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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23:25

투팍 샤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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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뷔 전2. 데뷔 앨범 2Pacalypse Now3. 두 번째 앨범 Strictly 4 My N.I.G.G.A.Z...4. 첫 번째 총격사건
4.1. 주요 관계자4.2. 사건 개요
5. 세 번째 앨범 Me Against The World 6. Death Row와의 계약7. 네 번째 앨범 All Eyez on Me 그리고 마지막 레코딩8. 두 번째 총격 사건, 그리고 사망

1. 데뷔 전

투팍의 어머니는 흑표당의 멤버였고, 재판 과정 중 그를 임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판이 끝나고 아들이 태어난 후에도 그녀는 일정한 수입이 없어 그들은 투팍이 12살이 되기까지 부랑자 수용소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83년부터 투팍 어머니의 옛 남자 친구가 그들과 같이 살게 되면서 어느 정도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제이다가 회상하는 투팍과의 첫만남
어머니는 투팍을 할렘의 연기 전문학교에 입학시키고, 투팍은 '분노의 포도'에서 첫 역할을 맡는다. 15세 때 메릴랜드로 이사하면서 볼티모어 예술고[1]에 입학하고, MC 뉴욕이란 이름으로 투팍은 랩을 시작한다. 1988년, 이 시기는 투팍이 빈곤의 고통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던 안정된 시기였다. 학비를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볼티모어 예술 고등학교에서 그는 원하던대로 연극을 공부하고 랩 가사를 쓰는 등 자신의 창조적인 재능을 갈고 닦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양아버지가 강도 혐의로 감옥에 간 후 형편이 크게 어려워져 고등학교와 랩을 그만두고[2] 길거리에서 마약을 파는 일을 했다. 정확히는 마약을 파는 일을 시도해보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2주만에 그만두었다. 자신의 말대로면 사람들이 돈이 없다고 할때마다 마음이 약해져서 외상으로 넘겨주거나 전당포 주인처럼 물건을 담보로 받은 적이 많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 마약을 공급해주는 업자가 2주만에 투팍을 해고했다고...

이후 투팍은 캘리포니아의 사우스 로스엔젤레스(사우스 센트럴)에서 마약상으로 일하다가 여러 번 그의 노래 속에서 밝힌 것처럼 '누군가의 충고를 따라' 랩계에 뛰어들게 된다. 동기에 대해선 논란이 많지만 아마 샷건을 맞아 죽을 뻔한 일이 있은 뒤부터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총알들은 투팍의 머리 위 5cm 정도 스쳐 지나갔다고 한다. 1990년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마친 후에 투팍은 디지털 언더그라운드의 백댄서 겸 로드매니저 객원 래퍼로서 디지의 순회공연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디지는 인기 있는 그룹이었으며 특히 라이브에 강하다는 평을 받았고 투팍은 실력을 인정받게 되면서 오프닝 무대에 서기도 하며 착실한 진보를 이루어냈다.

여기서 그는 청소년기의 노토리어스 B.I.G.를 만나게 되는데[3] 투팍은 그를 마치 친동생처럼 여겨 비기에게 몇 분 안되던 그의 공연 시간마저 나누어주며 실전 경험을 쌓게 한다.

2. 데뷔 앨범 2Pacalypse Now

파일:투팍 1집.jpg

1991년, 2Pacalypse Now로 앨범 데뷔를 했을 때 투팍은 아직 19살 밖에 되지 않은 상당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폭넓고 깊게 다루는 천재 래퍼로서 순식간에 주목받기 시작했다.

앨범에서 싱글 "Trapped"와 "Brenda's Got A Baby."가 성공을 거두고 또 디지털 언더그라운드의 멤버로서 부른 노래 "Same Song"이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는 등 매우 성공적인 데뷔를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역대 힙합 관련 영화들 중에서도 수작으로 손꼽히는 작품 'Juice'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배우로서도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 당시에 일어난 큰 사건은, 텍사스에서 경찰을 쏜 어떤 소년이 투팍을 기소한 것이었다. 그는 투팍의 앨범이 그에게 '경찰을 쏘게 할 동기를 주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사건은 점점 확대되기 시작하여, 부통령인 댄 퀘일이 지상파 방송을 통해 투팍을 비난하는 전대미문의 결과를 낳았다. 미국의 부통령이 갓 데뷔한 신예 래퍼를 방송을 통해 대놓고 공격한 것은 사람들에게 인상 깊이 남았다. MTV를 위시한 다른 미디어들은 투팍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길 바랐고, 앨범 소속사도 이를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이용했으며, 대중들은 모두 만들어진 이미지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시 10~20대는 그를 해방과 자유의 화신으로 존경했으나, 기성 세대들이 보기에 투팍은 자녀를 오염시키는 불순분자였으며, 동료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건드려선 안될 무서운 놈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성공적인 데뷔와 동시에 큰 사건들을 통해서 순식간에 힙합씬의 거물이 되어버린 이 즈음 투팍은 많은 고민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3. 두 번째 앨범 Strictly 4 My N.I.G.G.A.Z...

파일:투팍 2집.jpg

1993년 앨범 Strictly 4 My N.I.G.G.A.Z...는 이런 사정들로 인해 전작과 비교해 훨씬 더 폭력적인 이미지로 완성되었고, 싱글 "Keep Ya Head Up"이나 "I Get Around"가 히트하게 된다. 아이스 큐브, 아이스-T, Naughty by Nature의 Treach, 스눕 독 등과 만나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자넷 잭슨과 출연한 영화 Poetic Justice에서 Lucky 역을 맡았고 흥행에 성공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투팍은 영화계에서 확실한 입지를 다지게 되나 후술된 여러 사건들로 인한 이미지 악화 때문에 거대 메이저 영화사들이 그를 더 이상 고용하려 하지 않게 되었다. 투팍이 출연했던 Juice의 감독은 압력 때문에 신작에서 투팍을 빼야만 했고 이를 시작으로 다른 영화들 또한 취소되었으며 한 동안 영화를 쉬게 되는 동기가 된다.

예술적인 면을 제외하고 가장 큰 사건은, 애틀랜타에서 비번이었던 두 명의 경찰을 총으로 쏜 것인데 투팍은 당시 그들이 다른 흑인을 괴롭히고 있었음을 주장해 이 사건은 기소도 되지 않은 채 넘어가게 되지만 결과적으론 전국의 모든 경찰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또 하나의 사건은 강간 미수 사건으로 22살의 여자가 투팍을 상대로 고소한 것인데 다음 해 까지 판결은 유보된다.

1994년은 투팍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Thug Life란 그룹을 발전시키고 이와 동시에 이제는 그의 상징과도 같은 'Thug Life' 문신을 배에 새겨 넣는다. 이건 여태까지 보다 더 강경히 과격한 갱스터의 입장을 지키겠다는 뜻이고 또 투팍이 어떠한 의미에서 진정한 친구들을 찾았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멤버들은 비록 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앞으로도 투팍과 같이 하게 되고 후에 여러 멤버들이 Outlawz로 바뀌면서도 투팍의 곁에 남아서 그의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94년 초 그는 영화 'Above the Rim'에 마약상인 'Birdie'로서 출연하게 되고, 그와 Thug Life가 함께 부른 "Pour Out a Little Liquor"도 OST에 실려 2백만 장 넘게 팔리게 된다. 이것은 안 좋아진 이미지 때문에 'Higher Learning'이나, 'Menace II Society'에 출연하지 못한 그에게 다시 배우로서 유명세를 얻게 해 주고 OST의 유례없는 성공으로 투팍은 다시 큰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1994년 여름 두 명의 소년이 또 경찰관을 죽이고 투팍의 노래 "Souljah's Story"가 그들을 부추겼다고 말해 다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11월 30일에는 총격 사건에 휘말려 총을 복부에 세 방, 머리에 두 방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간 투팍은 수술 후 단지 세 시간만에 퇴원을 한다. 투팍은 이 날 사건에 관련된 노래만 자그마치 10여 곡을 넘게 썼으며, 마카벨리 앨범의 마지막 곡 'Against All Odds'에선 많은 사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투팍은 이 사건의 범인으로 노토리어스 B.I.G.퍼프 대디를 지목했으나 그들은 이를 부인했다.

게다가 총격사건이 벌어진 다음 날에는 위에서 언급된 성폭력 사건에서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4. 첫 번째 총격사건

"Fuck Mobb Deep, Fuck Biggie, Fuck Bad Boy as a staff record label and as a motherfuckin' crew And if you wanna be down with Bad Boy Then fuck you too!"
좆까 맙 딥, 좆까 비기, 배드보이의 스태프 레코드 레이블 크루 전부 다 좆까, 개새끼들아. 그리고 네가 배드보이 새끼들이랑 같이 하려는 새끼라면 너도 좆까라!
- Hit 'Em Up[4]

4.1. 주요 관계자

4.2. 사건 개요

11월 29일 - 이틀 뒤로 예정된 선고공판을 맞아 오랜만에 뉴욕에 도착한 투팍은, 자신의 옛 친구인 스트레치 및 Live Squad의 멤버, 여동생의 남자친구 등과 만나 같이 시간을 보낸다.
11월 29일 저녁 - 역시 친구인 DJ Ron G와 레코딩 작업을 하는 도중 헨치맨에게 전화를 받았다.[5] 헨치맨은 릴 숀의 앨범에 쓰기 위해 투팍의 리듬을 사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투팍은 이를 승낙한다. 곧 스튜디오에서 만나기로 하나 다른 일들 때문에 투팍은 스튜디오에 늦게 가게 된다. 그 사이 헨치맨과 릴 숀이 계속 전화를 걸어 오라고 재촉을 했다.
11월 30일, 00:20 - 투팍과 그의 옛 친구 스트레치를 포함한 네 명은 타임스퀘어 빌딩에 들어선다. 입구를 지날 때 경비원 의자 근처의 세 명이 그들을 따라오자 투팍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만 릴 시저가 멀리서 그들을 부르자 투팍은 그곳에 비기가 온 것을 알게 되고 그들의 보디가드려니 하며 그냥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투팍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뒤돌아선 순간 따라오던 셋이 권총을 빼들며 모두 엎드리고 몸에 차고 있는 보석을 내놓으라고 소리친다. 그에 따라 다른 이들은 모두 엎드리지만 투팍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듯 경고를 무시하고 총을 꺼내다 머리에 두 방을 포함해 총 다섯 방의 총을 맞는다. 그리고 그들은 투팍의 보석들을 빼앗아 달아나기 시작하고 다른 이들이 그들을 쫓아가자 투팍은 부상을 입은 와중에 엘리베이터에 탄 후 스튜디오로 올라간다. 스튜디오엔 비기와 퍼프 대디를 포함한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는데 나중에 투팍은 이 순간이 얼마나 이상했었는지 인터뷰에서 밝힌다.[6]
11월 30일, 04:45 -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투팍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게 되고[사진] 약 세 시간에 걸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후 그의 목숨을 아직도 노리는 자가 있어 병원도 안심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곧 퇴원하게 된다.
12월 1일 - 총에 맞은 뒤 약 30여 시간뒤에 투팍은 자신의 재판이 진행되던 법정에 출두한다. 휠체어를 탄 그의 곁엔 미키 루크와 보디가드들이 있었고 그 날 투팍은 유죄 판결을 받고 4년 2개월 형을 선고받지만 부상을 입은 관계로 보석금을 내고 회복될 때 까지 감옥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투팍은 비기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투팍이 수감되기 전에 녹음한 앨범 'Me Against the World'엔 비기나 배드보이를 비난하는 내용이 없다. 1995년 2월, 투팍은 부상이 나은 것으로 간주되어 수감되게 되는데 감옥 안에서의 얘기는 많이 밝혀진 게 없지만 후에 인터뷰에서 감옥에서 그를 쏜 것이 다름 아닌 비기의 친구들이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즉 수감된 시점 이후부터 악감정이 생긴것이다. 거기다 총격 사건 뒤 발매된 Biggie의 재발매 앨범엔 투팍이 총격 당하는 것을 사사하는 듯한 뉘앙스의 'Who Shot Ya' 라는 신곡이 들어있었다.[8]

약 8개월 간의 복역 후 투팍은 데스 로우의 사장 슈그 나이트가 제안한 딜을 받아들이고 형무소에서 보석으로 출감한다. 그리고 LA로 돌아오자마자 MTV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배드 보이 레코드가 자신을 죽이는 걸 도왔다" 라고 주장했다.

5. 세 번째 앨범 Me Against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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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14일, 투팍은 성폭행 사건 혐의가 인정되어 4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뉴욕에 있는 라이커 교도소에 가게 된다. 이로서 그가 이전 커리어들을 통해 쌓은 좋은 이미지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나중에 젊은 흑인 남성으로서 성공의 길을 걸을 때의 많은 유혹들을 견뎌내지 못한 것을 인정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이 사건에서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논란들과는 관계없이 그의 음악은 성공을 거듭한다.

아직 투팍이 감옥에 있던 4월 1일, 투팍의 세번째 솔로앨범인 Me Against the World가 옥중 발매되고 싱글 'Dear Mama'등의 히트에 힘입어 앨범은 곧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한다. 앨범이 발매될 때와 맞추어 투팍은 Vibe지와 옥중 인터뷰를 가졌는데 투팍은 자신의 여태까지의 삶이 불행했던 어린 시절에 너무 지배받고 있었으며 마약과 술에서 벗어난 감옥 안에서의 날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얘기했다. 자신이 총을 다섯 방 맞은 뒤에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앞으로의 삶은 그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해 신이 내려준 기회일 것이라고도 말했다.

같은 해 8월, 노토리어스 B.I.G.퍼프 대디 등의 배드 보이 레코드 관계자들은 같은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이 투팍이 총을 맞은 일과 아무 관계가 없음을 주장한다.

6. Death Row와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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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즈 매거진에 수록된 전성기의 데스 로우.[9]

1995년 10월, 슈그 나이트는 140만 달러를 보석금으로 지불하고 투팍을 교도소에서 빼내 자신의 데스 로우 레코드에 소속시킨다. 계약 조건은 보석금으로 지불된 돈을 계약금 삼아 투팍이 세 장의 앨범을 데스 로우에서 발매한다는 조건이었다. 사후 발매가 되었던 앨범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 구상된 것이다. 대략 150여 곡정도.[10]

7. 네 번째 앨범 All Eyez on Me 그리고 마지막 레코딩

파일:모든눈이내게.jpg
All Eyez on Me가 1995년 10월에 레코딩되어 1996년 2월에 발매된다. 두 장으로 이뤄진 이 앨범은 발매 후 두 달만인 1996년 4월에 플래티넘을 5회 달성하고 1998년까지 무려 아홉 차례 플래티넘을 기록한다. 싱글로 발매된 "How Do U Want It" 과 "California Love"가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한다. 참고로 8월에 발매된 "How Do U Want It" 싱글에 배드보이 레코즈를 디스한 Hit 'Em Up이 처음 공개되었다.

All Eyez on Me는 솔로 래퍼가 발매한 역사상 첫 두장짜리 음반이었으며, Me Against The World에 이어 두 번째로 빌보드 200 및 Top R&B/Hip-Hop Albums 차트 정상에 올라간다. 발매 첫 주만에 566,000장 전량이 매진되었으며 1996년 말엔 6백만 장이 팔려나갔다. 현재는 천만장이 넘게 팔렸다. 이는 그의 생전 커리어에 있어서 최정점의 상업적 성공이었다.

8. 두 번째 총격 사건, 그리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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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학교에서 제이다 핀켓 스미스(매트릭스 시리즈의 니오베 역으로 유명, 현재 윌 스미스의 아내)와 평생친구가 되었다. 생전 자신이 쓴 시집에 담긴 헌정시와 그의 사후에 나온 다큐멘터리에서 둘의 우애를 확인할 수 있다.[2] 고등학교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투팍은 학교 사무실에 찾아와 정신 나갈 듯 슬퍼했다고 한다. 래퍼로서 성공한 이후에도 투팍은 자신은 꼭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성공한 이후에도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남아있었음을 보여준다.[3] party and bullshit을 듣고 pac이 감동을 받은게 계기가 되었다.[4] 밑에 자세하게 나와있듯이 오해가 얼마나 큰 파장을 가져오는지 잘 보여주는 가사다.[5] 이 레코딩 작업중에 투팍이 작업했던 곡이 Big L의 사후에 발매된 The Big Picture에 수록된 Deadly Combination이라는 곡인데 투팍의 벌스 초반에 나오는 'I feel like niggaz is trying to kill me'은 결코 우연이 아닌셈[6] "이상했어요. 총 맞은 제 꼴을 보고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어요. 마치 제가 총 맞을 걸 예상이나 했던 것처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묻지도 않더군요. 내가 살아있는 게 정말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기만 했다고요." (1995년 미 음악전문지 바이브와의 인터뷰 중)#[사진] 사진 실려가면서 뻑큐를 날리는 위엄을 선보인다.[8] 당시 프로덕션 과정을 생각하면 이미 앨범 수록곡이 다 만들어진 뒤에 나온 것이므로 시기를 보면 맞지 않지만, 뺄 수 있는데 안뺐다는 점에서 투팍의 의심을 부추겼다.[9] 왼쪽부터 투팍, 데스 로우의 CEO인 슈그 나이트, 스눕 독[10] 사후앨범들은 저작권 때문에 대부분 비트가 새로 만들어졌는데 완성도가 형편없다. 2Pac이 직접 부른 버전은 유튜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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