스와 함께 인터뷰를 하였는데 영어를 잘한다면 들어볼만하다.

공교롭게도 은퇴한지 채 하루도 되지 않은시점에서 법적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부동산 기업중 하나가 팀 던컨에게 한번도 물어보지도 않고 그의 사진을 포샵해서 마치 팀 던컨이 광고하는 것처럼 사용했기 때문.

흥미롭게도 다음 시즌인 16-17 시즌에는 샌안토니오 스퍼스 코치로 재직되어서 나온다...는 말이 있었으나 정식 코치 자격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현재는 그저 시간이 나는대로 방문하여 젊은 선수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응원도 해주고 농담도(...) 즐기는 역할 정도라고 한다.[23] 여담으로 카와이는 그의 농담이 가장 그립다고 이야기 한적이 있다. 샌안 팬사이트중 하나인 "Pounding the Rock" 에서는 저러다가 시즌 중간쯤에 다시 돌아와서 우승하는거 아니냐고 드립을 치는 중(...). 영결식이 결정되면서 그럴일은 없게 생겼다.

돌아오는 12월 18일 뉴올리언스 펠리컨스와의 경기에서 그의 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정하는 영결식이 있을것이라 공표하였다. 이 영결식도 그답게(...) 경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경기가 끝난 후에나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가격이 쌌던 펠리컨스 경기 티켓이 갑자기 폭등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12월 18일에 영결식을 가졌는데 그렉 포포비치, 데이비드 로빈슨, 마누 지노빌리, 토니 파커를 비롯하여 션 엘리옷, R.C. 뷰포드, 그의 대학코치인 데이비드 오돔, 그리고 브루스 보웬 등이 참석했으며, 마누, 토니, 코치 오돔 그리고 포포비치는 각자 던컨과 같이 했던 순간, 던컨을 처음만났던 순간 등을 회상하며 짧은 연설을 하였다. 팀 던컨 역시 그에 회답하며 짧은 연설을 가지면서 30초 넘게 이야기하며 영결식을 마무리했다.

그 후에도 종종 스퍼스 연습실에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최근에 연습실에서 포착된건 휴스턴 로키츠에게 스퍼스가 굴욕적인 1차전 패배를 당한 이후. 이 경기에는 계약에 비교할때 라마커스 알드리지가 너무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연습실에서 던컨이 알드리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무슨 내용의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조언 및 격려를 해준듯 듯한 하다. 그 이후 알드리지는 2차전에는 조금 발전하고 3차전에 첫 폭박을 한뒤, 4-5차전에서도 3차전까지는 아니지만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6차전에 그간의 부진을 모두 씻어낸 듯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근 근황이 공개되었는데, 여러 취미를 즐기며 살고 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건 페인트볼이라고... 페인트볼을 할때 농구에서 보지 못한 빠른 스피드로 움직인다고 한다. 아니 농구할 때 그 스피드였다면 반지 3개는 더 있지 않았을까 그럼 몇개야?

최근에 마누 지노빌리의 영결식에 등장했는데 그만의 패션센스와(...) 던컨 답지 않은 입담을 뽐내며 자신과 함께 Big 3를 책임졌던 마누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훈훈한 모습을 연출했다.[24][25]

2020년 코비 브라이언트, 케빈 가넷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22년 마누 지노빌리, 그리고 2023년 토니 파커그렉 포포비치의 명예의 전당에도 소개자로 초대받았는데 이때 던컨을 적극적으로 놀려대는 파커의 입담이 볼만하다.[26]

4. 국가대표

1999년 올림픽 퀄리파잉에서 10경기동안 경기당 12.7득점, 9.1리바운드, 1.3어시스트, 2.4블록을 기록하며 팀이 10승 무패로 본선진출하는데 기여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본선에는 무릎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2003년 올림픽 퀄리파잉에서 9경기동안 경기당 15.1득점, 8.0리바운드, 3.4 어시스트, 1.6블록을 기록하며 팀이 10승 무패로 본선진출하는데 기여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8경기동안 경기당 12.9점, 9.1리바운드, 1.6 어시스트, 0.0블록을 기록하며 팀이 5승 3패로 동메달을 따는데 기여했다.[27]

아테네 올림픽에서 던컨은 첫번째 경기에서 7턴오버를 기록했고 던컨의 극성팬들이 주장하는 상대를 지워버리는 수비도 없었다. 알드리지 정도는 그냥 지워버릴거다 라는 극성팬의 의견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준 시리즈.

파일:external/a.espncdn.com/oly_mens_hi.jpg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진 않지만, 사실 던컨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스퍼스에서의 어마어마한 커리어에 비하면 금메달이 없다는 점에서 거의 흑역사급으로 부족한 편이다. 스퍼스 BIG 3의 다른 동료들인 마누 지노빌리토니 파커가 각 조국에서 엄청난 국가대표 커리어를 쌓은 걸 감안하면 더욱 흑역사 급이다.[28]역시 던컨의 카운터는 지노빌리가 맞다[29]

5. 코치로서

2019-20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어시스턴트 코치로 채용되었다. 이 전에 폽 감독이 농담으로 "지가 원하는대로 하는 코치"[30] 라고 한게 실제가 된 셈. 포포비치 감독이 던컨을 고용하면서 내가 19년 동안이나 던컨을 충실하게 도와줬으니, 이제 그 빚을 갚을때가 된거지 라고 정식으로 고용했다.

2020년 3월 3일 폽 감독이 개인사정으로 자리를 비우며 임시 감독으로 샬럿과의 원정경기를 지휘했는데, 팀이 104-103으로 신승을 거두며 승률 100% 감독이 되었다. 우습게도 감독 대행을 해야한단 사실을 경기 당일 아침에 알려줬다고...이 영감탱이가 진짜... 경기 후 인터뷰에선 자기는 소리만 질렀지 콜[31]은 옆의 코치들이 다 해줬다, 폽이 돌아오면 기쁘게 반납하고 싶다고 밝혔다.

다만 올랜도 버블에는 참가하지 못했고 라마커스 알드리지의 재활을 도왔다.

하지만 2020-21 시즌 전에 다시 놀고 싶었는지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하지만 여전히 비공식 코치로서 팀 연습장에 드나들듯하다.[32]


[1] 1989년 9월.[2] 농담같지만 연습할 수영장이 없어져서 바다에서 수영을 했어야 되는데 상어가 무서워 수영을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사실 정설로 받아들여진다.[3] 1941년 10월 9일 노스캐롤라이나 주 골즈보로 출생. 1965년 길포드 대학교 졸업 후 고향 골즈보로 고등학교 코치를 시초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1976년부터 3년 동안 웨이크 포레스트대 코치로서 칼 테이시 감독을 보좌하다 1979년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교 감독으로 데뷔했고, 1983년 버지니아 대학교 코치로 옮겨 6년 동안 테리 홀랜드 감독을 보좌했다. 1989년부터 12년 동안 웨이크 포레스트대 감독으로 재직하며 던컨과 토니 러틀랜드 외에 로드니 로저스, 랜돌프 칠드리스, 로렌 우즈 등을 발굴/육성시켰다. 2001년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컬럼비아 캠퍼스로 옮겨 임기 7년 동안 2004년 NCAA 전국대회 진출, 2005 및 2006년 NIT 2연패를 각각 일궈내며 마이크 보인턴(현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감독), 타렌스 킨제이, 레날도 벌크만, 리카르도 포웰 등을 육성했다. 아들로는 라이언 오돔(1974년생, 현 유타 주립대학교 감독)이 있는데, 그는 메릴랜드 대학교 볼티모어 카운티 캠퍼스(UMBC)를 지휘할 적인 2017-18 시즌에 NCAA 전국대회 32강까지 가게 하는 기적을 선보였다.[4] 1998-99 시즌 당시 KBL 팀 청주 SK 나이츠의 외국인 선수로 뛰었다.[5] 던컨이 굳이 4년을 끝까지 마친 이유는 바로 그의 어머니가 임종 당시에 던컨에게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던컨의 어머니는 꼭 그가 대학을 마치기를 바랬고, 이에 던컨은 2, 3학년때에도 충분히 상위픽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4년을 채워 대학을 마치며 어머니의 유언을 지켰다.[6] 3픽과 6픽으로 각각 뽑은 선수들이 천시 빌럽스와 론 머서였다. 빌럽스의 위상을 생각하면 던컨급은 아녀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픽이 아닐까 여길 수 있으나, 문제는 빌럽스의 셀틱스 시절은 흑역사였다는 점. 루키 시즌 간신히 두 자릿수 평균득점을 넘기지만 야투율은 4할도 안될만큼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던 와중에 릭 피티노 감독에게 항명한 사태까지 벌어져, 셀틱스에선 단 한시즌도 채우지 못하고 쫒겨나듯이 토론토 랩터스로 트레이되었다. 그나마 론 머서는 루키 퍼스트팀에 들만큼 나름 활약해줬으나 성장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는 평을 받았고, 2년차를 마치고 연장 계약 협상에서 이견이 발생해 결국 보스턴에서는 2시즌밖에 뛰지 않고 덴버 너기츠로 트레이드되었다. 한 마디로 보스턴이 팀 던컨을 놓친 댓가로 얻은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물론 다행히도 그 다음 드래프트에서는 기나긴 암흑기를 끝내줄 프랜차이즈 스타, 폴 피어스를 10번픽으로 뽑긴 하지만.[7] 데이비드 로빈슨은 던컨 데뷔와 더불어 부상 이후 보조자 역할에 그쳤지만, 당장 부상 직전인 96년까지만 해도 득점랭킹 5위, 리바운드 2위에 MVP셰어와 윈셰어에서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초특급 스타 플레이어였다. 이런 클래스 있는 빅맨이 보조자 역할을 거리낌없이 맡아주니 루키에게 부담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98년도부터 조력자를 한 것도 본인이 자처해서 한 것이지 실력이 떨어져서가 절대 아닌데 또다른 20-10플레이어인 던컨과 함께 하면서도 21.6점 10.6리바운드 2.6블록을 기록하고 올-NBA 세컨드팀에 올랐다. 퍼스트팀은 샤킬 오닐인데 로빈슨은 자리가 하나뿐인 센터 퍼스트팀이란 걸 생각하면...[8] 이로 인해 선수 생명이 길어졌으니 던컨은 포포비치 감독에게 평생 고마워했다한다. 그래서 지금도 포포비치 감독 말이라면 한번도 대들지 않고 듣는다.[9] 심지어 당시 데이비드 로빈슨은 휴가를 즐기고 있었는데 얼마나 급했는지 휴가까지 중단하며 와서 던컨을 간곡히 설득했다.[10] http://www.orlandosentinel.com/sports/open-mike/os-tim-duncan-spurs-orlando-magic-wife-20160712-story.html[11] 파이널 6차전에서 던컨은 21득점 20리바운드 10어시스트 8블록 슛으로 쿼드러플 더블에서 블록 슛이 2개가 모자른 트리플 더블을 달성할 정도로 뉴저지를 혼자서 초토화시켰다. 블록만 2개 더 성공시켰다면 최초로 한 팀에서 쿼드러플 더블을 달성한 선수를 2명이나 배출할 뻔[12] 다만 2005 파이널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이라 당시 실제로 경기를 본 사람들은 생각 외로 명승부였다는 평가가 많았으며 2020년대 현재에는 파이널 중에서 명승부 중 하나라는 긍정적인 재평가가 많아졌다.[13] http://ftw.usatoday.com/2014/06/tim-duncan-lebron-james-nba-finals 본문 참조.[14] 현재 스퍼스의 공격은 전성기 새크라멘토의 모션오펜스에 버금갈 정도로 강한 공격력을 자랑한다.[15] 션 엘리엇, 에이버리 존슨, 조지 거빈, 데이비드 로빈슨.[16] 이 양반은 19시즌 동안 커리어스탯이 25득점 10리바운드다.[17] 기량에 비해 스탯이 좋게 나온다는 논란이 있었던 라이벌 케빈 가넷은 보스턴 셀틱스 이적 후 득점이 급전직하하면서 20-10이 던컨보다 더 빨리 깨졌다. 물론 가넷이 기량에 비해 스탯이 잘 나온다는 건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말도 안되는 오해고, 가넷이 고졸이라 어려서 형편없을 때 스탯까지 반영된다는 것도 고려해야한다. 나이먹고도 출장시간이나 득점-리바운드에 큰 변화가 없는 선수는 디르크 노비츠키 정도.[18] 그러나 가넷과 던컨 모두 스탯관련된 건 오해에 가깝다. 막상 둘이 MVP를 차지할 때 성적을 보면 던컨은 25.5점 12.7점 3.7어시스트 2.5블럭 0.7스틸 필드골 성공률 50.8%였고 가넷은 24.2점 13.9리바운드 5어시스트 2.2블럭 1.5스틸 필드골 성공률 49.9%였다. 즉, 둘다 잘 나왔다. 가넷이 리바운드는 앞서지만 득점은 던컨이 앞서고, 수비력은 둘이 막상막하였다는 걸 생각하면 둘 다 전성기 때 위력만큼 스탯이 잘 나온 것이라고 봐야할 듯. 가넷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가넷의 가장 큰 위력은 스탯에 드러나지 않는 수비력에서 드러난 만큼 "기량에 비해 스탯이 좋게 나온다"는 건 까놓고 말해 농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다. 04시즌 가넷은, 라이벌 던컨이 MVP 1위표를 하나도 못 받을 정도로 압도적인 활약을 했다. 그리고 던컨이 스탯이 기량에 비해 나쁘다고 하는 건 포포비치가 관리해주면서 출장시간 관리받던 시절 얘기지, 위에 언급된 02시즌, 경기당 40분씩 뛰던 시절을 놓고 보면 스탯도 좋았다. 즉, 던컨과 가넷 둘 다 전성기 때 막상막하의 실력으로 좋은 스탯을 기록했고, 수비력 면에서 둘의 지배력이 스탯에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19] 기존 기록은 은퇴한 유타 재즈존 스탁턴.[20] 데뷔 이후 1359경기 연속 득점은 NBA 역대 최장 기록이다.[21] 코비와 같은 화려한 은퇴식은 바라지 않는다고 발언한 적도 있고,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타입의 선수인 던컨이기에 이대로 조용히 은퇴를 할 수도 있다는 예측이 국내외에 많은 편이다. 실제로 경기 종료 후 한 기자가 은퇴여부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다. 던컨은 집에 가서 결정하겠다라며 확답은 피했다.[22] 플레이오프 통산 126승을 거두며 NBA 역대 1위에 올라있는 지노빌리-던컨-파커 트리오[23] 가장 최근에는 파우 가솔과 연습하는 것이 목격되었다.[24] 사실 던컨은 겉으로 보면 재미없음(...)의 대명사지만 친하게 지내면 굉장히 재미있다고 스퍼스 선수들에 의해 여러번 밝혀진바 있다.[25] 케빈 가넷이 은퇴 후인 2020년에 트래시 토크에 관련해서 트래시 토크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면서 본인을 가장 빡치게 한 트래시 토커는 티미였다고 하면서 문장이 아닌 감탄사와 단어로도 본인의 멘탈을 흔들었다고 밝혔다. 즉 애초에 입담이 없는 선수였다면 이런 수준급의 트래시 토크를 할 수가 없다.[26] 이를테면 던컨이 자신의 루키 시절에 자신에게 한마디도 안했다고...[27] 이는 NBA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국대에 나간 이후 최악의 성적이다. 프로 선수가 올림픽에 나간 이후 미국은 늘 전승 우승을 했다.[28] 일단 지노빌리야 알다시피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드림팀4강에서 박살냈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르헨티나 농구 국가대표팀에게 조국 사상 첫 올림픽 농구 금메달을 안겨준다. 그 외에도 다음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2연속 4강 진출에 동메달을 안겨주고,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2002년에 열렸던 대회에서 조국에 준우승을 안겨주었다. 그 외에 아메리컵에서도 1999년 3위, 2001년 우승 및 대회 MVP, 2003년 준우승, 2011년 우승을 기록하기까지 할 정도로 지노빌리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정말 역대 모든 남미 선수들 가운데서도 가장 화려하다고 볼 수 있다. 파커도 유럽 국가 대항전인 유로바스켓에서는 프랑스 농구 국가대표팀에게 2005년 3위를 시작으로 2011년 준우승 및 대회 득점왕, 그리고 2013년 우승 및 대회 MVP, 득점왕 동시 수상, 2015년 3위를 기록할 정도로 화려한 국가대표 경력을 쌓았다.[29] 같이 서 있는 라마 오돔, 리차드 제퍼슨, 당시 데뷔 2시즌 마친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는 젊고 유능한 선수들 이였지만 드림팀 멤버가 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부분들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2004년 대표팀은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진 팀이였기에 시작 전 부터 우려가 많았다. 여담으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아르헨티나는 전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인 축구와 농구에서 금메달을 동시에 획득했다. 카를로스 테베즈마누 지노빌리의 위엄...[30] The coach of whatever he wants[31] 이 날 던컨은 17점자 열세에 빠지던 1쿼터에 폽이 자주하던 빠른 작전타임을 거는 모습을 보였다. 역시 수제자.[32] 스퍼스 팬들은 공식 스퍼츠 팬 커뮤니티인 Pounding the Rock에서 이제 마누 지노빌리와 바톤 터치 하는게 아닌가 하고 궁금해한다. 그리고 마누는 정말로 스퍼스의 특별자문위원으로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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