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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4:23:51

토머스 E. 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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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948년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
제47대 뉴욕 주지사
토머스 에드먼드 듀이
Thomas Edmund Dewey
파일:Thomas_E._Dewey_color_photograph.png
<colbgcolor=#002d72> 출생 1902년 3월 24일
미국 미시간 주 오와소
사망 1971년 3월 16일 (향년 68세)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학력 미시간 대학교 (B.A)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 (법학 / LL.B.)
재임기간 제47대 뉴욕 주지사
1943년 1월 1일 ~ 1954년 12월 31일
정당

배우자 프랜시스 허트(결혼: 1928년 ~ 사별: 1970년)
자녀 2명
종교 개신교 (성공회)
경력 제47대 뉴욕 주지사
1944·1948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
서명
파일:토머스 E. 듀이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대통령 선거 도전2.3. 뉴욕 주지사2.4. 말기
3. 평가4. 대중 매체5.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파일:듀이초상화.jpg
뉴욕 주지사 공식 초상화
미국의 검사 출신 정치가. 공화당 소속으로 뉴욕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1944년과 1948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다.

2. 생애

2.1. 초기

뉴욕 맨해튼을 기반으로 활동한 인물이지만 태어나고 자란 곳은 뉴욕이 아니라 미시간이다.[1]

성인이 된 뒤 뉴욕 검찰이 되어 당대 최고의 미국 마피아 두목 러키 루치아노를 구속시켰다.

2.2. 대통령 선거 도전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후보 경선에 출마하지만 민주당 탈당파 출신의 웬델 윌키에게 밀려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당의 공식 지명을 받은 윌키도 루스벨트의 3선을 막지 못하고 패배한다.

이후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도 다시 한번 출마했고, 이번에는 당의 공식 지명을 받는데 성공했다. 본선에서는 4선을 도전하는 민주당 후보인 현직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대결하게 됐는데, 결국 패배했지만 그 루스벨트를 상대로 득표율 45%를 넘기는 등 루스벨트를 상대로 4번의 대선에 나선 공화당 후보[2] 중 가장 선전했다.

4년전 활약으로 높아진 이름값을 바탕으로, 보수 강경파 대표인 로버트 A. 태프트 상원의원을 꺾고 다시한번 공화당 후보에 지명된다. 1948년 루즈벨트 사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맞서 다시 한번 대선에 도전했다.

파일:external/blogs4brownback.files.wordpress.com/dewey-defeats-truman.jpg
[3]
결과는 트루먼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재선에 성공한다. 미국 대선사에 남을 희대의 역전패를 당한 것이다.

2.3. 뉴욕 주지사

1942년에는 뉴욕 주지사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뉴욕 주지사로 재직하면서 교육과 교통 인프라, 수질환경 개선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보수주의적인 원칙에 입각해 정책 프로그램들에 대한 합리적인 재정마련 대책을 중시해, 오히려 그의 임기동안 주정부 부채를 감축하는데 성공했다.

전임 민주당 주지사들에 비해 자유시장과 민간부문에 훨씬 친화적인 성향[4]을 보여, 당시 연방정부의 기업활동에 대한 규제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규모 기업들을 뉴욕에 유치하는데 성공한다. 실제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약 135,000개의 기업들이 뉴욕에서 신설되었다. 듀이는 사형제도에 적극 찬성하여, 그의 주지사 임기동안 90명 이상의 사형수들에게 전기의자형을 집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아이를 가진 여성들이 군수산업에 안심하고 종사할 수 있도록 아이돌봄센터들이 설립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뉴욕의 주의회는 아이돌봄센터들에 대한 주정부 지원을 중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듀이는 찬성하는 입장을 내놓았고, 이는 시민단체들로부터 거센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위대들이 주정부 지원 유지를 요구하자, 듀이는 시위대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비판하며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2.4. 말기

1952년에는 본인은 출마하지 않고 대신 비슷한 온건파 성향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밀어줬고,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면서 간접적으로 패배의 한을 푼다. 1960년에는 아이젠하워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처드 닉슨을 공식 지지했으나 이번에는 존 F. 케네디에게 패배하며 빛이 바랐다.

이후 닉슨이 성공적으로 재기해서 대통령이 되는걸 보고 1971년 사망했다. 생전에 듀이는 닉슨을 상당히 호의적으로 대했는데, 1952년 닉슨이 아이젠하워의 부통령 후보가 되도록 지원한 것이 듀이였고, 1968년 닉슨이 공화당 경선에 도전할 때 상대후보인 록펠러와도 친한 사이였음에도 개인적으로[5] 닉슨을 지지했다.

3. 평가

공화당온건주의 세력의 대표격인 인물로, 보수 강경파인 로버트 A. 태프트와 함께 1940년대~1950년대 공화당을 이끌었던 주요 정치가들 중 한 명이다.

두 차례의 패배 후에도 한때 세 번째 도전이 언급될 만큼 공화당 내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친 나름 시대의 거물이었으나,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배리 골드워터의 후계자인 로널드 레이건 등이 전면에 등장해 공화당이 신보수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공화당 내에서 자주 언급되지는 않고 있다.

개인적인 인품은 아주 선량했고 전형적인 뉴요커 신사로 묘사되었다. 당파를 가리지 않고 다른 정치인들과 두루 사적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후일 부통령이 되는 휴버트 험프리는 그의 절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오만하고 잘난척을 하는 부분이 있어 너무 "뉴요커"스럽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지 사석에서 "개새끼"라고 불렀으며,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도 "뉴욕의 은행가", "뉴욕의 멍청한 난쟁이 주지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4. 대중 매체

알프 랜던처럼 루즈벨트의 공화당 대적자, 대통령이 될수있었던 자라는 포지션 때문에 존 낸스 가너처럼 대체역사에서는 험한 꼴을 자주 본다.

FPS 게임 Turning Point: Fall of Liberty에선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대통령이 되었지만 1953년 결국 독일의 침공을 받고 워싱턴까지 함락당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6]

Hearts of Iron IV에서는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이벤트에서 뽑을 수 있지만 1944년 이전에 전쟁이 끝나면 맥아더가 대통령후보가 되고, 뉴딜을 제공하는 루스벨트, 석유기업인 스텐더드 오일과 이념 전향 방어 +50%를 제공하는 알프 랜던,윌키의 뉴딜을 제공하는 웬델 윌키, 징병법 수치와 장군 고용 비용을 깍아주는 맥아더, 국군내 인종차별 폐지 중점을 찍게 해주는 해리 S. 트루먼과 달리 듀이는 딱히 주는게 선거로 대통령 바꾸면 기본으로 주는 정치력 120이 전부인 구린 능력치를 자랑한다.
대부(영화)에서 카를로 리치소니 콜레오네가 두들겨패는 유명한 장면에서 듀이를 지지하는 선거 포스터가 붙어있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 공화당의 진보온건파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등장하여 루스벨트를 누르고 대통령이 된 웬델 윌키와 함께 서민 복지정책을 지지한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현 대통령인 헨리 A. 월리스를 상대로 승리하여 미국 대통령이 된다. 대통령이 된 직후 아돌프 히틀러백악관으로 초청해 전 세계를 미국과 독일의 영역으로 양분할 것을 제안한다.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무난하게 승리해 2선을 하지만 중국의 몽골 침공, 독일의 수소폭탄 개발, 아이슬란드 내의 시위, 매카시즘 등으로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최대한 수습을 위해 노력한 뒤, 2선을 마치고 백악관을 떠난다.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에서는 루스벨트가 죽은 이후 자중지란에 빠진 민주당을 누르고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 전후 루스벨트의 정책과 반대되는 강력한 반공 정책을 이끌고 한국 전쟁에서 승리한다.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38 미국 주지사 선거 뉴욕

2,326,892 (49.02%) 낙선 (2위)
1942 미국 주지사 선거 2,148,546 (52.10%) 당선 (1위) 초선
1944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22,017,929 (45.89%, 99명) 낙선 (2위)
1946 미국 주지사 선거 뉴욕 2,825,633 (56.92%) 당선 (1위) 재선
1948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21,991,292 (45.07%, 189명) 낙선 (2위)
1950 미국 주지사 선거 뉴욕 2,819,523 (53.11%) 당선 (1위) 3선

[1] 여담으로 이 사람 이후 조지 퍼타키가 당선될 때까지 뉴욕주지사는 쭉 뉴욕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뉴요커들만 맡았다.[2] 허버트 후버(1932년), 알프 랜던(1936년) 웬델 윌키(1940년), 토마스 E. 듀이(1944년)[3] 사진은 '듀이가 트루먼을 이겼다'는 오보를 헤드라인으로 내세운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을 들고 있는 트루먼.[4] "His governship was friendlier by far than his Democratic predecessors to the private sector"[5]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다. 주변인들에게만 말한 것이 나중에 알려진 것.[6] 해당 게임은 처칠이 1931년에 사망한 것을 기점으로 삼았다. 처칠의 사망으로 영국이 조기 항복을 하는 와중에도 루즈벨트가 중립을 지키는 세계이다.[7] 다음날 듀이는 뉴멕시코로부터 맨해튼 계획의 완성을 보고받지만 너무 늦은 결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