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아시아 · 유럽 · 아프리카 | |||||
대한민국 | 일본 | 레바논 | 러시아 | 프랑스 | ||
이탈리아 | 튀르키예 | 몰타 | 알제리 | 리비아 | ||
아메리카 | ||||||
미국 | ||||||
다자관계 | ||||||
모로코·알제리·튀니지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아시아 · 아프리카 | ||||||
대한민국 |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 | 시리아 | 이란 | |||
사우디아라비아 | 이집트 | 튀니지 | |||||
유럽 · 아메리카 | |||||||
프랑스 | 튀르키예 | 키프로스 | 브라질 | 미국 |
튀니지 | 레바논 |
[clearfix]
1. 개요
튀니지와 레바논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양국은 아랍 연맹, 이슬람 협력기구, 프랑코포니의 회원국들이다.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오늘날 레바논에서는 자국 역사의 직계 기원으로 고대 페니키아를 꼽고 있으며, 튀니지는 고대 카르타고를 자국 역사의 직계 기원으로 두고 있다. 오늘날 레바논에서 이스라엘 북부 해안 지역에 거주하던 고대 페니키아인들은 오늘날 튀니지 동부에 우티카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한 이후 다시 서진하여 카르타고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하는데, 이 카르타고는 도시 국가를 넘어 시케리아 섬과 이베리아 반도 해안지대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가 되었다.본래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본토의 티레에 조공을 바칠 의무가 있었으나, 티레 공방전의 결과 티레가 멸망한 이후 시돈에게 상납금을 바쳤으며 이후 시돈이 몰락하자, 카르타고가 페니키아 도시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게 되어 외려 카르타고가 우티카 같은 먼저 건설된 식민도시들은 물론 심지어 페니키아 본토의 여타 페니키아 도시들로부터 상납금을 받게되었다.[1] 페니키아의 도시들은 주변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강대국들의 공격에 휘둘렸던 것과 반대로, 카르타고의 경우는 북아프리카 본토에서 카르타고를 위협할 만한 세력이 부재했고, 오히려 레바논 본토보다 더 비옥하고 광활한 토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 국가의 형태를 너머 영토 국가로 급격히 발전할 수 있었다.
고대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의 식민지에서 출발한 국가이다보니, 페니키아어 그리고 페니키아 문자를 사용하였다. 한 편으로 카르타고인들이 믿던 신 역시 페니키아인들이 믿던 바알이었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페니키아 본토에서는 이슈타르 숭배와 연계된 바알 신앙이 우세했던 반면[2] 카르타고에서는 바알의 부인이자 그림자, 달의 여신으로 여겨진 타니트를 숭배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카르타고에서는 바알 숭배보다 타니트에 대한 숭배가 오히려 더 유행하였지만, 타니트는 페니키아 본토에서는 숭배되지 않던 신이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페니키아 본토의 여러 도시들은 현지 부족장 유력자들에 의해 운영되던 소왕국 형태의 정치체제가 우세했던 반면,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에 비해 고대 그리스인들과 일찍이 교류가 활발했던 이유에다,[3] 식민도시로 시작했다는 이유 등으로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그것과 유사한 공화정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4]
페니키아 도시들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그리고 뒤이은 헬레니즘 제국의 영토로 편입된 이후에도 독립과 번영을 구가하던 고대 카르타고는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으로 멸망하였다. 로마 공화정이 포에니 전쟁을 통해 북아프리카를 정복하고 이후 지중해 전역을 정복하면서 양지역은 고대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고대 로마의 속주가 된 이후 양 지역의 문화적 분리는 가속화되는데, 카르타고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지역은 우티카 등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던 페니키아어와 푸닉어가 점차 사멸되고 라틴어가 우세한 지역이 된 반면, 지중해 동부의 페니키아 해안지대 역시 고대 페니키아어가 점차 자리를 일고 코이네 그리스어와 아람어가 일상생활에서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2.2. 고대 말
서기 4세기 기독교가 유행하면서 양 지역을 연결해주던 바알-함몬 신앙도 타격을 입었으며, 양 지역은 라틴어권과 그리스어-아람어권으로 분리되기 이른다.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어진 뒤에는 마그레브가 서로마 제국에 속하고 지중해 동부 일대는 동로마 제국에 속했다. 서기 5세기 들어서는 북아프리카에 도나투스파가 등장해 기존 교단과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다면, 레반트 지역에서는 야코부스파가 등장하여 6세기 들어서는 아예 현지 사회의 주류 종파로 자리매김하기 이른다. 야코부스파에 반발한 현지 정교회 신도들 중 일부가 레바논 산악 지대로 피신하는데 이들은 후일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기원이 된다.서로마 제국이 약화되자 북아프리카에는 반달족들이 반달 왕국을 세웠다. 이렇게 양 지역 사이의 관계는 축소를 거듭하다 반달 왕국 시대에 들어 단절되기 이른다.
2.3. 중세
반달 왕국의 멸망을 계기로 양 지역 사이의 교류는 다시금 복구되었다.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하의 동로마 제국은 멸망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까지 재정복하는 사업을 추진한다. 서기 6세기 북아프리카는 다시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8세기에 우마이야 제국이 지중해 동부 일대와 북아프리카 전역을 정복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축출되고 양 지역은 모두 아랍화 되었다. 그리고 현지 주민들이 대부분 이슬람교로 개종했지만, 일부 기독교인들은 레바논 산악지대로 피신하는데 이들은 오늘날 마론파 등등 레바논 기독교인들의 기원이 되었다.
한 편 북아프리카 튀니지 일대에서 발흥한 파티마 왕조는 이집트를 거쳐 레반트 지역까지 확장하였다. 파티마 왕조의 6대 칼리파 알 하킴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레바논 산악지대로 피신하였는데 이들은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 일대의 드루즈교 신도로 남아있다.
2.4. 근세
오스만 제국이 레바논 일대와 북아프리카를 정복하면서 양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레바논 산악 지대 일대는 종교적 소수자들이 은산하기 적합한 장소로 순니파 이외 정교회, 드루즈교, 시아파 등의 여러 종교를 믿는 주민들이 많이 거주했다. 반면 튀니지의 경우 일부 세파르딤들을 제외하면 순니파 이슬람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 되었다.오스만 제국 시대 튀니지나 레바논 모두 제국 영내 교역보다는 바다 건너 유럽 기독교 국가들과의 무역에 열을 올리던 상황이었고, 양 지역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 규모는 대단찮은 수준이었다.
2.5. 19세기
19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튀니지 일대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레바논 일대도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2.6.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레바논 지역은 시리아와 함께 시리아-레바논이란 프랑스령 지역이 되었다. 이중 레바논 지역은 마론파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분리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시리아가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튀니지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다.독립국이 된 튀니지와 레바논에서는 고대사를 공유한다는 동질감에서 양국간 민간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1982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고 튀니지로 기반을 옮겼다.#
2.7. 21세기
양국은 아랍 연맹, 이슬람 협력기구, 프랑코포니의 회원국들이다. 양국은 교류, 협력이 활발한 편이다. 양국은 세속 국가에 속해 있고 언어, 문화, 종교 등에서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프랑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양국은 프랑스와 협력을 자주 하고 있다.3. 문화 교류
양국은 아랍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튀니지와 레바논에서 쓰이는 아랍어는 아랍어 방언에 속해 있고 표준아랍어와는 차이점이 크다. 그리고 둘 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프랑스어는 주요 외국어에 속해 있다.양국은 무슬림 비중이 높지만, 세속 국가에 속해 있다. 그리고 레바논에는 종교, 종파가 다양하기 때문에 튀니지와 마찬가지로 세속 국가에 속해 있다.
4. 교통 교류
양국을 잇는 항공노선이 존재한다.5. 기타
양국 모두 성폭행범이 결혼시 처벌을 면제하는 법을 폐지했다.#6. 관련 문서
- 튀니지/외교
- 레바논/외교
- 아랍 연맹
- 이슬람 협력기구
- 프랑코포니
- 튀니지/역사
- 레바논/역사
- 튀니지인 / 레바논인 / 아랍인 / 아랍계 기독교인
- 아랍어 / 아랍어 방언 / 프랑스어 / 이슬람교 / 순니파 / 시아파 / 드루즈교 / 마론파 / 정교회 / 오리엔트 정교회 / 동방 가톨릭 교회
- 대국관계일람/아프리카 국가/북아프리카 국가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서아시아 국가
[1] 하지만 티레가 페니키아인들에게 가진 상징성이 워낙 강했다보니, 그 카르타고마저도 티레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의 도시로 복원되자 상징적인 의미로 상납금을 보냈다고 한다.[2] 티레의 모도시였던 비블로스의 수호신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나오는 이슈타르였다. 그리고 페니키아인들은 이슈타르의 남편을 주님이라는 뜻의 바알이라고 불렀다.[3] 시케리아 섬 영토를 두고 시라쿠사 등 그리스 폴리스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던 바 있다.[4] 티레 공방전 이후 멸망했던 티레가 다시 복구되는 과정에서 일부러 카르타고를 모방하여 정치체제를 기존의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변경하기도 하였다. 이는 카르타고와 페니키아 본토의 문화적 위상이 역전되었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