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밀직제학 | |
<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조선 검교좌정승 정순공(靖順公) 이성중 李誠中 | |
출생 | 1332년 |
사망 | 1411년 (향년 78~79세) |
본관 | 경주 이씨 |
자 | 계저(季著) |
공신호 |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
시호 | 정순(靖順) |
부모 | 부: 이천(李蒨) - 첨의참리, 월성군 |
자녀 | 장남: 이원(李援) - 연안도호부사 차남: 이부(李扶) 3남: 이휴(李携) - 검교판한성부사 장녀: 최식(崔寔)에게 출가 차녀: 최청(崔淸)에게 출가 3녀: 오부(吳溥)[1]에게 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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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부친은 고려 첨의참리 월성군(月城君) 문효공(文孝公) 이천(李蒨), 조부는 고려 검교정승 이세기(李世基)[2], 증조부는 고려 검교첨의정승 임해군(臨海君) 문정공(文定公) 이진(李瑱)이다. 본관은 경주.2. 생애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판서[3], 밀직제학[4] 등을 지냈다. 1384년(우왕 10) 윤10월 용덕(龍德; 숙비 최씨)의 집이 협소하고 누추하여 우왕(禑王)이 행차하기에 마땅치 않다고 하여 대궐 근처에 있던 판서(判書) 이성중의 집을 수리하였다. 동년 11월 우왕이 교외에서 사냥한 뒤 용덕을 데리고 이성중의 집에서 잤으며, 이때부터 항상 이성중의 집에서 잤다.태종과 친교가 있어 태종이 대언(代言)으로 있을 때 아들 이휴(李携)로 하여금 가보인 금으로 장식한 보검(寶劍)을 바치게 하며 국가와 백성을 위해 큰일을 하라고 권면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를 거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역임했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411년(태종 11) 사망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이성중은 노덕(老德)이 있으니, 마땅히 예장(禮葬)하라." 하니, 대언사(代言司)가 아뢰기를, "검교는 유품(流品) 밖이어서 원래 그 예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태종이 말하기를, "검교정승은 반드시 노덕(老德)이 있는 자이다. 하물며, 종1품 이상은 모두 예장이 있는데, 비록 검교라도 어찌 종1품 아래에 두겠는가? 이제부터 마땅히 예장법(禮葬法)을 세우라." 하였다. 또한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사제(賜祭)하고 부의(賻儀)를 보내고, 시호를 정순(靖順)이라 내려 주고, 유사(攸司)에 명하여 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