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슨 패밀리
테이트 - 라비앙카 살인사건 Tate - Labianca murders | |||
범행장소 | 테이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10050 씨엘로 드라이브 | |
라비앙카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3301 웨이버리 드라이브 | ||
범행날짜 | 테이트 | 1969년 8월 9일 | |
라비앙카 | 1969년 8월 10일 | ||
범행유형 | 대량살인, 강도살인 | ||
피해자 | 테이트 | 샤론 테이트 아비게일 폴거 보이치에흐 프리코프스키 스티븐 파렌트 제이 세브링 | |
라비앙카 | 레노 라비앙카 로즈마리 라비앙카 | ||
가해자 | 테이트 | 찰스 맨슨 수잔 앳킨스 찰스 텍스 왓슨 패트리샤 크렌빈켈 린다 카사비앙[1] | |
라비앙카 | 찰스 맨슨 수잔 앳킨스 찰스 텍스 왓슨 레슬리 반 휴튼 패트리샤 크렌빈켈 | ||
형량 | 린다 카사비앙을 제외한 전원 사형→무기징역[2] |
[clearfix]
1. 개요
히피 문화가 절정이던 1969년에 찰스 맨슨의 사주를 받은 맨슨 패밀리 멤버들이 폴란스키 감독의 자택에 처들어가 당시 현장에 있던 여배우 샤론 테이트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한 후 이튿날 라비앙카 부부까지 연속으로 살해한 사건. 이 중 테이트 살인 사건은 폴란스키가 살인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다.
피해자들의 유명세, 범인들의 특이성과 사건의 잔혹성, 그리고 당시 LA의 헐리웃 문화, 히피 문화, 마약 문화 등 60~70년대 문화적 코드가 깊게 얽혀 있는 배경으로 인해 미국 범죄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2. 상세
히피 집단 맨슨 패밀리의 우두머리인 찰스 맨슨은 오래 전 부터 가수가 되고 싶어했고 알고 지내던 비치 보이스의 데니스 윌슨의 소개를 받아 유명 음반 제작자 테리 멜처[3]를 찾아가 자신의 음악을 발매해 달라고 부탁했다. 테리 멜처는 처음에는 관심을 보였다고 하지만 결국 음반 프로젝트는 무산되고 멜처와 윌슨이 자신과 연을 끊어버리자 맨슨은 이에 분노했다.맨슨은 테리 멜처의 집주소를 알고 있었고 자신의 열렬한 추종자 4명(수잔 앳킨스, 린다 카사비앙, 찰스 텍스 왓슨, 패트리샤 크렌빈켈)에게 그 곳을 습격해서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테리 멜처는 이미 이사를 나간 뒤였고 그곳에는 폴란드 출신의 영화 감독 로만 폴란스키와 아내인 여배우 샤론 테이트가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세간에는 멜처가 이사간 것을 모르고 오인살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맨슨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각 관계자들의 증언이 다르기 때문에 테이트 살인사건의 정확한 동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4]
사건 현장이었던 10050 Cielo Drive 저택 |
1969년 8월 9일 LSD를 복용한 4명의 맨슨 패밀리는 차를 몰고 10050 Cielo Drive의 저택을 찾아갔다. 당시 폴란스키 감독은 영화 촬영으로 부재 중이었고 만삭인 아내 샤론 테이트가 지인들을 초대해 함께 지내고 있었다. 습격 전 찰스 텍스 왓슨은 린다 카사비앙에게 차에 홀로 남아 있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린다는 추후에 처벌을 피했다.
맨슨 일당은 먼저 앞마당에서 차에 타고 있던 10대 소년 스티븐 파렌트[5]를 칼질과 권총 4방으로 살해한다. 위 희생자 사진 속 3번째 안경 쓴 인물로 폴란스키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당시 저택의 관리인으로 일하던 친구 윌리엄 개럿슨[6]을 만나고 돌아가던 길에 재수없게 살해당한 인물이다. 저택 앞에 주차된 자신의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저택에 침입을 시도하던 찰스 텍스 왓슨이 쏜 총 4방에 영문도 모르고 사망했다. 참고로 개럿슨은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로 본채가 아닌 별채에 있다가 살아남았다. 하루 종일 음악을 들었던 덕분에 경찰이 오기 전까지는 살인사건이 일어난 줄도 몰랐다. 별채에서 자고 있다가 다음날 아침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뒤 자신이 끔찍한 범죄의 희생양이 될 뻔한 사실을 알았고 이 사건의 트라우마로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다.[7] 이후 저택 안으로 침입해 사람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차례차례 살해했다.
테이트의 전 애인이자 유명 헤어 디자이너였던 제이 세브링은 범인들이 임산부인 테이트를 줄로 묶는 것에 항의하다가 총을 맞고 칼로 7회 난도질 당해 살해당한다. 사교계 명사였던 애비게일 폴저[8]와 그의 애인 프라이코스키[9]는 기회를 틈타 앞마당과 수영장으로 도망치지만 텍스 왓슨과 크레빈켈에 의해 따라잡혀 살해당했다. 프라이코스키는 총기 개머리판으로 13회 가격당한 후 칼로 51번을 찔렸고 폴저는 총 28회 찔려 살해당했다.
샤론 테이트는 임신 8개월 차였는데 '살고 싶다, 아기를 낳고 싶다'고 애원했으며 최후의 순간에는 뱃속의 아기만이라도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앳킨스는 테이트에게 '야 이 썅년아, 난 네 사정 신경 안 써'.[원문]라고 말한 뒤 칼로 16회를 찔러 잔혹하게 살해한 후 시체를 세브링의 것과 함께 줄로 묶어 거실에 매달아 두었다.[11] 이후 뭔가 상징적인 문구를 남겨오라는 찰스 맨슨의 지시에 따라 테이트의 피로 벽에 pig라는 낙서를 했다.
피해자 라비앙카 부부와 현장에서 발견된 피로쓴 낙서 |
다음날까지 흥분이 가시지 않은 맨슨 일당들은 약에 취한 상태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두 번째 범행을 저질렀는데 이번에는 찰스 맨슨 본인과 레슬리 반 휴튼도 적극 가담했다. 피해자는 식료품 도매업 사업을 하던 중년의 부부 레노 라비앙카와 로즈마리 라비앙카로, 자택에서 손이 묶인 채 칼과 총검으로 수십차례 찔려 살해당했다. 이 때 피해자의 몸과 벽면에 피로 여러 문구를 새겼는데 그 중 헬터 스켈터[12]가 맨슨 패밀리의 상징적인 문구로 알려졌다.
3. 체포
당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던 여배우가, 그것도 만삭인 상태로 무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미국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다음날 테이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부터 가까운 거리에서 라비앙카 부부가 살해당한 현장까지 발견되자 당국은 심상치 않은 사건임을 깨닫고 대대적인 조사에 나섰다. 살인사건에 가담한 맨슨 일당이 체포된 경위가 상당히 황당한데 사건 발생 이후 몇 일 안된 시점에서 60명 정도 되는 맨슨 패밀리 일원 중 24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산림 경비대의 불도저를 훔치고 방화한 사건으로 줄줄이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수잔 앳킨스도 이 중 하나였으며 이 과정에서 다른 맨슨 패밀리 멤버가 수잔 앳킨스를 테이트-라비앙카 살인사건이 아닌 개리 힌먼 살인 사건에 연루시켜 앳킨스는 기소 당하게 된다.개리 힌먼 사건 때문에 기소되어 감옥에 있는 동안 앳킨스는 버지니아 그레이엄, 로니 하워드라는 두 명의 중년 범죄자들과 친해지게 되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이 두명에게 자신이 테이트-라비앙카 살인 사건에 가담했다고 고백 해버린다. 버지니아와 로니는 앳킨스의 진술을 당국에 보고하게 되고 이것이 다른 출처들의 진술들과 결합되어 앳킨스는 물론 테이트-라비앙카 사건에 직접 가담한 다른 맨슨 패밀리 일원들도 줄줄이 체포된다. 참고로 버지니아 그레이엄과 로니 하워드는 폴란스키 가 살인사건을 해결한 대가로 25,000달러의 보상금을 받게된다.
▲ 호송되는 맨슨걸즈[13] |
이후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법정 증언을 대가로 기소 면제 처분을 받은 린다 카사비앙을 제외한 사건에 가담한 인물 전원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주에서 바로 다음 해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바람에 이들은 모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 결과 찰스 맨슨과 수잔 앳킨스는 옥사했고 찰스 텍스 왓슨, 패트리샤 크렌빈켈은 아직까지 옥살이 중이며 레슬리 반 휴튼은 2024년에 가석방될 때까지 무려 53년간 옥살이를 했다.
4. 여담
- 본래 범행 대상이었다가 우연히 화를 피한 테리 멜처 역시 엄청난 충격을 받아 한동안 은둔했으며 경호원을 고용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관련 증언대에 서는 것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 사실 폴란스키 부부는 이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집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진짜 집주인은 <로미오와 줄리엣>(1968)으로 유명한 올리비아 허시의 에이전트였던 루디 앨터벨리였고 앨터벨리가 갖고 있던 집 여러 채 중 하나를 잠시 빌렸던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사건 발생 불과 5주 뒤부터 올리비아가 이 저택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집에 아직도 샤론 테이트의 주황색 스카프가 남아 있길래 몇 년 동안 기도용 탁자 위에 올려놨다고 한다.
- 원래 샤론 테이트와의 모임에 스티브 맥퀸도 참석할 예정이었다고 하지만 맥퀸이 모임에 참석하기 전 다른 여자를 만났고 이 여자와 같이 있기로 결정하면서 참극을 피했다. 심지어 경찰이 조사 중 찰스 맨슨 일당의 암살 목표 리스트를 발견했는데 이 리스트에 맥퀸의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맥퀸의 전 부인에 따르면 이 사건 이후 맥퀸은 죽을 때까지 항상 매그넘 권총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 맨슨 패밀리는 자신들이 죽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몰랐으나 그들이 유명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 주목받을 수 있게 됐다며 기뻐하는 싸이코의 모습을 보여줬다.
5. 대중매체에서
-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크랭크인할 때 폴란스키 가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라고 알려져 테이트의 비극을 이용한다는 논란이 불거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맨슨과 맨슨 일당들이 나오긴 하지만 맨슨의 비중은 거의 없다시피할 정도이며 주된 스토리도 아닌 데다 결말에 가서는 현실에서 일어난 비극을 완전히 비틀었다.
[1] 현장에 있었으나 사건 직전 마음을 바꿔 살인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맨슨 패밀리는 테이트 - 라비앙카 살인 이후 배우 '살라딘 네이더(Saladin Nader)'를 살해할 계획을 추가적으로 세웠으나 마음을 바꾼 카사비앙이 의도적으로 아파트 위치를 잘못 불러 계획이 중단되었다. 살라딘 네이더는 히치하이킹한 린다 카사비앙과 원나잇 스탠드를 즐겼는데 교주 찰스 맨슨은 이를 못마땅해했다고 한다.[2]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형제도 폐지[3] Terry Melcher. 당대의 유명 여배우 도리스 데이의 외동아들이었다.[4] 유명세를 얻기 위해, 맨슨이 헬터 스켈터라고 명명한 인종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테리 멜처를 겁줘서 협박하기 위해 그랬다는 설이 유력하다.[5] 1951.2.12-1969.8.9[6] 1949.8.24-2016.8.16[7] 천운으로 별채와 본채의 거리가 꽤 되고 전에 살던 테리 멜처는 별채를 작업실로 사용해서 벽에 방음처리를 해 둔 덕에 노랫소리가 본채의 맨슨 패밀리들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사건 발생일인 1969년 8월 9일은 훗날 그해 가장 무덥고 불쾌지수도 가장 높은 날로 기록된다. 그러나 윌리엄 개럿슨은 당시 임신 8개월 차에 임신 우울증을 앓고 있던 샤론 테이트가 별채의 시끄러운 음악소리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을 염려해 아무리 더워도 끝내 창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범인으로 오해받아 끌려 나왔을 때 그는 상의 탈의 상태였다. 결국 타인을 배려한 행동이 자신의 목숨을 구한 셈이다.[8] 미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이었고 미국 인스턴트 커피 브랜드의 대명사였던 폴저 커피사의 상속녀였다. 그녀의 증조부 J. A. Folger가 세운 회사다. 그녀의 사후 두 살 어린 남동생 피터 폴거 주니어가 누나 몫까지 회사를 물려받았다. 현재 폴저사는 스타벅스, 네스카페에 밀려서 나름 유명한 커피 체인 정도로 전락했다.[9] 폴란드인 소설가[원문] Look, bitch. I don't care about you.[11] 부검에 따르면 테이트는 매달릴 당시 목숨이 붙어있었으며 사망 원인은 과다출혈이라고 한다.[12] Helter Skelter. 찰스 맨슨이 주장하던 인종 전쟁을 통한 세계 종말 시나리오의 명칭이다.[13] 좌측부터 패트리샤 크렌빈켈, 레슬리 반 휴튼, 수잔 앳킨스.[14] 18은 해당 사건에 가담한 맨슨 추종자들의 수, 7은 테이트 - 라비앙카 사건의 희생자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