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0047a0> 출생 | 1863년 10월 10일 |
| 함경남도 단천군 신만면 신동 | |
| 사망 | 1945년 9월 10일 (향년 81세) |
| 함경남도 단천군 | |
| 종교 | 천도교 |
| 직업 | 독립운동가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최봉천은 1863년 10월 10일 함경남도 단천군 신만면 신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3월 3일 서울로부터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뒤 천도교 지도자들과 볓차례에 걸쳐 숙의한 끝에 서봉화는 단천 지역을 맡고 자신은 갑산 지역을 담당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이후 그는 3월 7일 고향을 떠나 8일 갑산에 도착하여 우선 이인면 가재리(里仁面加財里)에 있는 천도교 분교실로 가서 김길렬(金吉烈)을 만나 각지의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고, 15일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의하여 찬성을 얻었다. 9일에는 장평면 서부리(長平面西部里) 교구실과 화장리의 정완조(鄭完朝)를 방문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주동인물인 그가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갑산군민이 이에 선뜻 응하지 않고 있을 때, 풍산군 안산면 하지경리의 천도교 교구실로부터 각지의 독립만세시위 상황을 연락받은 갑산천도교 전도사인 김명수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거사계획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에 김명수는 3월 12일 후지리(厚地里)의 정국태를 만나서 거사일을 15일로 결정하고, 교구당 단위의 만세시위를 지양하고 군단위로 일원화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15일 에정대로 갑산교구당에 2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내세우고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제지하였으나, 이를 뿌리치고 군청을 습격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급보를 받은 혜산진(惠山鎭)수비대에서 12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군중은 강제 해산되었다. 그는 이날 밤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6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단천군에서 포교 활동에 전념하다 1945년 9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최봉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