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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그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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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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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8b6c6> 셀주크 제국 초대 술탄
토그릴 1세
طغرل یکم
파일:Tugrul_bey.jpg
본명 아부 탈리브 마흐무드 토그릴 이븐 미카일
ابوطالب محمد تغریل بن میکائیل
출생 990년~995년 사이
사망 1063년 9월 4일 (향년 69~70세)
셀주크 제국 샤흐레레이
재위 셀주크 제국 술탄
1037년 ~ 1063년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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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호라산 정복2.2. 이란 석권2.3. 이라크 정복
2.3.1. vs 알 바사시리
2.4. 말년과 후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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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주크 제국 초대 술탄. 형제 차으르 베이와 함께 셀주크 제국을 건국했다.

2. 생애

990년에서 995년 사이에 크즐오르다, 사마르칸트, 부하라 일대의 중앙 아시아 스탭 지대에서 출생했다. 그의 조부 셀주크는 오우즈족 사이에서 이름을 떨치다가 오우즈족의 야브구(왕)와 갈등을 벌이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크즐오르다에 정착한 뒤 사만 왕조카라한 왕조 사이를 오가며 실익을 챙기다가 최종적으로 사만 왕조의 편을 들어 카라한 왕조를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서 몰아내고, 그 보답으로 사만 왕조에게 그 땅에 정착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셀주크는 네 아들 미카일, 아르슬란, 무사, 유누스를 두었는데, 그 중 미카일이 토그릴의 아버지다.

미카일이 일찍 사망한 후, 그와 형제 차으르는 할아버지 셀주크가 있는 잔드에서 자랐다. 1016년 이전에 형제 차으르와 함께 트란스옥시아나에 들어갔고, 트란스옥시아나와 호라즘 일대의 전쟁에 용병으로 고용되어 여러 전장을 전전하면서 전투 경험을 쌓았다. 1020년대에 일가 친척들과 함께 부하라의 카라한 왕조에 귀속되었고, 삼촌 아르슬란의 가신이 되었다. 1026년 가즈니 왕조술탄 마흐무드가 부하라를 공략하자, 그는 차으르와 함께 호라즘으로 피신했고 아르슬란은 호라산에 정착했다. 그러나 나중에 아르슬린이 마흐무드의 공세에 직면하여 사라흐 인근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 정착할 수 있게 해주면 그를 위해 싸우겠다고 제안했다가 얼마 안가 체포된 뒤 곧 사망했다.

이후 두 형제는 카라한 왕조에 충성을 계속 바쳤고, 1032년 다부시야 전투에서 카라한 왕조의 편에 서서 용맹을 떨쳤다. 하지만 카라한 왕조 통치자 알리 테긴이 사망한 후 후계자 자리를 놓고 내란이 벌어지자, 그들은 호라즘의 통치자 하룬의 봉신을 자처했다. 1035년 오구즈 통치자 샤 말르카가 하룬을 격파하자, 두 사람은 다시 사라흐로 이동하여 술탄 마흐무드의 뒤를 이어 가즈니 왕조를 이끌고 있던 마수드 1세에게 귀순을 받아달라고 청했다.

2.1. 호라산 정복

마수드 1세는 튀르크인들을 받아들이면 장차 화가 될 거라 여기고 벡토그디 휘하 병력을 파견하여 그들을 물리치게 했다. 두 사람은 가즈니군을 물리치고 나사와 파라하 디히스탄을 공략한 뒤 가즈니 왕조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다른 튀르크 부족으로부터 이 지역을 지키는 대가로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1037년, 토그릴과 차으르는 사라흐, 아비바르, 마르 일대를 추가로 공략했다. 이후 토그릴은 자신을 호라산의 술탄이라고 칭했다. 역사학계는 이 때를 셀주크 제국의 건국년도로 규정한다. 이후 1038년 헤라트 및 니샤푸르를 추가로 공략했다.

마수드 1세는 튀르크인의 침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1040년 5만에 달하는 군대와 코끼리 60마리를 이끌고 메르브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이에 토그릴과 차으르는 카라한 왕조의 왕자 파라무르츠와 함께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며 정면 대결을 회피했고, 경기병대가 종종 기즈니 왕조군의 보급로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기즈니 왕조군은 이러한 적의 유격 전술에 지칠대로 지쳤고, 근방의 수원지로 접근하지도 못해 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다 그들이 메르브 근방의 단다나칸 평원에 주둔했을 때, 튀르크 기병대 16,000명이 총공세를 가했다. 가즈니 왕조군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단다나칸 전투는 가즈니 왕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술탄 마수드 1세는 기병 수십명만 데리고 겨우 탈출한 뒤 북인도로 도피했으나, 전투의 책임을 알리 다야 등 여러 장군에게 떠넘겼다가 군대의 반발을 사 폐위된 뒤 1041년 1월에 피살되었다.이후 가즈니 왕조는 북인도에서 근근히 버티다 1152년 고르 왕조에게 멸망했다.

2.2. 이란 석권

가즈니 왕조를 결정적으로 꺾고 호라산의 지배권을 굳힌 토그릴은 1040년부터 1044년까지 이란 고원을 정복한 후 타바리스탄과 구르간을 정복하고 마르다비즈 이븐 비슈이를 타바리스탄과 구르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1042/43년, 그는 레이와 카즈빈을 공략하고 자이드파가 세운 데이람의 유스탄 왕조의 복종을 받아냈다. 뒤이어 샤미란의 살라리드 왕조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세력을 이란 서부와 메소포타미아까지 확장한 뒤, 그는 이란 서부와 메소포타미아를 본거지로 삼았고, 동생 차으르는 호라산을 맡았으며, 다른 친척들도 각지에 영지를 얻었다. 그들은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통치를 행사하면서도 그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쿠트바(금요일 기도) 설교에서 자신들의 이름보다 그의 이름을 먼저 언급했다.

1048년, 토그릴은 분열되던 부와이 왕조에게서 케르만을 얻었다. 1053년에는 파르스의 부와이 왕공이 복속하였다. 1054년, 토그릴은 아제르바이잔의 라와디 아부 만수드 와수단을 굴복시키고, 와수단의 아들 아부 알 하이자 마누치르를 인질로 삼아 호라산에 보냈다. 한편, 그의 분견대는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가 동로마 제국 현지 부대를 격파하고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2.3. 이라크 정복

이 무렵, 아바스 왕조 칼리파가 자리잡은 바그다드를 지배하고 있던 부와이 왕조는 잘랄 알 다울라와 아부 칼리자르의 내전으로 혼란에 빠졌다. 바그다드 역시 두 사람을 따르는 이들 사이의 분쟁으로 매일 혼란이 일어났다. 칼리파 알 카임은 두 사람의 화해를 촉구했고 법학자 알 마와르디를 칼리자르에게 보내 평화 협약을 맺으라고 권고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1044년 잘랄이 사망한 뒤 칼리자르가 잘랄의 후계자 알 말리크를 무너뜨리면서 이라크와 바그다드는 안정을 되찾는듯 했으나, 1048년 칼리자르가 사망한 뒤 칼리자르의 아들들끼리 내전을 벌이면서 혼란은 극에 달했다. 그는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바그다드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1055년 12월, 토그릴은 메카 순례를 핑계로 중무장 병력을 이끌고 이라크로 이동한 뒤 알 카임에게 자신은 바그다드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온 것이며 칼리파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테니 바그다드에 입성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부와이 왕조의 거듭된 내전에 질릴 대로 질려 있던 알 카임은 반색하며 금요일 기도에서 토그릴을 술탄으로 인정하고 바그다드 입성을 허락했다. 며칠 후, 토그릴은 바그다드에 입성한 뒤 바그다드의 치안을 바로잡고 칼리파와 관료들에게 공손하게 대했다. 이에 칼리파와 궁정 관료들, 그리고 민중은 토그릴을 호평했다. 토그릴은 순례 후 쉬아 칼리파 세력인 파티마 조와 일전을 벌일 것을 약속했다.

다만 불과 일주일만에 바그다드 주민들은 대도시의 번성함에 눈이 뒤집힌 튀르크 병사들의 약탈에 질려 토그릴에 복속한 부와이 아미르 알 말리크 알 라힘에게 그들의 축출을 청했다. 이러한 기류를 파악한 토그릴은 관련된 논의를 하자며 알 라힘을 군영으로 소환했고, 그가 당도하자 칼리파의 만류에도 셀주크 군대에 대한 반항을 이유로 체포하였다. 이후 알 라힘은 레이 (라이)에 투옥되어 1058 혹은 1059년에 옥사했다. 이로써 부와이 조는 멸망하고 이라크는 셀주크령이 되었다.

2.3.1. vs 알 바사시리

한편, 부와이 왕조 휘하 튀르크인 장군으로서 바그다드를 지키고 있다가 토그릴을 피해 라흐바로 도주했던 아불 하리스 아르슬란 알 무자파르 알 바사시리는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에 복속한[1] 뒤 파티마 왕조의 지원을 받아내고 이라크의 베두인 족장 두바이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튀르크 용병대를 대거 고용해 바그다드를 탈환할 기회를 노렸다. 1057년 초엽 이라크로 진군한 바사시리는 신자르에서 쿠탈미쉬 휘하 셀주크 군을 격파한 후 모술에 입성하여 알 무스탄시르 명의로 금요 예배를 행했다. 이에 토그릴이 반격에 나서 바사시리를 격파, 모술을 수복하고 신자르를 초토화했다. 라흐바로 귀환한 알 바사시리는 다시 반격할 때를 노렸다.[2]

1058년 초엽, 알 무아야드는 토그릴의 형제 이브라힘 이날에게 연락해 파티마 칼리파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그의 찬탈을 돕기로 하였다. 이에 이날은 모술을 알 바사시리에게 넘겼고, 후자는 시타델의 셀주크 수비대를 4개월간 포위한 끝에 항복시키며 모술을 재점령했다. 다만 얼마후 그는 라흐바로 철수했고, 토그릴은 손쉽게 모술을 회복했다. 이후 토그릴이 누사이빈으로 진군하자 알 바사시리는 파티마령 다마스쿠스로 철수했다. 그 무렵, 토그릴의 원정을 틈타 이날이 지발에서 거병하여 토그릴이 진압에 나서자 알 바사시리는 이라크로 돌아와 히트안바르를 점령했다. 뒤이어 바그다드로 진격해 1058년 12월 27일, 쿠라이쉬 휘하 4백의 맘루크 기병대 및 자신 직속의 2백 튀르크 기병대와 함께 티그리스강 서안의 시가지를 장악했다.

뒤이은 금요일인 1059년 1월 1일, 쉬아세가 강한 바그다드 서부에서 알 무스탄시르 명의의 쉬아 예배가 거행되었다. 1월 8일에 알 바사시리는 강을 건너 동안의 시가지도 장악한 후, 역사상 처음으로 바그다드 대사원에서 쉬아 칼리파의 명의로 금요 예배를 드렸다.[3] 한세기에 이른 부와이 조의 지배 하에서도 겪지 못한 전대미문의 사건에 수니파 주민들이 반발하여 봉기했고, 1월 19일 군중이 하시니 궁을 습격하자 압바스 칼리파 알 카임이 일가와 함께 쿠라이쉬 군영에 피신했다. 이에 알 바사시리는 쿠라아쉬에게 (협상용 카드인) 칼리파의 보호를 맡기고 그를 바그다드와 라흐바 사이에 있는 아나에 유폐하게 하였다. 1월 29일, 알 바사시리는 대사원 밖의 무살라 (예배당)에 파티마 조의 깃발을 올리고 이둘 아드하 (희생제)를 기념했다. 2월 16일에는 기존에 자신을 적대하던 칼리파의 재상 이븐 알 무슬리마를 저자에 조리돌림한 후 처형하였다.

이후 군사 활동을 재개한 알 바사시리는 와시트바스라를 정복하며 순식간에 이라크 대부분을 석권했다. 다만 뒤이어 벌인 후제스탄 침공은 그 총독 하자라스프 빈 반키르에게 격퇴되었고, 후자는 두바이스를 통해 협상에 나서며 연공 납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알 바사시리는 파티마 칼리파 명의로 쿠트바 및 동전 주조를 요구했고, 하자라스프는 거부했다. 그럼에도 하자라스프가 토그릴의 지원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알 바사시리는 아무 조건 없이 그와 휴전을 맺고 9월에 와시트로 철수했다. 한편 그해 7월 이날의 난을 진압한 토그릴은 알 바사시리에게 압바스 칼리파의 석방 및 그의 명의로 쿠트바와 동전 주조를 하는 (사실상의 복속) 대가로 바그다드 지배권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알 바사시리는 알 카임에게 토그릴 대신 자신을 보호자로 인정하게 협박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쿠라이쉬는 그냥 토그릴의 제안을 수용하자고 설득했으나 알 바사시리는 거부했다.

토그릴은 우선 쿠라이쉬를 회유해 칼리파 알 카임을 빼내었다. 뒤이어 바그다드로 진격하자 알 바사시리는 처자식과 함께 빠져나갔다. (1059년 12월) 이듬해 1월 4일, 토그릴은 알 카임과 함께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이로써 파티마 칼리파 명의의 금요 예배가 40번이나 진행된 끝에 압바스 칼리파 명의의 쿠트바가 회복되었다. 이후 토그릴은 재상 알 쿤다리에게 알 바사시리가 도주한 쿠파를 토벌하게 하였다. 1060년 1월 15일, 알 쿤다리는 쿠파 인근의 사키 알 푸라트 전투에서 알 바사시리와 두바이스 연합군을 격파했다. 패색이 짙어지자 두바이스는 도주했지만 알 바사시리는 계속 싸우다가 전사했다.[4] 그의 수급은 바그다드의 토그릴에게 보내졌다. 이로써 토그릴은 이라크 전역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 후 토그릴은 알 카임의 딸 사야다 카툰과 결혼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알 카임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셀주크 술탄을 거슬렀다가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 결국 받아들였다. 토그릴은 바그다드에 거주하면서 이전과는 달리 칼리파에게 고압적으로 대했다. 또한 종교 문제에도 간섭을 많이 했기 때문에, 셀주크 제국과 아바스 칼리파 궁정과의 사이는 경직되었다.

2.4. 말년과 후계

토그릴은 생전에 알툰 잔 카툰, 아카 카툰, 사야다 카툰과 결혼했지만 자식을 얻지 못했다. 이에 동생 차으르의 아들 쉴레이만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레이의 총독 알쿤두리를 섭정으로 삼은 뒤 1063년 9월 4일 레이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차으르의 장자로서 호라산을 통치하던 알프 아르슬란이 셀주크 왕조의 전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고, 결국 쉴레이만을 굴복시키고 술탄 직위에 올랐다. 이에 아르슬란의 아들 쿠탈므시가 반발했으나 1064년 알프 아르슬란에게 제압되었다. 그리하여 셀주크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알프 아르슬란은 토그릴을 능가하는 정복 전쟁을 단행한다.

3. 여담

파일:attachment/투르크멘 마나트/turkmanat201.jpg
투르크메니스탄 1마나트 지폐의 인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크루세이더 킹즈에서는 토그릴과 차그릴의 아버지 미카일이 룸술탄국의 분가의 아버지인 아르슬란보다 동생으로 나온다. 유럽식 본가로는 오히려 룸 술탄국이 앞서게 된다.


[1] 우선 알 무스탄시르에게 카이로로 향해 알현할 것과 시리아에서 셀주크 조를 막을 역할을 청했다. 파티마 조의 재상 알 야주리는 두 요청 중 후자만 수용, 그를 라흐바 총독에 봉했다. 알 무스탄시르는 다이 (선교사) 알 무아야드를 통해 50만 디나르 금화 및 그 상당의 의복, 활 1만개, 검 1천개, 말 5백필, 다수의 창과 화살을 보냈다. 알 무아야드가 라흐바에 당도하자 마즈야드 왕조의 두바이스와 우카일 왕조의 쿠라이쉬 등 현지 아미르들이 파티마 조에 복속해왔다.[2] 패전 후 두바이스와 쿠라이쉬는 셀주크 측에 재차 충성하려 했지만 반아랍 기류로 거절당하자 알 바사시리에게로 돌아갔다[3] 동시에 압바스 칼리파의 인장, 터번 (민딜), 망토 (리바), 격자 가림막 (십박) 등을 얻었다[4] 먼저 그의 말이 화살을 맞아 쓰러졌고, 셀주크 재상 알 쿤두리의 하인이 그를 죽였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