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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0:16:09

최청

고려 검교정승
최청
崔淸
출생 1344년
고려
사망 1414년 9월 28일(향년 71세)
조선 경기 양주부 송산
(現 경기도 남양주시)
국적 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본관 경주 최씨
부모 부친 - 최자운(崔子雲)[1]
모친 - 풍양 조씨
부인 경주 이씨
부모 슬하 4남 2녀
장남 최연지(崔淵止)
차남 최신지(崔信止)
3남 최검지(崔儉止)
4남 최한지(崔漢止)
직재(直哉)
관가정(觀稼亭), 송음거사(松蔭居士)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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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의 관료. 경주 최씨 관가정공파의 시조.

2. 생애

최청은 1344년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지낸 최자운(崔子雲)과 풍양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제현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였다.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가 되었고, 1361년(공민왕 10) 1361년(공민왕 10) 공민왕이 개성을 침입한 홍건적을 피해 복주로 남행하였을 때 호종하였고, 그 공으로 종2품 벼슬에 해당하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다.

1365년에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올랐으나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신돈의 미움을 받아 지방관인 신주감무관(信州監務官)으로 좌천되었다. 신돈이 축출된 후 개경으로 돌아와 1375년(우왕 1) 첨의중찬에 임명되었으며 1378년(우왕 4)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의 직임을 수행하였다. 1384년(우왕 10) 명에 사행하였는데,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帶)를 하사받았다. 이후에 검교정승이 되었으나 혼란한 조정에 실망하여 사퇴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으로 즉위한 이성계가 최청을 좌찬성(左贊成)에 임명하였으나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거절하였다. 송악을 잊지 못하는 마음에서 스스로를 송음거사(松蔭居士)라 칭하였다.

최청의 절개를 높이 산 이성계는 최청이 은거하는 산을 어래산(御來山)[2] 으로 봉하고, 관가정(觀稼亭)이라는 편액을 내렸으며, 동국청풍서산고절(東國淸風西山高節)이라 칭송하였다. 최청은 “산의 이름에 임금이 왔다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이곳에 거처하겠는가!”하고 은거지를 다시 풍양의 송산(松山)으로 옮겼으며, ‘송음거사(松蔭居士)’라 자호하였다. 은거 생활을 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 오다가 1414년(태종 14) 9월 28일 사망하였다.

3. 여담

최청은 자손들에게 자신의 비문에 고려의 관직을 기재하라고 하였는데, 이후 비석을 새롭게 세우면서 조선에서 내린 좌찬성(左贊成)의 직을 기입하자 천둥과 함께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 났다고 전해진다. 추후 묘역을 3단으로 새롭게 조성하였으며, 석물도 새로 갖추었다고 한다.
이성계를 거부하였으나 자손들 중에 건원릉의 참봉을 역임한 자손들이 여럿있다. 바로 밑에 묘역에 있는 증손자인 최계동(장남 수안군수 최연지의 손자)은 건원릉참봉을 역임하였다.

[1]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지낸 인물이다.[2] 임금이 왔다간 산이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