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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21:55:18

타이라노 노리츠네

다이라노 노리츠네에서 넘어옴
平教経

1160년 ~ 1184년 2월 7일[1](또는 1185년 4월 25일[2])[3]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했던 헤이케측 무장이다.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동생 노리모리(敎盛)의 차남으로 손윗형은 미치모리(通盛)이고, 처음 이름은 구니모리(國盛)였으며 노리쓰네라는 이름은 나중에 바꾼 것이다.

노토노카미(能登守, 노토 태수) 관직을 지냈기에 《헤이케 이야기》에는 '노토노카미 노리쓰네'라고 나오며, 당대 구교들의 일기 기록에는 수많은 전투에서 무공을 쌓아 여러 전투에서 단 한 번의 불찰도 없었던(たびたびの合戦で一度の不覚も取ったことはない) 무장으로 "왕성에서 으뜸가는 강궁의 정병(王城一の強弓精兵)"으로 불렸고, 헤이케 이야기 안에서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라이벌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다만 둘은 단노우라 전투 때를 빼고는, 아니 단노우라 전투에서조차 직접 얼굴 맞대고 싸운 적은 별로 없다.

1. 생애

1.1. 공식 기록

《헤이케 이야기》에는 겐지의 거병 이후 기소 요시나카가 주에이(壽永) 2년(1183년) 5월에 구리카라(俱利伽羅) 고개와 시노하라(篠原)에서 헤이케군을 패배시켰을 때 형 미치모리와 함께 2천여 기를 이끌고 우지 강의 다리 경비를 맡았고, 결국 그 해 7월에 헤이케가 교토를 떠나 그들의 세력 기반이 있던 사이고쿠(西國)로 내려갈 때 노리츠네도 일문과 함께 서쪽으로 향했다.

이후로 《헤이케 이야기》에서 대부분의 헤이케 인사들의 활약은 이 사람의 비중이 적잖게 나오는데, 수도를 잃고 서쪽으로 향한 헤이케를 요시나카가 추격해 윤10월에 사누키(讚岐)의 야시마(屋島)에 있던 헤이케 본영으로 아시카가 요시키요(足利義清)를 대장으로 하는 군을 보냈고, 이들이 빗추(備中) 미즈시마(水島)에서 항해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노리츠네가 헤이케의 부장군으로서 요격에 나섰다. 이때 1천여 척의 배를 모아 밧줄로 이어 맞추고 판자를 잇대어 평평하게 한 다음 말을 타고 판자 위를 건넌다는 전법으로 요시키요의 군영으로 쳐들어갔는데, 노리츠네는 이 전투에서 선두로 분전해 겐지측의 우미노 유키히로(海野幸廣)를 죽였고, 대장 아시카가 요시키요도 자신이 탄 배를 스스로 가라앉혀 자결함으로써 헤이케가 승리, 요시나카의 헤이케 추토는 좌절되었다.

기소 요시나카는 교토에서 신망을 잃고 고시라카와인과도 대립하게 되는데, 주에이 3년(1184년) 정월에 가마쿠라(鎌倉)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보낸 미나모토노 노리요리(源範頼)나 요시츠네의 공격으로 패하고 교토를 떠나 도망치던 끝에 전사하였다. 헤이케는 겐지들끼리 항쟁을 벌이는 사이에 조금씩 세력을 회복해 예전 키요모리가 거점으로 삼았던 후쿠하라(福原)까지 진출했지만, 헤이케의 사정도 낫다고 할 수는 없어서 전통적으로 헤이케의 세력 거점이던 서쪽에서조차 반헤이케 움직임이 잇따랐고, 이들을 진압하러 노리츠네가 자주 나섰다.

헤이케가 점령하고 있던 시코쿠에서 먼저 아와(阿波)나 사누키의 재청관인들이 겐지측와 내통해서, 당시 비젠(備前) 시모쓰이(下津井)에 있던 다이라노 노리모리와 미치모리 - 노리츠네 형제, 이렇게 삼부자의 진에 병선 10여 척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격노한 노리츠네는 "어제까지 우리가 타는 말의 꼴이나 베던 것들이 이제 와서 우리를 배신하려 들어? 거기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가서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라며 작은 배 10척으로 출격해 이들을 간단히 쳐부수고, 아와지(淡路)의 후쿠라(福良) 항으로 달아난 사누키 반군의 잔당들을 쳐부수었다. 이때 사누키 반군은 후쿠라에서 겐지측의 미나모토노 요시츠구(源義嗣)ㆍ요시히사(義久) 형제[4]를 대장으로 삼고 성을 쌓아 맞서려 했지만 노리츠네는 이마저도 격파해, 미나모토노 요시츠구는 전사, 요시히사는 크게 부상을 입고 생포된지 얼마 안 되어 자결했다. 나머지 반역한 130여 명을 노리츠네는 본인이 선포한 말 그대로 모조리 처형한 뒤, 추격군의 명부를 작성해 상부에 올렸다.

이후 이요(伊予)의 호족인 고노 미치노부(河野通信)가 겐지와 밀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헤이케는 미치모리, 노리츠네 형제에게 이를 치게 했다. 미치노부는 아키(安藝)에 있던 외삼촌 누마타 지로(沼田次郞)와 합류해 누마타 성을 쌓고 농성을 벌였지만, 야시마를 출발한 노리쓰네의 맹렬한 공격에 누마타 지로는 항복, 미치노부는 쫓겨나 홀로 이요로 달아났다.

앞서 노리츠네에게 한번 진압되었던 아와지에서는 다시 아마노 다다카게(安摩忠景)가 헤이케에 반기를 들어 큰 배 두 척에 자금과 무기를 싣고 교토로 향하려 했는데, 노리츠네가 작은 배 열 척으로 추격해 격파하고 다다카게를 이즈미(和泉)로 쫓아내 버리고, 기이(紀伊) 사람인 소노베 다다야스(園邊忠康)가 다다카게를 도와 맞섰으나 노리츠네는 이마저도 쳐부수고 2백 명 남짓을 베었다. 아마노 다다카게와 소노베 다다야스는 간신히 수도로 달아났다.

앞서 노리츠네에게 패한 고노 미치노부가 분고(豊後)의 우스키 고레타카(臼杵惟隆), 오가타 고레요시(緒方惟義) 형제와 합류해 2천여 명을 거느리고 비젠으로 건너가 이마키(今木) 성에 칩거하자, 노리츠네는 2천여 기를 거느리고 이를 포위, 거듭 후쿠하라로부터 원군 수천 기를 얻어 이마키 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난을 일으킨 세 사람 즉 우스키 고레타카, 오고타 고레요시, 고노 미치노부 세 사람은 이번에도 패하고 달아났다.

노리츠네가 헤이케 세력 안에서의 반란 움직임을 여섯 차례나 제압하고 다니는 사이에, 동쪽에서는 요시나카가 죽고 세를 수습한 겐지가 후쿠하라를 쳐들어왔다. 다이라노 노리츠네는 형 미치모리와 함께 1만 기를 거느리고 후쿠하라 인근 히요도리고에(鵯越)[5]의 높은 지대를 지켰다. 이때 형 미치모리가 자신의 아내를 불러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자 "여기는 내가 와야 할 정도의 위험한 전장인데, 지금 팔자 좋게 작별 인사 나누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헤이케 이야기).

하지만 결국 2월 7일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귀신 같은 기습으로(이치노타니 전투) 헤이케는 제대로 치명적인 대패를 당했고 일문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다이라노 미치모리도 이치노타니에서 전사했다.

이치노타니 전투를 기점으로 다이라노 노리츠네에 대한 기록은 공식 기록과 야사가 서로 엇갈린다. 공식 기록을 따른다면 다이라노 노리츠네 역시 형 미치모리와 함께 이 전투에서 죽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는 이 전투에서 가마쿠라의 고케닌 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가 이끄는 군에 죽었다고 기록했으며, 2월 13일에 그 수급이 죽은 다른 헤이케 일문 사람들의 수급과 함께 교토로 보내졌다고 적었다. 이후 일관되게 단노우라 전투에서도 헤이케측 전사자나 포로 명부에도 다이라노 노리츠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등, 공식 역사서에서 다이라노 노리츠네는 죽은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 직후부터 노리츠네의 생존설이 나돌았다는 것이다. 당시의 구교인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인 《교쿠요》에는 이때 교토에 효수된 사람들 가운데 노리츠네만큼은 "죽지 않고 달아났다"는 풍문이 있음을 증언하고 있으며, 《다이고 잡사기》에는 "노리츠네가 단노우라 전투에서 자결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왕성 제일의 강궁 정병'이라 불렸던 노리츠네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을 리 없다는 심리에서였는지는 몰라도, 다이라노 노리츠네는 공식 역사서의 기록과는 달리 죽지 않고 도망쳐서 헤이케군을 거느리고 겐지와 싸웠다는 전승이 오래도록 돌아다녔다. 어찌 생각하면 요시츠네에 관해 돌아다니는 생존설의 원조가 다이라노 노리츠네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1.2. 《헤이케 이야기》의 전승

《헤이케 이야기》에는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한 번도 도망친 적이 없는 명장이었건만, 이번 전투에서는 어쩐 일인지 허망하게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고 쓰고, 야시마 전투에서 다시 싸우러 나선 다이라노 노리츠네의 모습이 그려진다. 겐랴쿠(元曆) 2년(1185년) 2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헤이케의 본영이 있던 야시마에 기습을 감행했다. 헤이케는 야시마를 버리고 배로 도망갔지만, 예상과는 달리 요시쓰네가 적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음을 찰지하면서 반격에 나서서 양측이 서로 격렬히 화살을 날려댔고, 이 전투에서 노리츠네는 "해상전은 복장이 간편해야 한다"며 갑옷의 히타타레(直垂)를 입지 않고 가벼운 차림으로 활을 쏘아서 족족 명중시켰다.

이 싸움에서 요시츠네의 휘하 10기도 노리츠네에게 전사했고, 오슈(奥州) 히라이즈미(平泉)에서 요시츠네를 따라와서 겐페이 전쟁에 참전한 사토 츠구노부(佐藤継信) 역시 노리츠네가 쏜 화살에 왼쪽 어깨를 맞아 얼마 뒤 숨을 거두었다. 헤이케 이야기에는 츠구노부가 화살에 맞아 쓰러지자 노리츠네의 시동으로 일찍이 다이라노 미치모리를 섬기던 18세의 기쿠오마루(菊王丸)가 그의 목을 베러 달려오는 것을 츠구노부의 동생 다다노부(忠信)가 활로 쏘아 죽였는데, 노리츠네는 기쿠오마루의 죽음을 애도하며 싸움을 그만두고 물러나 버렸다.

이후 다이라노 노리츠네의 헤이케 군세는 야시마를 버린 채 사촌형 다이라노 토모모리(平知盛)가 지키고 있던 나가토(長門)의 히코시마(彦島)로 피했고, 요시츠네는 수군을 짜서 히코시마로 밀고 들어왔다. 이미 배후지대인 규슈가 노리요리에게 제압된 상황이었고, 헤이케에게 물러날 길은 없었다.

3월 25일, 헤이케와 겐지는 마지막 싸움이 될 단노우라 전투를 벌였다. 초반에는 수전에 익숙한 헤이케가 우세했지만, 요시쓰네의 헤이케측 뱃사공, 조타수를 쏘아 맞히는 전략과 아와 수군의 배반, 그리고 조수의 흐름이 바뀌면서 헤이케의 패배는 결정되었다.

《헤이케 이야기》의 '노리츠네의 최후'(敎經最期)라는 대목을 두어 다이라노 노리츠네의 죽음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조수의 흐름이 바뀌고 헤이케의 패배가 결정된 판에, 니이노 아마(二位尼)와 안토쿠 덴노(安徳天皇) 등을 비롯한 헤이케 일문의 사람들이 차례대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와중에도 노리츠네는 혼자서 활을 쏘며 겐지측 무사들을 죽이고, 화살이 떨어지자 큰 칼과 작은 칼을 양 손에 잡고 상대를 마구 베고 다녔다. 이를 본 다이라노 토모모리가 사람을 시켜 "이제 결판이 다 난 싸움인데 네 수준에 안 맞는 잡졸들 뭐하러 부질없이 살생을 하느냐"라고 타이르자, 그럼 적의 최고 대장과 서로 찔러 죽겠다며 다이라노 노리츠네는 배와 배를 옮겨 다니면서 적들을 헤치고 요시츠네를 찾아 다녔다. 마침내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타고 있는 배를 찾아내고는 다이라노 노리츠네도 뜀박질로 이동하여 그를 잡으려 했지만, 요시츠네는 노리츠네를 피해 그가 뛰어오른 순간 자신의 배에서 여덟 척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배로 뛰어가 버렸다. 이것이 유명한 요시쓰네의 팔척뛰기(八艘飛び, 야소우토비)이다.[6]

눈앞에서 요시츠네를 놓쳐 버리고, 더 이상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낀 노리츠네는 그 자리에서 칼을 집어던지고 투구도 벗고서 뱃전에 서서 "자, 공을 세우고 싶은 놈이 있으면 누구든 와서 이 노리츠네를 잡아 보거라.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 가서 한 마디 해줘야 되겠다!"라고 크게 외쳤다. 인왕(仁王)과 같은 노리츠네의 모습에 질려 나서는 자가 없었는데, 성인 남자 서른 명과도 맞설 힘을 지닌 장사로 알려져 있던 도사(土佐) 사람 아키노 타로(安芸太郞) 사네미쓰(実光)와 아키노 지로(安芸次郞) 형제, 그리고 마찬가지로 힘이 센 장사로 알려진 그들의 노토가 노리츠네를 생포해서 공을 세우고자 셋이서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다이라노 노리츠네는 눈깜짝할 사이에 노토를 먼저 걷어차서 바다로 떨어뜨리고, 아키노 타로, 지로 형제를 좌우 겨드랑이에 끼고 단단히 조인 채 "자, 이제 네놈들은 나와 함께 황천으로 가자꾸나."라고 외친 뒤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상이 《헤이케 이야기》에서 읊고 있는 다이라노 노리츠네의 단노우라에서의 최후의 모습이다. 타이라노 토모모리 역시 헤이케 일문의 투신을 지켜본 뒤 "내가 이 세상에서 볼 것은 다 보았다" 라는 말을 남기고, 갑옷을 두 벌 껴입고 닻을 짊어진 채 자신의 젖형제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1.3. 헤이케의 도망자(平家の落人) 전설과 다이라노 노리츠네

일본 각지의 '헤이케의 도망자' 전설 가운데는 다이라노 노리츠네에 관한 것도 있다. 시코쿠의 도쿠시마 현이나 고치현의 신뢰할 만한 향토사에도 등장하는 이 전설은, 다이라노 노리츠네가 단노우라에서 안토쿠 덴노를 모시고 1백여 기를 거느린 채 무사히 시코쿠로 무사히 달아났고, 미즈시 촌[7]에 숨었다가 산맥을 넘어 소타니 산이 있는 땅에 들어갔고, 이름을 아명인 구니모리라 고치고 소타니 산지를 개척하며 집안을 일으키려 했지만 안토쿠 덴노가 아홉 살에 붕어하자 헤이케 재흥을 포기하고 그 땅에 그대로 정착해 20년 뒤에 죽었으며, 그의 자손은 아사(阿佐)라는 성을 쓰며 지금도 헤이케군이 사용했던 붉은색 깃발을 전하고 있다고 한다.

후쿠오카기타큐슈 쪽에는 갓파의 어머니인 바다의 요괴 우미 고젠(海御前)이 다이라노 노리츠네의 아내(어머니라고도)가 단노우라 전투에서 바다에 투신했을 때 이곳으로 떠내려와서 요괴로 변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평소에는 다른 갓파들을 지배하는 존재이지만, 매년 5월 5일만은 지배를 풀고 갓파들을 자유롭게 놓아주면서 "메밀에 꽃이 피기 전에 돌아오라"고 하는데, 이는 헤이케를 멸망시킨 겐지가 흰색 기치를 사용했기 때문에 흰색인 메밀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우미 고젠 본인도 메밀꽃이 피어있는 동안에는 거처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않고 벌벌 떨면서 지낸다고 한다.

2. 매체에서의 다이라노 노리츠네

3. 같이 보기



[1] 이치노타니 전투가 있었던 날이다.[2] 단노우라 전투가 있었던 날이다.[3] 이 사람도 요시츠네만큼이나 생애가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당시 구교들의 일기나 공식 역사서 아즈마카가미 등에는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하는데, 헤이케 이야기에는 단노우라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4]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할아버지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아들로 요시츠네나 요리토모에게는 삼촌이 된다.[5]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정병 70기를 거느리고 말을 타고 내려가 급습한 가파른 절벽이 여기였다.[6] 2005년에 일본 NHK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요시츠네'는 다이라노 노리츠네가 이치노타니에서 죽었다는 공식 역사서의 기록을 감안한 것인지 요시츠네를 쫓아다니며 그가 배 8척을 뛰어다니게 한 헤이케 측 무사를 다이라노 토모모리로 변경했다. 그래서 현재 단노우라 전투 현장과 가까운 곳에 세워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동상 옆에 요시츠네를 노리는 헤이케 측 장수로 닻을 들고 바다에 뛰어들기 직전의 다이라노 토모모리가 조각되어 있다.[7] 지금의 일본 가가와현 동쪽의 가가와 시[8] 처음 기요모리는 여자애같이 곱상하고 왜소한 그의 체구를 보고 헤이케는 원래 무가이니 무예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며 "지금 너 보니까 몸이 비실비실해 보여서 안 되겠다. 오늘은 참가하지 않아도 되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배우고 가라"고 했는데도 본인이 기요모리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는 바람에 나서다가 생긴 사단이었다.[9] 극중 가신의 만류도 뿌리치고 무작정 키요모리의 처소로 쳐들어간 노리츠네를 사촌 형인 다이라노 토모모리가 힘으로 제압하며 "아버님이 쓰러지셨다"며 일갈하자 그때까지 눈이 뒤집혀서 토모모리와 싸울 기세였던 사람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키요모리에게 뛰어가서 "이렇게 돌아가시면 안 된다. '구니모리'라는 이름을 인정해 주셔야 하지 않느냐"라며 절규했다.[10] 전술적인 안목도 탁월해서 이치노타니 전투 때에도 무료하게 누워 있다가 진영 뒤쪽은 절벽으로 사슴이나 오갈 작은 샛길밖에 없다는 가신의 말에 놀라 일어나면서 "나라면 그 길로 기습한다!"며 요시츠네가 그 길로 헤이케 진영을 습격할 것을 정확히 예측했다.[11] 이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이시바시 산 전투에서 헤이케에 패하고 동굴에 숨었는데, 히라이즈미에는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명령으로 요시츠네에게는 "이시바시 산에서 요리토모가 죽은 것으로 알리라"고 했고 요시츠네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동굴에 숨은 요리토모를 발견한 카지와라노 카게토키가 "여기는 아무도 없다"고 말하고 못본 척 하고 나와서 요리토모는 무사했다.[12] 그녀가 한번 뜯겨 죽었을 때 냉정함을 잃고 분노에 휩싸여 우라타로를 여러차례 썰어버렸다.[13] 안토쿠 덴노가 "노리츠네, 죽여라."하자마자 "죽였습니다"는 클리셰다. 그만큼 강하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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