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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02:00:35

토머스 아핑햄

파일:토머스 아핑햄.webp
이름 토머스 아핑햄
Thomas Erpingham
출생 1357년
잉글랜드 왕국 노퍽주
사망 1428년 6월 27일
잉글랜드 왕국 노리치
아버지 존 아핑햄
어머니 미상
아내 조앤 클롭튼, 조앤 월튼
직위 기사, 잉글랜드 원수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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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기사, 장군. 곤트의 존, 헨리 4세, 헨리 5세 3대를 모신 랭커스터 왕조의 충신으로, 백년전쟁 등 여러 전장에서 활약했다.

2. 생애

1357년경 잉글랜드 왕국 노퍽에서 출생했다. 할아버지 로버트 아핑햄은 1316년부터 노퍽의 어핑엄 영지를 소유했고, 1346년부터 와이머에서 영지를 소유했고, 노퍽을 대표하는 의원으로서 의회에 출석하기도 했다. 아버지 존 아핑햄은 1368년부터 아키텐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의 기사로 활약했다. 어머니의 이름과 출신은 알려진 바 없다.

1370년 3월 8일 할아버지 로버트가 사망하고, 그해 8월 1일 아버지 존도 사망했다. 이리하여 토머스는 3개의 저택을 포함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1373년 제2대 서퍽 백작 윌리엄 우퍼드의 지휘하에 프랑스군과 맞섰고, 1379년에는 제2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의 원정에 가세했다. 1380년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측근이 되었고, 연간 20파운드에 달하는 연간 수입을 제공받았다. 이때 그는 "토머스 경(Sir Thomas)"으로 언급되었지만, 기사 작위를 받은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다.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발발하자, 노퍽과 미들섹스에서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1385년 스코틀랜드의 침략과 프랑스군의 상륙에 대비해 노퍽 방어 체계를 정비했으며, 1386년 곤트의 존의 카스티야 원정에 참여했다. 1388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가 참석한 가운데 몬테로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가했다.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그는 도중에 안장에서 떨어졌지만 회복한 뒤 "왕과 남작들이 만족할 만큼" 시합을 계속했다고 한다.

1390년 곤트의 존의 아들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함께 영국 해협을 건너 제노바 공화국튀니지에 들끓는 무슬림 해적을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에 가담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한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과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측이 이를 거부하자, 그 대신 튜튼 기사단에 가담한 뒤 튜튼 기사단의 리투아니아 대공국 원정에 참여해 빌뉴스 공방전에 함께 했다. 1392년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함께 리투아니아로 다시 왔지만, 튜튼 기사단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평화 협약을 맺은 걸 알게 되자 프라하, 등 유럽 전역을 여행하고 성지를 순례했다.

1398년 리처드 2세가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추방하자, 그는 다른 16명의 기사와 함께 헨리를 따라 프랑스로 향했다. 그들은 파리로 가서 샤를 6세의 환대를 받았다. 1399년 6월 17일, 토머스는 헨리와 샤를 6세의 형제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 사이에 체결된 비밀 협약 체결에 참여했다. 이 계약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을 제외한 적들에 대한 상호 지원을 약속했다.

1399년 6월 말 헨리와 함께 잉글랜드 북부 요크셔의 레이븐스펀에 상륙한 뒤, 리처드 2세가 부당하게 빼앗아간 곤트의 존의 영지를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랭커스터 공국에 속한 영주 및 기사들과 리처드 2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대귀족들이 대거 가담했다. 7월 말, 토머스는 리처드 2세에게 끝까지 충성한 노리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를 체포했고, 8월 초 콘위와 러들란 성 사이의 도로에서 리처드 2세를 체포했다. 토머스는 리처드 2세를 런던 탑으로 압송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리처드 2세를 강제로 퇴위시킨 뒤 헨리 4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그는 대관식이 거행되는 동안 왕의 검을 들고 다녔다.

그 후 토머스는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의 관리인 겸 도버 성주를 1409년까지 맡았고, 왕실 시종장을 1404년까지 맡았으며, 서퍽의 프램링햄 성주라는 명예 지위를 얻었다. 여기에 왕실 의회에 자리를 잡고 풍부한 연금을 받았다. 1400년 1월 여러 귀족이 주현절에 헨리 4세와 자식들을 살해하고 리처드 2세를 복위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을 적발해, 두 명의 공모자 토머스 블라운트와 베네딕트 켈리를 옥스퍼드에서 처형하고 시신을 4등분으로 나눠서 전국 각지로 보냈다. 전승에 따르면, 블라운트는 사형집행인이 형벌을 준비하는 동안 토머스를 진장한 반역자이자 거짓말하는 기사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이후 토머스는 헨리 4세에게 리처드 2세를 죽이라고 조언했고, 리처드 2세는 1400년 2월 14일 요크셔 폰트프랙트 성에서 의문사했다.

헨리 4세는 토머스를 둘째 아들 랭커스터의 토머스의 수호자로 삼았고, 뒤이어 가터 기사단의 기사이자 잉글랜드 원수로 선임했다. 토머스는 추밀원의 의원으로 발탁되기도 했고, 헨리 4세의 여러 원정에 언제나 동행했으며,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에 임한 사절단에 속하기도 했다. 한편, 노퍽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쟁을 자기 선에서 중재했다. 그와 관련된 기사들 역시 왕실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헌스탄톤의 기사 존 스트레인지는 왕실 청지기에 발탁되었고, 건튼의 기사 로버트 건리는 대리 도버 성주가 되었고, 오버스트렌드의 기사 존 레인즈는 노리치 성주가 되었으며, 바닝햄의 존 윈터는 몬머스의 헨리 왕자 궁정의 청지기가 되었다. 또한 토머스는 헨리 4세의 사면을 받고 노리치 주교로 복직한 헨리 르 디스펜서를 제치고 노리치 일대를 실제로 통치했다.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하고 헨리 5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뒤에도, 토머스는 지위를 유지했다. 1415년, 그는 기사 2명, 종자 17명, 궁수 60명으로 구성된 선두 부대의 깃발 기사로서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 첫번째 전투인 아르플뢰르 공방전에 참여해 9월 22일 도시의 항복을 이끌어낸 협상을 주도했다. 같은 해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모든 장궁병의 지휘를 이끌어 잉글랜드군의 대승에 크게 기여했다. 전투가 끝난 뒤 칼레로 이동한 후 다른 잉글랜드 장군들이 왕과 함께 잉글랜드로 귀환했을 때, 그는 칼레에 남아서 이듬해 봄까지 프랑스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1416년 잉글랜드로 귀환한 토머스는 헨리 5세로부터 레싱엄 영지와 50마르크에 달하는 연금을 받았고, 프랑스로 파견되어 샤를 6세와 협상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1417년 노령으로 인해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1418 ~ 1419년 루앙 공방전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후 노퍽 소유지에서 말년을 보내던 그는 1428년 6월 27일에 노리치 성에서 사망했다.

토머스는 1389년 이전에 서퍽에 있는 크롭튼의 기사 윌리엄 크롭튼의 딸 조앤 크롭튼과 결혼했고, 1404년 기사 리처드 윌턴의 딸인 조앤 윌튼과 재혼했다. 두 결혼 모두 아이가 없었고, 그의 재산은 조카 윌리엄 펠립에게 넘어갔다. 그는 사망 당시 노퍽, 서퍽 및 에식스에 약 40개의 저택을 소유했다고 했다. 그의 유언장에는 노리치 대성당, 노퍽과 런던의 교회, 노리치 병원 두 곳, 이스트 앵글리아의 여러 수도원에 상당량의 재산을 기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