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9-30 16:42:04

취리히 전투



1. 제1차 취리히 전투
1.1. 개요1.2. 배경1.3. 전개1.4. 결과
2. 제2차 취리히 전투
2.1. 개요2.2. 배경2.3. 전개2.4. 결과

1. 제1차 취리히 전투

<colcolor=#fff> 제1차 취리히 전투
Première bataille de Zurich
Erste Schlacht um Zürich
날짜 1799년 6월 4일~6월 7일
장소 스위스 취리히
교전국 교전국1 교전국2

#!if 행정구 == null && 속령 == null
[[프랑스|{{{#!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프랑스 국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프랑스}}}{{{#!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속령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특별행정구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행정구}}}{{{#!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행정구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속령}}}{{{#!if 출력 != null
}}}}}}]]
지휘관 파일:프랑스 국기.svg 앙드레 마세나
파일:프랑스 국기.svg 장드디외 술트
파일:프랑스 국기.svg 니콜라 우디노
파일:프랑스 국기.svg 장 브뤼네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카를 루트비히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프리드리히 폰 호체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프라뇨 옐라치치
전력 병력 59,000명 병력 72,000명
피해 1,300–1,600명 사망 또는 부상 3,400–4,400명 사망 또는 부상
결과 오스트리아 승리

1.1. 개요

1799년 6월 4일부터 7일 사이에, 현재 스위스의 도시인 취리히 근방에서 벌어진 프랑스군과 제2차 대프랑스 동맹군(오스트리아 제국 중심) 사이의 전투로 알프스 전선(스위스 지역)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을 결정짓는 중요한 충돌이었다.

1.2. 배경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왕정 국가들이 프랑스 혁명 사상과 영토 확장을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때 프랑스 공화국은 대부분 유럽 국가와 맞섰다.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지만,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간의 긴장감은 지속되었다. 이 가운데 나폴리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프랑스에 합의된 공물을 바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나폴리를 침공하고 나폴리 공화국이 건국되었다 이를 본 스위스의 공화주의자들은 스위스 연방을 전복하고 헬베티아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오스트리아, 나폴리, 러시아, 영국은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6만 명의 병력을 더 파견하여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병력은 1차 전투때 취리히에 도착하지 못했다.

1.3. 전개

앙드레 마세나 장군은 스위스 전역에 약 7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여러 요인으로 인해 작전 병력이 감소했다. 스위스는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마세나는 국경도 방어해야만 했다. 이에 마세나는 취리히 외곽에 참호 진지를 건설하였다. 주변 언덕에 뒷받침된 이 진지는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완공되지 못했다. 1799년 6월 2일 카를 대공은 취리히베르크[1]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옐라치치는 프랑스 전초 기지를 손쉽게 점령하였고, 프랑스군은 글라트 강 왼쪽 강둑으로 철수하고, 오스트리아군은 이 강의 유일한 다리를 점령하였다. 카를 대공은 옐라치치에게 자신의 위치에 머물도록 명령했지만, 그는 이 명령을 무시하고 프랑스군을 공격하였다. 마세나는 술트와 함께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지만 옐라치치는 이들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취리히 시의 성문에 도달했지만, 이미 공세종말점에 도달해서 옐라치치는 결국 초기 위치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날인 6월 4일, 카를 대공은 글라트 강을 건너 5개 부대로 구성된 광범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오후 2시에 대공은 글라트 강 위에 두 개의 야전교를 건설하고 5개 대대를 동원하여 정면 공격을 시도하여 취리히베르크를 점령하려 했으나 두 번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카를 대공은 계속 공격을 지속하였다. 새벽 2시에 오스트리아군은 취리히를 공격했고, 결국 마세나는 취리히 자체를 제외한 리마트 강 우안을 밤 동안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6일 정오, 교섭 후 프랑스군은 취리히를 떠날 수 있었고, 마세나는 리마트 강둑을 따라 전열을 정비했다.

1.4.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취리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취리히를 포기하고 질서 정연하게 리마트 강 서쪽으로 철수하였다. 도시 점령 자체는 오스트리아의 전술적 승리로 평가된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퇴각은 패주가 아니라 계획된 전략적 후퇴였으며, 병력의 대부분이 보존되었고, 사기 또한 무너지지 않았다. 즉, 전선이 재정비되었고 전쟁의 주도권이 완전히 오스트리아로 넘어가지 않다. 이는 제2차 취리히 전투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제2차 취리히 전투

<colcolor=#fff> 제2차 취리히 전투
Deuxième bataille de Zurich
Zweite Schlacht um Zürich
Вторая битва при Цюрихе
날짜 1799년 9월 25일~9월 26일
장소 스위스 취리히
교전국 교전국1 교전국2

#!if 행정구 == null && 속령 == null
[[프랑스|{{{#!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프랑스 국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프랑스}}}{{{#!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속령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특별행정구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행정구}}}{{{#!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행정구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속령}}}{{{#!if 출력 != null
}}}}}}]]

지휘관 파일:프랑스 국기.svg 앙드레 마세나
파일:프랑스 국기.svg 에두아르 모르티에
파일:프랑스 국기.svg 루이스 클라인
파일:러시아 국기.svg 알렉산드르 코르사코프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프리드리히 폰 호체
전력 병력 35,448명 병력 27,116명
피해 약 4,000명 사망 또는 부상 약 8,000명 사망 또는 부상
결과 프랑스의 승리

2.1. 개요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인 1799년 9월 25일과 26일에 일어난 전투로 앙드레 마세나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러시아 군대와 신성 로마 제국 군대 에 맞서 승리했다.

2.2. 배경

제1차 취리히 전투 이후 마세나는 아레 강 하류 후방의 방어선을 강화했다. 전반적인 전략 계획에 따라, 샤프하우젠에 90일간의 행군을 마치고 도착한 코르사코프가 이끄는 25,000명의 러시아군 사령관이 카를 대공 휘하의 오스트리아 군대를 증강할 예정이었다. 8월 22일, 코르사코프와 호체는 코르사코프가 2만 2천 명의 병력으로 아레-리마트-취리히-마일렌 전선의 하류 지역을 점령하고, 호체는 약 2만 명의 병력으로 멘네도르프-오버제-린트- 글라르너란트 전선을 점령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군이 스위스에 도착하자 8월 28일, 카를 대공의 병력 대부분이 스위스를 떠나 남부 독일로 향했다. 마세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8월 30일 리마트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그는 이 계획을 포기했다. 그 대신 그는 디에티콘 근방에서 기습 공격을 위한 광범위한 준비를 하였다. 이 기습 공격에서 그의 병력 대부분은 배와 다리를 이용하여 강을 재빨리 건너 취리히를 포위할 것이었다. 9월 19일, 마세나는 디에티콘에서 리마트 강을 건너는 계획을 사단장들에게 발표했다. 동시에 술트는 린트와 오버제를 건너 호체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9월 25일 동이 트기 전, 리마트 강 도하를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포병 여단장 드동은 마세나 장군의 마지막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프랑스군을 승선시키라는 명령만을 기다렸다.

2.3. 전개

9월 25일 오전 4시, 프랑스군이 승선을 시작했다. 해안에 배치된 병사들은 리마트 강 우안으로 이동하기 위해 배에 뛰어올랐다. 그러나 일부 배는 금세 과적되어 꼼짝 못 하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상륙 작전이 다소 지연되었다. 프랑스군이 배를 다시 띄우는 동안 내는 소음이 러시아 초소에 경보를 울렸고, 러시아 초소는 리마트 강에 포격을 가했다. 그 순간, 프랑스 병사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전진! 전진!" 이라는 함성이 들렸다. 도강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첫 총성이 울린 지 3분 만에 리마트 강 좌안에는 배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란생 대대장이 가장 먼저 우안에 도착했고, 곧 가잔 장군의 선봉대원들이 뒤따랐다. 마란생 장군은 상륙하자마자 살인적인 포화 속에서 적군을 향해 진군했다.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을 강으로 몰아내기 위해 여러 차례 진격했지만, 프랑스 포대는 맹렬한 포격을 계속하여 러시아군의 반격을 모두 격퇴하였다. 이어서 두번째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고 이 병력도 무사히 우안에 상륙하였다. 반대편 강둑에서 프랑스군이 충분히 강해지자, 드동 여단장은 포병과 기병대가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당시 리마트 강 우안에 주둔하고 있던 가잔 장군 휘하의 프랑스군은 나무 덤불 속에 종대를 형성하여 러시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진격했다. 이에 러시아군은 즉각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 후퇴는 러시아의 계략이었다. 이미 고지를 점령한 러시아군은 가잔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사정권에 들어오자 맹렬한 포격을 하였다. 하지만 이미 리마트 강 우안에 대규모 프랑스 병력이 상륙한 상황이어서 가잔 장군은 수많은 지원군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가잔의 프랑스군은 총검을 휘두르며 돌격했고, 곧 러시아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후퇴하였다. 이 첫 번째 승리로 프랑스군은 숲이 우거진 고원과 바이닝겐 진지를 장악했다.

이후 마세나 장군은 다리 공사를 직접 진두 지휘하였다. 그의 존재와 격려는 부교 건설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오전 8시가 되자 다리가 완공되어서 기병과 포병이 리마트 강 우안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러시아군 총사령관인 알렉산드르 코르사코프은 여러 면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코르사코프는 취리히와 리마트 강 우안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병력의 상당수를 집결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모든 병력을 이끌고 코르사코프는 대대 단위로 촘촘하게 편성된 강력한 대열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마세나 장군은 러시아군 종대의 진격에 대한 강력한 저항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양익을 중앙으로 재배치했고, 그런 다음 마세나는 러시아군 종대의 측면을 향해 경포병대를 배치했다. 대규모 러시아군 종대는 프랑스군의 맹렬한 돌격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버텼지만, 그러나 경기병대의 포격으로 러시아군 종대에 상당한 틈이 생겼다. 마세나는 프랑스군에게 총검 돌격을 명했고, 이에 러시아군은 깜짝 놀라 대열이 무너졌다. 결국 러시아군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마세나는 클라인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를 투입하여 그들을 추격하게 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러시아군 대대를 완전히 분산시키고, 남은 병력을 취리히 교외까지 추격했다. 러시아가 후퇴하자 마세나는 즉시 리마트 강과 글라트 계곡을 가르는 모든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9월 25일에서 26일 밤, 코르사코프 장군은 아레 강과 라인 강이 만나는 지점 근처에 있던 자신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진지를 포기했지만, 공세를 재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바로 이 순간 마세나는 리마트 강 양쪽에서 취리히 시를 압박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마침내, 프랑스군은 밀집 종대로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여 러시아군을 완전히 전복시키고 완전히 패주시켰다. 이미 바덴 교외를 점령한 우디노 장군은 프랑스군을 이끌고 취리히를 향해 돌격하였다. 결국 취리히 입성에 성공한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을 도시 곳곳에서 몰아냈다. 결국 취리히는 함락되었고 모든 물자, 러시아 부상병, 대규모 포병대, 그리고 러시아 장교들의 아내들은 프랑스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프랑스군의 맹렬한 추격을 받은 러시아군의 잔당은 샤프하우젠으로 후퇴하였다.

2.4. 결과

이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는 제2차 대프랑스동맹을 스위스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전투 후 러시아 황제 파벨 1세는 오스트리아가 코로사코프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고 격분해, 러시아군을 전선에서 철수시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사실상 이탈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단독으로 남은 전선에서 프랑스를 상대하게 되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스위스 일대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프랑스가 이탈리아 전선에 병력을 재배치 할 수 있게 하였다.
[1] 취리히 시내에 위치한 낮은 봉우리로 취리히의 동쪽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