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72a32,#272a32><colcolor=#cf9352,#cf9352> 토머스 클락슨 Thomas Clarkson | |
출생 | 1760년 3월 28일 |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위즈비치 | |
사망 | 1846년 9월 26일 (향년 86세) |
잉글랜드 서포크 플레이포드 | |
국적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
직업 | 사회운동가, 정치평론가, 성직자(부제) |
종교 | 성공회 |
학력 |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존스 컬리지 |
가족 | 존 클락슨 성공회 사제 (아버지) 앤 워드 (어머니) 존 클락슨 해군 중위 (남동생) 앤 클락슨 (여동생) |
배우자 | 캐서린 벅(1796년 결혼) |
자녀 | 토머스 클락슨(1796년 출생) |
축일 | 7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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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사회운동가, 정치평론가, 그리고 성직자. 그는 영국에서의 노예제 폐지를 이끌었으며 여타 서구권 국가에서까지 지대한 영향을 준 중요한 역할을 하여 노예제 폐지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2. 생애
2.1. 유년
토머스 클락슨은 성공회 사제이자 위즈비치 문법학교[1]의 교장인 존 클락슨과 아내인 앤 워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나고 약 2개월 뒤인 1760년 5월 26일날, 그는 위즈비치 성 베드로와 성 바우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이후 그는 자신의 남동생과 함께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힐 스트리트의 위즈비치 문법학교를 다녔으며, 1766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브리지 스트리트로 이사를 했다.
1775년 클락슨은 런던의 공립학교인 세인트폴 학교를 다녔으며, 졸업 후 1779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그는 진중한 학생이었으며, 우수한 학업 성적에 대학 생활을 성실히 보냈다고 한다. 그는 1783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성공회 성직자가 되고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남아 더 공부해 부제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사제직까지는 오르지는 않았다.
2.2. 전환점
1785년 클락슨은 대학교에서 열린 라틴어 에세이 대회에 참가했다. 에세이의 주제는 '그들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들을 누군가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 과연 합법적인가(Anne liceat invitos in servitutem dare)'였고, 이에 클락슨은 노예 무역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그는 퀘이커파의 대표적인 노예제 폐지론자인 앤서니 베네젯의 서적뿐만 아니라 프랜시스 무어의 <아프리카 내륙 여행기>와 같이 아프리카인 노예 매매에 대한 사실적인 이야기 등이 담긴 다양한 책들을 읽었다. 그는 또한 노예 무역 및 노예 제도와 연관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함으로써 에세이의 주제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 덕분에 그는 결국 대회에서 수상했다.대회가 끝난 후 어느 날, 클락슨은 케임브리지셔에서 런던으로 말을 타고 이동하던 도중 소위 신으로부터 영적인 계시를 받았는데,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세너트 하우스[2]에서 공개적으로 수상작을 읽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상장을 수여받은 후 곧장 케임브리지로 불려갔다. 나는 가서 내가 쓴 글을 낭독했다. 그러나 런던으로 돌아오면서, 왠지 모르게 나는 대부분을 그 에세이의 주제를 생각하는 데에 몰두했는데, 그것은 때때로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매우 심각한 지장을 주었다. 나는 이따금 말을 세운 뒤 내려서 걸었으며, 그럴 때마다 나는 종종 내 에세이에 담긴 잔인하고도 비참한 내용이 진실일 리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했다.
(중략)
하트포드셔의 웨이즈밀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길가의 잔디밭에 침울하게 앉아 내 말을 안았다. 에세이의 내용이 정녕 사실이라면 누군가는 이런 재앙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이러한 생각에 동요한 나는 집에 도착했다. 때는 1785년 여름이었다.
(중략)
하트포드셔의 웨이즈밀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길가의 잔디밭에 침울하게 앉아 내 말을 안았다. 에세이의 내용이 정녕 사실이라면 누군가는 이런 재앙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이러한 생각에 동요한 나는 집에 도착했다. 때는 1785년 여름이었다.
이러한 특별한 경험으로 인해 클락슨은 노예제 폐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쳐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고,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그는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자 자신의 에세이를 영어로 번역했으며, 1786년 <라틴어 논문을 번역하여 만든 인류, 특히 아프리카인의 노예와 상업에 관한 에세이>라는 제목의 소책자 형태로 출판했다.
소책자는 생각보다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클락슨은 제임스 램지, 그랜빌 샤프와 같은 당시 노예제 폐지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명 인물들에게 소개되었다. 클락슨의 글은 이미 이전부터 조금씩 노예제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던 퀘이커파와 비국교도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이에 1783년, 런던 출신 300명의 퀘이커파 신자들을 대표로 노예 무역에 반대하는 첫 번째 청원이 이루어졌다.
2.3. 노예 무역 반대 운동
1787년 5월, 클락슨을 포함한 일부 성공회 신자들, 다수의 퀘이커파 신자들, 그리고 일부 비국교도[3]들이 서로 힘을 합쳐 '노예 무역 폐지 위원회'라는 소규모 단체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종파 구분 없이 노예 무역 폐지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구성된 포괄적인 단체였다. 위원회의 창립자 12인은 클락슨, 그랜빌 샤프, 필립 샌섬, 이렇게 성공회 신자 3명과 퀘이커파 신자 9명이었다. 의장은 그랜빌 샤프가, 주요 위원은 클락슨과 조시아 웨지우드가 맡았다. 클락슨은 성공회 신자이자 영국 의회의 젊은 국회의원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를 노예제 반대 운동에 참여하도록 권유했고 그를 포섭하는 데에 성공했다. 윌버포스는 당시 퀘이커파의 노예 무역 폐지 청원에 동조했던 몇 안 되는 의원들 중 한 명이었으며, 그 전에도 이미 의회에서 노예 무역 폐지에 대해 몇 번 제안을 했었다. 이로써 클락슨과 윌버포스는 서로 최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강력한 협력 관계로 이어졌다.클락슨은 노예 무역 폐지 위원회에서 노예 무역의 폐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적인 증거를 수집하는 중요한 책무를 맡았다. 그는 증거를 모으고자 방문한 몇몇 도시들에서 노예 무역상들 및 찬성론자들의 강한 반대와 더불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아무래도 당시 노예 무역은 합법적인 상거래 중 가장 수익성이 높았는지라 이들의 입장에서는 클락슨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번영을 저해하는 방해물이었다. 노예 무역 찬성파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냐면 1787년 클락슨이 당시 노예 무역상 집단의 본거지이자 많은 노예선들이 정박된 주요 항구 도시였던 리버풀을 방문하던 중 노예 무역상들의 공격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번번이 목숨에 위협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도시들을 방문해 다양한 증거들을 수집했으며 동시에 대중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1787년 10월 28일, 클락슨은 맨체스터의 대학 교회[4]에서 공개적으로 연설을 함으로써 노예제 반대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같은 해 그는 <노예 무역과 노예제 폐지의 개연적 결과에 대한 요약된 견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했다.
클락슨은 그 후 약 2년 동안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위원회의 노예 무역 반대 운동을 홍보하고 증거를 수집했다. 그는 노예선에 탑승했던 약 20,000여명의 선원들과 외괴의사들을 인터뷰했다. 또한 그는 노예선에 사용되는 철제 수갑, 노예들의 턱을 강제로 벌리는 도구, 철제 낙인 같은 장비들을 얻어 그것들을 판화로 묘사한 소책자를 배포했고, 공개 전시하기도 했다.
클락슨은 증거 수집과 더불어 노예 무역에 반대하는 글을 계속 썼다. 그는 1788년에는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정책에 관한 에세이>를, 이듬해 1789년에는 <노예 무역에 관한 에세이>를 출판했고, 이러한 클락슨의 저서들은 윌리엄 윌버포스가 1789년 5월 12일 의회에서 처음으로 노예 폐지론 연설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클락슨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토머스 존스 신부에게 영국 최초의 흑인 정치계 모임인 '아프리카의 아들들'의 일원이자 회고록 <올라우다 에퀴아노의 삶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쓴 올라우다 에퀴아노를 소개하고자 편지를 썼다. 그는 존스 신부에게 회고록의 사본을 판매하고 에퀴아노가 대학에서 강연을 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클락슨이 대외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이, 한편 윌버포스는 클락슨이 전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1791년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법안을 만들어 처음으로 발의했으나 찬성 88표, 반대 163표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이를 포기하지 않고 노예 무역 문제를 의회에 계속 제기했고, 부결 소식을 들은 클락슨은 다시 여정을 떠나 노예제 반대에 관한 글을 썼다. 그는 포츠머스에서 입수한 노예선을 바탕으로 그는 노예선에 실린 노예들의 그림들이 있는 책을 제작했고, 1791년 런던에서 출판했다. 그는 그 그림들을 노예제의 부당성에 관련된 추가적인 자료와 함께 윌버포스에게 전달했다.
이때부터 윌버포스가 클락슨과 함께 거의 매년마다 폐지 법안을 발의하는 장기간 캠페인의 출발점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클락슨과 윌버포스는 노예 무역 폐지 위원회과 함께 여론을 동원한 전국적인 운동의 선봉자들이었기에 그 책임감이 막중했다. 그러나 의회는 계속해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를 거부했다. 엎친 데 덮친 격 도중에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수년 동안 노예제 폐지 논쟁이 묻혀버렸고 오히려 노예제 유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일례로 당시 총리 소(小) 윌리엄 피트 내각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던다스가 자메이카 부총독 애덤 윌리엄슨에게 프랑스 식민지 생도밍그의 대표자들과 함께 앙시앵 레짐 및 노예제 복구와 혼혈 식민지 주민에 대한 차별 정책을 약속하는 협정에 서명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러한 시대 역행적인 만행은 윌버포스와 클락슨의 공분을 샀다.
1794년,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클락슨은 모든 직책을 잠시 내려놓았고, 이에 노예제 반대 운동도 잠시 중지되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고자 영국 컴브리아에 있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얼마간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와 친구가 되었다.
1796년 1월 19일, 클락슨은 캐서린 벅과 결혼하였고, 같은 해 외동아들인 토머스가 탄생했다. 클락슨은 자신의 아내 캐서린의 건강을 위해 잉글랜드 남부 서포크 지역으로 이주해 클락슨의 가족은 1806년부터 1816년까지 아내의 고향인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에 정착했고, 이후 서포크 지역의 입스위치와 우드브리지 사이에 있는 마을인 플레이포드에서 살았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804년,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클락슨은 자신의 직책으로 돌아왔고, 이에 노예제 반대 운동이 부활되었다. 약 10년 동안의 정체기가 지나고, 클락슨은 다시 말에 올라 영국 전역을 돌아다님으로써 폐지법에 대한 지지를 호소함과 동시에 이를 받쳐 줄 자료들을 조사했다. 그는 예전보다 더욱 열정적이었으며, 특히 그는 국회의원들을 만나 폐지법 가결에 동조하도록 설득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클락슨의 부단한 노력 덕분에 결국 1807년, 일명 '노예 무역법 1807'이 통과되면서 노예 무역의 금지가 선언되었고,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아 법이 시행되었다. 클락슨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노예 무역을 유지하고 있는 스페인, 프랑스, 그리고 유럽 국가의 미국 식민지에서의 폐지를 위해 유럽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폐지법을 알리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1808년 클락슨은 <노예 무역 폐지에 대한 발흥, 과정, 그리고 달성의 역사>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1814년에는 프랑스 파리를, 1818년에는 프랑스 엑스라샤펠을 방문하여 노예 무역 폐지를 위한 국제적인 합의에 도달하도록 매진했다.
2.4. 노예제 폐지와 말년
노예 무역 폐지라는 목적을 달성한 클락슨은 이제 노예제 완전 폐지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1823년, '노예제 완화 및 점진적 폐지 협회'[5]가 결성되자, 클락슨은 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밑바탕을 조성하기 위해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그는 약 17,000킬로미터를 직접 걸어다니며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의 노력으로 노예의 완전한 해방을 요구하는 777건의 탄원서가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에 응하여 협회 측에서 즉각적인 노예 해방 정책을 발의했을 때, 클락슨과 윌버포스는 의회에 함께 등장해 마지막으로 정책 가결을 열렬히 호소했다. 이로써 1833년, 노예제 폐지법이 통과되었고, 1838년 8월 1일에는 영국 식민지까지 폐지법 적용이 확대되었다. 그렇게 영국에서의 노예제는 최종적으로 막을 내렸다. 1840년 노예 제도 반대 협의회 (The Anti-Slavery Society Convention, 1840) 벤자민 로버트 헤이던 作,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 소유 |
클락슨은 시력이 나빠질 정도로 고령이 되었지만, 그는 미시시피강 서부의 일부 주를 포함하여 아직 노예제가 만연한 미국에 초점을 맞추어 폐지 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1840년, 런던 프리메이슨 홀에서 토머스 비니가 의장을 맡은 '제1차 세계 노예 제도 반대 협의회'의 개막식에서 주요 연설자를 맡았다.[6] 이 회의는 전 세계적으로 노예제 폐지를 위한 지지를 구축하기 위해 개최되었으며 프랑스, 미국, 아이티, 그리고 자메이카의 대표단이 참여했다.
노예제 폐지에 일생을 바친 클락슨은 1846년 9월 26일, 서포크 플레이포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동년 10월 2일에 플레이포드의 성 마리아 성당에 묻혔다.
3. 성인 시성
2010년 7월, 잉글랜드 성공회에서 윌리엄 윌버포스, 올라우다 에퀴아노와 함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축일은 7월 30일. 그리고 동년 동월의 30일 축일 당일날, 그가 타계한 곳인 플레이포드의 성당에서 성인을 기리는 축제가 처음으로 열렸다.[1] 문법학교(Grammar school)는 영국 등 영어권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학교 종류 중 하나이며 중 •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한다. 과거에는 라틴어,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수학, 자연과학, 역사 등 다방면으로 가르치던 복합적인 엘리트 교육 과정이었다. 현재는 여느 중 • 고등학교처럼 일반 종합 교육화되었고 사실상 그 이름만 남게 되었지만, 여전히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다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2]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있는 대학 이사회 회의장 및 졸업식장 건물.[3] 성공회를 믿지 않는 개신교 신자들.[4] 현재 맨체스터 대성당.[5] 이후에 노예제 반대 협회로 발전했다.[6] 상단의 그림에서 일어선 채 손가락을 치켜들며 연설하는 사람이 토머스 클락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