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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7:22:30

제2차 이탈리아 원정

나폴레옹 전쟁 전개
이집트 원정 제2차 이탈리아 원정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1. 개요2.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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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부이자 나폴레옹 전쟁의 세번째 국면으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일부이다.

1796년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의 이탈리아 전역과는 구분된다. 1798년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된 뒤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 원정을 진행하던 나폴레옹은 중간에 귀국하여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1800년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2. 진행

나폴레옹이집트를 정복해 영국인도 사이의 연계를 끊어 영국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시도했지만 되려 호레이쇼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해군아부키르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 해군을 섬멸하는 바람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꼼짝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를 프랑스에 빼앗긴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는 나폴레옹이 움직일 수 없는 이때를 호기로 판단하고 영국과 러시아 제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여 제2차 대프랑스 동맹(Second Coalition)을 결성, 프랑스에 공세를 취하게 된다.

1799년, 북이탈리아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공세에 러시아군의 연합까지 더해져 제노바까지 후퇴하게 되었고 라인 방면에서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헬베티아 공화국(스위스)에서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이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군을 돕기 위해 남하하여 노비 전투에서 프랑스의 주베르를 전사시키고 모로를 패퇴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9월 25일, 프랑스군의 앙드레 마세나는 수보로프와 그 병력이 분산된 기회를 이용하여 취리히에서 코르사코프 휘하 연합군을 격파하고 러시아 제국군을 스위스에서 퇴각시켰다(제2차 취리히 전투).

이런 상황이 되자 프랑스 총재정부는 국민적인 원성을 듣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프랑스로 귀환한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초창기의 인물인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등과 연합하여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집정정부를 수립했다(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은 자신이 제1집정에 올라 각종 개혁정책들을 추진하는 한편, 이듬해에 북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파일:Napoleon Bonaparte Portrait.jpg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1804년, 자크루이 다비드

이듬해인 1800년, 나폴레옹은 제네바에 병력을 집결시킨 뒤 5월에 알프스의 산 베르나르도 고개를 건너 북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위의 다비드의 그림에서는 마치 나폴레옹이 거친 날씨 속에서 알프스를 넘은 것처럼 그려졌지만, 실제론 나폴레옹이 고개를 넘던 날의 날씨는 매우 화창했다고(…). 또한 그림처럼 말을 타지 않고 현지 농부인 도르사즈(Dorsaz)란 이름의 안내꾼이 직접 고삐를 잡은 노새를 타고 갔다. 나폴레옹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도르사즈가 갖길 원하던 농장을 살 수 있는 많은 돈을 주었다고 한다.

또 어린이용 위인전 등에선 이걸 마치 과거 한니발 바르카의 원정마냥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을 말도 안되는 기동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다. 한니발 시절[1]이라면 모를까 이 때는 알프스산맥을 넘는 통로가 상당히 개발된 지 오래였다. 물론 명색이 알프스 산맥인지라 행군 과정에서 장병들은 대포와 같은 물자까지 나르느라 상당히 고생했고 낙사 사고와 같은 비전투 손실이 제법 발생했다. 나폴레옹 본인도 노새를 타고 가다 미끄러질 뻔했지만 앞서 언급한 안내꾼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당시에 이 알프스 행군 자체는 크게 특별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굳이 나폴레옹을 고평가하자면, 과감하게 알프스를 돌파하여 오스트리아군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진격해서 전략적인 우위를 점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즉 '아니 알프스 산맥을 넘어왔다고?'가 아니라 '아니, 이렇게 빨리 여기까지 왔다고?'란 식.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배후인 밀라노와 파비아를 점령했지만 제노바에 포위되어 있던 마세나의 프랑스군은 결국 6월 4일 도시를 함락당하고 만다. 이에 오스트리아의 주력군은 토리노로 집결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당한 오스트리아군은 결국 돌파하기로 결심하고 마렝고에서 프랑스군과 만나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마렝고 전투).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공세에 밀려 위기에 처했지만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의 별동대가 나타나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전투의 막바지에 이르러 드제는 전사하고 만다. 한편 라인 방면에서는 모로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뮌헨까지 함락할 기세가 되었다. 결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7월 15일에 휴전에 합의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휴전기한이 끝난 11월 13일을 기해 다시 전투에 돌입했다. 모로가 이끄는 라인방면 프랑스군은 12월 13일, 호엔린덴에서 카를 대공의 동생 요한 대공이 이끄는 4방면의 오스트리아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고(호엔린덴 전투) 오스트리아는 전의를 상실하여 다시 협상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801년 2월 9일, 프랑스 동부의 류네빌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세운 위성국가들인 헬베티아 공화국(스위스), 치살피나 공화국(북이탈리아), 리그레 공화국(제노바)의 독립을 재확인했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프랑스에 할양하기로 결정했다. 그밖에 치살피나 공화국의 영토확장과 나폴리의 왕정복고 등의 사안도 합의되었다. 영국만이 프랑스와 계속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이듬해인 1802년 3월 25일 아미앵에서 강화조약을 맺고 종전을 확정했다(아미앵의 화약).

그러나 평화는 1년만에 깨졌으며, 영국은 아미앵의 화약을 파기하고 영국은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여 전쟁이 재개되었다. 더욱이 반나폴레옹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콩데 공의 손자이자 부르봉 왕가의 핏줄인 앙기앵 공작[2]을 바덴에서 납치해 처형한 일[3]로 유럽 각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하지만 결국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를 거쳐 1804년 5월 28일 제정의 선포를 선언하고 12월 2일,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랑스는 제1제정이 시작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럽 각국의 왕실들도 나폴레옹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혁명의 총아였던 그가, 이제는 그들과 스스로 같은 위치에 서게 된 것이었다. 당장 대관식 때, 가장 먼저 나폴레옹에게 축사를 보낸 이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프란츠 2세였다.[4] 그리고 한 작곡가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 1801년에는 영국과 덴마크 간의 전투인 코펜하겐 해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등은 중립 동맹을 체결하고 발트해에서 영국 선박의 통행을 봉쇄했다. 그러자 영국은 동맹국 중 가장 만만한 덴마크를 굴복시킨 뒤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하였다. 영국에 비해 해군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덴마크 해군은 코펜하겐 항구 앞에 정박한 채 육상 포대의 지원을 받아가며 영국 함대에 저항했다. 당시 해전은 의외로 치열했는데 육상 포대의 지원이 영국 해군 입장에서도 상당히 성가신 수준이었던 데다, 코펜하겐 앞바다의 해풍과 조류가 생각보다 험악해서 영국 해군의 전열함 3척이 좌초되는 등 애를 먹었다. 포격전 끝에 영국 해군 측이 승기를 잡자 영국군은 포격을 중지하고 협상 후 덴마크 측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계획했던 러시아 공격은 함대가 이동하던 도중 영국과 러시아 간의 외교 협상으로 적대 관계가 해소되어서 취소되었다.

이 해전 당시 넬슨의 일화도 있다. 당시 영국 함대는 하이드 파커(Sir Hyde Parker) 제독이 지휘했고 넬슨은 부사령관이었다. 그런데 넬슨과 파커는 전술에 대해 종종 합의를 보지 못했다. 코펜하겐 해전 도중 파커는 넬슨에게 깃발을 통해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넬슨은 계속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그 순간 깃발을 향해 “보이지 않는 눈을 돌렸다(turned a blind eye to the flat).”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애꾸였던 넬슨은 보이지 않는 눈에다가 망원경을 가져다 대며 “신호가 보이지 않는군”이라고 말한 뒤 전투를 계속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갈 때 "부르 상 피에르"라는 스위스 마을에서 물자 및 노동력을 징발하였는데, 징발한 물자 및 노동력의 대가(임금)에 대해선 차후 프랑스 정부가 지불하겠다는 차용증서를 써 줬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걸 잊어버렸고(...) 세인트헬레나에서 죽을 때까지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이 스위스 마을 사람들은 100년이 넘게 프랑스 정부에게 이 채무를 상환할 것을 요구하였고, 결국 1984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직접 해당 마을을 방문하여 이를 기념하는 동판을 증정하며 끝을 맺었다.


[1] 한니발 15일, 나폴레옹 2일[2] 루이필리프의 고모인 바틸다 도를레앙의 아들이다.[3] 당시 나폴레옹은 올빼미당과 왕당파의 극심한 테러와 암살 위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는 공작을 처형한 일을 반체제분자들에게 보이는 본보기이자, 정당방위라고 합리화했다. 그는 라스 카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떤 한 집안의 사람들이 자기들은 날마다 나를 죽이려 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갚아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멍청이거나 미치광이가 아니겠소?"[4]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3개월 뒤 그 역시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위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