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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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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9대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니에프 카지미에시 브레진스키
Zbigniew Kazimierz Brzeziński
파일:Zbigniew_Brzezinski.jpg
출생 <colcolor=#000,#fff>1928년 3월 28일
폴란드 공화국 바르샤바
사망 2017년 5월 26일 (향년 89세)
미국 버지니아 주 폴스 처치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공무원, 정치인
재임기간 제9대 국가안보보좌관
1977년 1월 20일 ~ 1981년 1월 20일
정당

학력 맥길 대학교 (국제관계학 / 학사)
하버드 대학교 (국제관계학 / 박사)
약력 제9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저서 거대한 체스판 (1997)
미국의 마지막 기회 (2007)
전략적 비전 (2012)

1. 개요2. 생애3. 유라시아 지정학4. 미국 쇠퇴론5. 기타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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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정치인이자 공무원이다. 폴란드계 미국인이며 지미 카터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카터 시기에 삼극위원회의 창설 멤버 3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헨리 키신저와 더불어 냉전 시기 미국을 대표하는 3대 안보보좌관의 일원으로 불리며,[1] 브레진스키는 그들 중에서도 특히 개입주의의 성향이 강력했던 인물로 꼽힌다.[2]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목표를 추구한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매파 중 한명으로, 현대 민주당의 전반적인 국제주의 외교 기조를 완성한 인물로 꼽힌다.[3] 그런데, 자유주의적 목표를 추구하였지만, 지정학에 기반하여 철저하게 현실주의적으로 상황을 분석하였기에, 정치현실주의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4]

2. 생애

1928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타데우시 브제진스키 (Tadeusz Brzeziński)는 폴란드의 외교관이었다. 아버지가 외교관으로서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독일에 파견되어 나치 독일의 성장을 보며 자랐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에 파견되어 소련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대숙청을 목격한다.[5] 1938년 아버지가 캐나다 몬트리올에 총영사로 파견되자 브레진스키 일가도 캐나다로 이주한다.[6] 이후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 등으로 인해 일가족이 완전히 캐나다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이루어진 독일소련독소 불가침조약, 그로 인한 독일의 폴란드 침공, 독소 불가침 조약의 '폴란드를 반으로 분할한다'는 내용, 어린 시절 보았던 스탈린의 대숙청 등의 영향으로 즈비그니에프는 반공적이며 소련에 적대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1945년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에서 문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의 석사 논문은 소련 내의 다양한 민족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원래 캐나다에서 외교관 경력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에서 유학을 준비하려 했으나 영국인에게만 열려있는 장학금 때문에 유학은 포기하고 1953년 미국으로 넘어와 하버드 대학교에 다녔고 메를 파인소드와 함께 소련과 10월 혁명, 블라디미르 레닌의 국가, 이오시프 스탈린의 행동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학자로써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의 편찬한 저서로써 1956년 독일의 정치학자 칼 프리드리히와 같이 공저한 <<전체주의적 독재와 전제정치>>를 펴내기도 했다. 이후 1953년부터 1960년까지 하버드 대학교 교수를 지내고 1960년부터 1972년까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공산당 문제 연구소장을 맡았다. 그는 워싱턴 D.C.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폴 니츠 고등 국제학원의 국제 관계 수석 연구 교수이기도 했다.
소련군의 침공을 알리던 카불 주재 미국 대사관의 외교전문들이 속속 도착하던 워싱턴의 백악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깊은 숙고에 빠졌다. 카터 행정부 내에서 가장 강경한 냉전 전사였던 그의 머리를 사로잡는 문제는 이번 사태가 소련이 도를 넘는 조처였냐는 것이었다. 당시 그와 미국의 안보외교팀들은 아프간에 대한 중앙정보국 등 미국의 공작에 대한 소련의 피해의식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소련의 침공을 중동의 걸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아프간 친소정부를 유지하려는 절박한 행동으로 해석했다. 그럼 문제는 소련의 의지가 어느 정도이며, 그 노력이 성공할 것인가였다.
소련, 체제붕괴 대가…미국도 새 적 키워(한겨레, 기사작성일자 2013.10.31)#
1977년 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National Security Advisor)으로 재직하였다. 재임기인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목격하였다. 전 CIA 국장 로버트 게이츠는 1996년에 쓴 회고록 「음지로부터: 냉전에서 승리한 다섯 대통령의 숨은 이야기」에서 미국 정보기관들이 실제로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가 아닌 이미 그 6개월 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 게릴라를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7] 실제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발발일로 간주되는 1979년 12월 27일[8] 이전부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을 지원했으며 이는 사실이었다. 다만 이런 지원은 1979년 7월에 가서야 개시되었고 액수로 50~70만 달러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의료물자나 무선송수신기 비군사적 물자였기 때문에 이 원조가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뒤집어엎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단순 반군 지원을 넘어서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유도했다는 주장을 한다. 심지어 이 유도설은 단순 음모론이 아니라 상당히 그럴듯한 근거도 갖추고 있는데, 1998년 프랑스 언론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9]가 브레진스키와 인터뷰한 내용에서 브레진스키가 유도설을 인정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해당 대화록의 일부이다.
"그렇다. 공식적으로는 무자헤딘에 대한 CIA의 지원은 1980년, 즉 1979년 12월 24일 소련 군대의 아프간 침공 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비밀이 유지되어 온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실 카터 대통령이 카불의 친소련 정권 반대파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첫명령을 승인한 것은 1979년 7월 3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그러한 지원이 소련의 군사적 개입을 유도하리라고 대통령에게 설명했던 자료를 내가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벨 옵세르바퇴르」: 지금 당신은 이 점과 관련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가?

브레진스키: 무슨 후회를 할 게 있는가? 그때의 기밀 작전은 기발한 구상이었다. 그 작전은 러시아를 아프가니스탄의 함정에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후회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소련이 아프간 국경을 넘었던 그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을 베트남 전쟁으로 몰아세우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라고.

「누벨 옵세르바퇴르」: 그러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미래의 테러 집단들에게 무기와 군사 참모를 제공한 사실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브레진스키: 세계사의 전개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지 않는가? 탈레반인가, 아니면 소련 제국의 붕괴인가? 무슬림 일부를 약간 동요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중부 유럽의 해방과 냉전의 종식인가?
브레진스키, 프랑스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 영어 번역본-2, 영어번역본, 영어번역본-1, 프랑스어 원문1, 프랑스어 원문2.
하지만 이 인터뷰를 토대로 미국이 소련의 행동을 유도하거나 또는 소련이 미국의 유도에 말려들었다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이렇게 섣부른 결론을 내놓는 것은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정세, 소련의 침공에 대한 미국 정부(특히 브레진스키)의 인식과 반응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20세기 아프가니스탄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현대 제국들의 무한 세력 확장과 이에 기반한 전략전 오판의 결과이자 참사였다. 미국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최고 전략적 자원인 석유가 묻힌 페르시아만까지 영향력을 확장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소련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넘어서 자신들의 중앙아시아 내 이슬람계 자치공화국을 묶어서 현대판 오스만터키 제국 결성을 사주한다고 오판했다.
아프가니스탄, 패권의 경연장이자 무덤(한겨레, 기사작성일자 2013.09.12)#
애초에 미국으로 향하는 원유의 주산지인 걸프만과 아프가니스탄의 거리가 지척이라는 점에서 미국에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이 결코 좋은 일일 수가 없었다.[10] 서방에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국제안보와 걸프만의 석유 공급 라인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11] 후일 브레진스키는 침공 유도설의 근거로 사용된 1998년 인터뷰의 정확성을 수차례나 부정했으며, 2020년 코너 토빈(Conor Tobin)의 The Myth of the “Afghan Trap”: Zbigniew Brzezinski and Afghanistan, 1978–1979도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를 사학적 근거로 삼기는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토빈에 따르면 브레진스키는 해당 인터뷰 기록은 실제 인터뷰 기록이 아니라 발췌문으로 심각하게 편집되었고, 그 편집본을 자신에게 확인도 받지 않고 출판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해당 인터뷰는 원래 영어로 진행된 것이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다시 영어로 재번역되는 과정에서 원래 인터뷰 의도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1979년 12월 말 작성된 기록을 참고하면 브레진스키는 소련의 침공 직후 소위 곰덪(Bear Trap)에 걸려들었다고 환호작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련의 남진을 우려한 것으로 드러난다. 앤서니 타이틀러(Anthony Teitler)의 2020년 책이다. 이 책은 1998년 인터뷰 내용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진 않지만, 인터뷰 내용은 1979년 침공 당시 작성한 메모와 상충된다고 지적하였다. 타이틀러에 따르면 1998년 인터뷰는 소련 붕괴 후 브레진스키의 자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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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Carter's declaration on 3 July 1979 that Washington supported covert assistance to the Afghan rebels via Pakistan's ISI was the first clear foray into opposing the Soviet Union's presence in Afghanistan (Gates 1996: 146). This was a small and innocuous beginning as only half a million dollars was deployed to boost psychological and propaganda efforts against the Soviet Union. Furthermore, it was done via intermediaries in order to disguise US involvement so not to directly antagonise Moscow (Coll 2004: 46; Rasanayagam 2005: 105). However, over time, a small trickle of funding to the Afghan Mujahideen turned into a vast stream and by 1987 had reached $630 million per annum (Roy 1991: 35; Rasanayagam 2005: 136). (중략)
1979년 7월 3일자 연설로 카터 대통령이 밝힌, 미 정부가 파키스탄 정보기관 ISI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비밀리에 지원한 일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을 겨냥한 최초의 명확한 시도였다.(Gates 1996: 146) 이 시도는 처음에는 소련에 대한 심리 및 선전전을 강화할 목적으로 50만 달러만 사용했기 때문에 미국이 손해볼 것 없었다. 더욱이 이는 모스크바를 직접적으로 적대시하지 않기 위해 미국의 개입을 위장해줄 중개자를 통하여 이루어졌다.(Coll 2004: 46; Rasanayagam 2005: 105)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은 더욱 커져만 갔고 1987년에 이르면 연간 6억 3천만 달러가 사용되었다(Roy 1991: 35; Rasanayagam 2005: 136). (중략)

Although initial US involvement in Afghanistan carried modest cost, Zbigniew Brzezinski later claimed that the United States had planned to lull the Kremlin into an intervention of that country. Indeed, in a 1998 interview, the former national security advisor made this very point, arguing Washington knew it could inflict on Moscow its own 'Vietnam War'. As Brzezinski pointed out, in the wider scheme of things the United States' support of a few 'stirred up Moslems' to help bring down the Soviet Union was a price worth paying even in the aftermath of the Cold War: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처음에는 소소했지만, 후일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는 소련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도록 유도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이 전직 국가안보보좌관은 실제로 1998년 인터뷰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미 정부가 소련이 자신의 '베트남 전쟁'에 빠져들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브레진스키가 지적한 바와 같이, 더 넓은 관점에서 소련 붕괴를 위해 소수의 '동요하는 무슬림'을 지원하는 것은 냉전이 끝난 이후에 봐도 지불할 가치가 있는 댓가였다.

We didn't push for the Russians to intervene, but we knowingly increased the possibility they would.... It had the effect of drawing the Russians into the Afghan trap and you want me to regret it? The day that the Soviets officially crossed the border, I wrote to President Carter. We now have the opportunity of giving to the USSR its Vietnam War. Indeed, for almost 10 years, Moscow had to carry on a war unsupportable by the government, a conflict that brought about the demoralization and finally the breakup of the Soviet empire.... What is most important to the history of the world? The Taliban or the collapse of the Soviet empire? Some stirred-up Moslems or the liberation of Central Europe and the end of the cold war? (Interview with Zbigniew Brzezinski 1998)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개입할 가능성은 높였다. (중략) 그 작전은 러시아를 아프가니스탄의 함정에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후회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소련이 아프간 국경을 넘었던 그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을 베트남 전쟁으로 몰아세우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실제로 소련 정부는 근 10년간 자기들이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계속했고, 이 분쟁은 결국 소련 제국의 사기를 저하하고 종국에는 제국의 붕괴를 일으켰다. (중략) 세계사의 전개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지 않는가? 탈레반인가, 아니면 소련 제국의 붕괴인가? 무슬림 일부를 약간 동요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중부 유럽의 해방과 냉전의 종식인가? (Interview with Zbigniew Brzezinski 1998)

Written memos at the time however directly contradict Brzezinski's bravado language (Brzezinski 26 December 1979; Coll 2004: 581; Riedel 2014: 102). The Carter administration's supposed certainty about giving the Soviet Union a 'bloody nose' was post hoc rationale. As was the case, Brzezinski wrote to President Carter explaining the potential dangers and pitfalls that encompassed a Soviet intervention and the challenges for Washington. Indeed, the national security advisor was certainly not so sanguine about the Soviet Union being lulled into its own 'Vietnam' as the circumstances were very different. Brzezinski was clearly cautious. In this aforementioned memo of 26 December, Carter's national security advisor expressed pessimism about the Afghan resistance to the Soviet Union, in large part because they did not have the support and capability on both a domestic and an international level that the Vietcong clearly had. As Brzezinski stated,
그러나 (침공) 당시 브레진스키가 작성한 메모는 훗날 브레진스키의 허세 가득한 언사와 직접적으로 모순된다.(Brzezinski 26 December 1979; Coll 2004: 581; Riedel 2014: 102) 소련에 '한 방' 먹일 수 있게(bloody nose) 되었다는 카터 행정부의 확신은 사후적으로 지어낸(post hoc) 근거였다. 마찬가지로 브레진스키는 카터 대통령에게 메모를 보내어 소련의 개입과 미국 정부에 대한 도전을 포함하는 잠재적 위협과 함정에 대해 설명했다. 실제로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치른 베트남 전쟁과) 상황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소련이 자신의 '베트남'에 빠져들 것이라고 낙관할 수 없었다. 브레진스키는 분명히 조심스러웠다. 앞서 언급한 12월 26일 메모에서 브레진스키는 반소 아프가니스탄 저항군의 운명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그 이유는 (아프가니스탄 저항군이) 베트콩만큼 국내 및 국제사회에서 확고히 보유했던 지원과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브레진스키가 말했듯이,

[t]he Soviet intervention in Afghanistan poses for us an extremely grave challenge, both internationally and domestically. While it could become a Soviet Vietnam, the initial effects of the intervention are likely to be adverse for us.... However, we should not be too sanguine about Afghanistan becoming a Soviet Vietnam: A. The guerrillas are badly organised and poorly led; B. They have no sanctuary, no organized army, and no central government - all of which North Vietnam had; C. They have limited foreign support, in contrast to the enormous amount of arms that flowed to the Vietnamese from both the Soviet Union and China.... As a consequence, the Soviets might be able to assert themselves effectively, and nothing in world politics succeeds like success, whatever the moral aspects. (Brzezinski 26 December 1979)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개입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우리에게 극도로 심각한 도전이다.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베트남이 될 수는 있지만 처음에 그 개입의 효과는 우리에게 부정적일 가능성이 높다. (중략)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베트남이 될 것이라고 너무 낙관해서는 안 된다. 첫째, 아프가니스탄 게릴라의 조직력이 나쁘고 지도력도 부족하다. 둘째, 그들은 북베트남이 가지고 있던 성역(sanctuary)[역자주1], 조직화된 군대, 중앙 정부 중 그 어느 것도 없다. 셋째,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무기를 지원받은 북베트남과 달리 그들은 외국으로부터 제한적인 원조만 받고 있다. (중략) 그러므로 소련은 자신의 목적을 확고히 달성할 것이다. 도덕적 측면과 관계없이 국제정치에서 성공은 또다른 성공을 부른다. (Brzezinski 26 December 1979)

In this memo, Brzezinski provided context for the United States' response to the Afghan invasion. It was, however, not entirely clear-cut as to how and in what way the Carter and (subsequent) Reagan administrations would implement its Afghanistan policy, especially if the Soviet occupation became a long-term one. Over time, a clear approach emerged, but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Soviet invasion, there was major concern about what needed to take place, as the NSC's 'Summary of Conclusions' of the same day was also cautious about the Soviet advance into the country. Moscow seemed on the verge of "pacifying Afghanistan", and this would have had serious implications for Washington's image and strength in the region (Special Coordination Committee Meeting 26 December 1979). After the Iranian Revolution and concomitant hostage crisis, this only appeared to add fuel to the fire. The importance of acting swiftly and involving the UN showed the alarm and genuine uncertainty that key decision makers in the NSC felt at the time.
이 메모에서 브레진스키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할 미국 정책의 맥락을 제공했다. 그러나 메모는 특히 소련의 점령이 장기화했을 경우 카터와 (후속) 레이건 행정부가 대아프가니스탄 정책으로 명확히 무엇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제시하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접근 방식이 명확해졌지만, 소련 침공 직후에는 무엇을 해야할지에 관해 큰 우려가 제기되었다. 같은 날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결론 요약'에서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진출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이 나왔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평정하기" 직전에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이는 이 지역에서 미국의 이미지와 영향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Special Coordination Committee Meeting 26 December 1979) 이란 혁명과 그에 따른 인질 위기[역자주2]는 이런 사태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속히 행동하는 것과 UN을 관련시키는 것의 중요성은 당시 NSC의 주요 의사결정자들이 느꼈던 경각심과 진정한 불확실성을 보여주었다.
Anthony Teitler. (2020). US Policy Towards Afghanistan, 1979-2014: 'A Force for Good', Routledge; 1st Edition

스티브 콜(Steve Coll)의 2004년 책도 브레진스키가 처음 며칠간 작성한 메모들과 소련의 침공으로 당대 카터 행정부가 처한 곤경을 근거로 들며 유도설을 일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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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mporary memos—particularly those written in the first days after the Soviet invasion—make clear that while Brzezinski was determined to confront the Soviets in Afghanistan through covert action, he was also very worried the Soviets would prevail. Those early memos show no hint of satisfaction that the Soviets had taken some sort of Afghan bait. Given this evidence and the enormous political and security costs that the invasion imposed on the Carter administration, any claim that Brzezinski lured the Soviets into Afghanistan warrants deep skepticism.
(브레진스키가) 당시 작성한 메모들, 특히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후 처음 며칠간 작성된 메모들은 브레진스키가 비밀작전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을 상대하기로 결정했지만 동시에 소련이 승리할 것이라고 매우 우려하고 있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메모들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의 덫에 걸려들었다는 만족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메모들과 소련의 침공이 카터 행정부에 부과한 막대한 정치적, 안보적 비용들을 고려하면, 브레진스키가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으로 유인했다는 주장은 깊은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Steve Coll. (2004). Ghost Wars: The Secret History of the CIA, Afghanistan, and Bin Laden, from the Soviet Invasion to September 10, 2001, Penguin Press, p.593.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 전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반공 이슬람주의 반군을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소련의 개입을 촉발한 원인은 아니었다. 소련이 개입한 근본적인 원인은 아프가니스탄에 집권한 인민민주당 내 할크(Khalq)파와 파르참(Parcham)파 사이의 지난한 권력투쟁과 그로 인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의 총체적인 분열상, 공산정권의 무지성 소련식 공산주의 개혁과 이에 뒤따른 무자헤딘의 봉기, 집권 3개월만에 전임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를 포함해 최소 7천명을 처형한 아민의 잔혹성[14], 타라키의 실각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 내 소련 영향력의 축소, 마지막엔 타라키 살해 후 아민이 사실은 CIA의 끄나풀이라고 KGB가 유포한 역정보에 소련 자신이 낚여버린 것이었다.

아민이 미국과 접촉하고 있다고 여긴 정치국은 강하게 분노하며, 유리 안드로포프,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중심으로 해서 미국에 포섭되었다고 여겨지는 아민을 제거하고 아프가니스탄을 구하겠다는 입장이 큰 지지를 받았고, 결국 정치국이 우스티노프-안드로포프 계획을 승인했다. 만약 자신들이 믿는 대로 아프간이 친미 국가가 되고, 아프간에 미국 핵무기가 배치된다면, 사실상 소련 전역이 미국 핵미사일의 공격권 안에 들게 되기 때문이었다. 일이 이 지경까지 가자 결국 브레즈네프도 정치국원들의 의견에 수긍하고 개입 결정에 서명을 하면서 소련군이 아프간으로 파견되어 아프간 전쟁이 시작된다

이 기나긴 글을 인내심 있게 읽었다면 느끼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소련의 자충수이므로 미국의 유도니 뭐니 탓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브레진스키는 개전 직후 파키스탄의 아프간 접경 지대를 방문하는 등 미국의 아프간 공작의 큰 그림을 그린 인물이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장기화를 목표로 한 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에 맞서기 위해서 친미 파키스탄의 핵무장도 용인해야 한다고 제안했었다.# 당시 브레진스키는 소련이 파키스탄 남서부 발루치스탄에 집중거주하는 발루치인의 분리주의를 선동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3. 유라시아 지정학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 American Primacy and Its Geostrategic Imperatives, 1997), 전략적 비전(Strategic Vision: America and the Crisis of Global Power, 2012) 등의 저서를 남겼다. 주로 대륙세력(Heartland) 이론에 기반을 둔 유라시아(Eurasia) 지정학을 강조했고, 이를 중심으로 미국의 패권 강화, 특히 러시아 견제 방안을 역설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우크라이나를 서방 진영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레진스키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없이 제국이 될 수 없고, 우크라이나를 장악하면 자연스럽게 제국이 된다"고 말하여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15]
최근의 국제 정세로 볼 때, 유라시아의 지도 위에서 적어도 다섯 개의 중요한 지정 전략적 게임 참가자와 다섯 개의 지정학적 추축(이 중에서 두 국가는 부분적으로 게임 참가자로서 자격을 지니고 있다)을 변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 독일 · 러시아 · 중국 · 인도가 중요하고 역동적인 게임 참가자인 반면, 영국 · 일본 · 인도네시아는 비록 중요한 국가이기는 하지만 게임 참가자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 우크라이나 · 아제르바이잔 · 남한 · 터키 · 이란 등은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추축이다. 터키와 이란은 어느정도 그들의 제한된 역량을 동원하여 지정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64p

1970년대 말에 카터 행정부에서 자카르타에서의 남·북·미 3자 고위급 회담을 비밀리에 추진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당시에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던 카터 행정부가 철군 반대 여론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헨리 키신저는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했다.

2000년대에 Foreign policy에 기고한 글에서, 중국의 부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하여, 존 미어샤이머 교수와 논쟁하였다. 미어샤이머는 공격적 현실주의 이론에 따라서 중국과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고, 브레진스키는 중국이 경제성장을 추구하므로 군사적 충돌을 피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4. 미국 쇠퇴론

아래 어록 문단에 서술되었듯이, 냉전 종식 직후인 1990년대 말에 나온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는 당시의 미국의 패권에 대하여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선 후에는 자신감이 크게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미국의 마지막 기회> 에서는 상당히 걱정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말년에 저술한 <전략적 비전>(부제: 미국과 세계 세력의 위기(America and Crisis of Global Power))에서는 포기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16]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서서히 쇠퇴하더라도 중국이 미국을 직접 대체할 정도의 패권을 가지지는 못할 것이고, 세계가 다극화되면서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쇠퇴하면서 지정학적 위기에 처할 국가들로, 한국을 포함하여 8개 국가를 지목했다.#[17] 이미 인도, 일본, 러시아,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쇠퇴에 대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After America, How does the world look in an age of U.S. decline? Dangerously unstable. 그리고 미국이 쇠퇴하면서 미국의 핵우산 안보공약의 신뢰성이 의심받고, 한국이 핵무장을 시도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미국 쇠퇴하면, 한국 핵 무장 가능성


브레진스키는 상대적 쇠퇴를 주장한다. 그는 <전략적 비전> 91~94p에서 미국 쇠퇴의 시나리오로 3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시나리오는 대규모 금융위기, 둘째 시나리오는 미국에서 삶의 질, 국가 기반시설, 경제 분야 경쟁력, 사회복지가 쇠퇴하는 국내 여건의 악화, 셋째 시나리오는 대외 문제의 실패이다.

5. 기타

한국에서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나, 미국에서 이 사람의 이름은 폴란드어 발음을 존중해주어 '즈비그니에프'(/zbɪɡnjɛf/)라고 발음한다. 그러나 성인 Brzeziński는 폴란드어식인 브제진스키(/bʐɛˈʑij̃skʲi/)가 아니라 영어화된 발음인 브레진스키(/brəˈzɪnski/)라고 발음한다.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폴 볼커 전 뉴욕 연은 총재를 물러났던 윌리엄 밀러 연준의장의 후임으로 천거하기도 하였다.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다.

첫째 아들인 이안 브레진스키는 외교 전문가이자 공화당원으로 조지 W. 부시 1기 행정부의 국방부차관을 역임하였다. 둘째 아들인 마크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외교관으로 현재 주 폴란드 미국 대사로 재직중이다.

막내딸 미카는 MSNBC의 정치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18]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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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무장관을 비롯한 일반 외교관을 기준으로는 조지 케넌, 존 포스터 덜레스, 딘 러스크 등도 포함된다.[2] 또한 키신저, 스코크로프트 두 사람이 공화당(닉슨,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재직했던 반면, 브레진스키는 민주당(카터) 행정부 시절 백악관에 재직하였다.[3] 브레진스키 이전부터 민주당은 개입주의 성향을 띄었지만 현재와 같은 적극적인 개입 성향으로 기운 것은 브레진스키의 영향력 때문이다. 특히 코소보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에서 드러나는 민주당의 반러시아 기조가 브레진스키의 영향이라는 평가가 많다.[4] 다만 Foreign policy에서 미어샤이머와의 중국 부상에 관한 논쟁에서 중국의 평화적 부상을 예측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에 대한 신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5] Zbigniew Brzezinski was born in Warsaw, Poland, on March 28, 1928 into an aristocratic Roman Catholic family originally from Brzeżany, Tarnopol Voivodeship (then part of Poland, currently in Ukraine). The town of Brzeżany is thought to be the source of the family name. Brzezinski's parents were Leonia (née Roman) Brzezińska and Tadeusz Brzeziński, a Polish diplomat who was posted to Germany from 1931 to 1935; Zbigniew Brzezinski thus spent some of his earliest years witnessing the rise of the Nazis. From 1936 to 1938, Tadeusz Brzeziński was posted to the Soviet Union during Joseph Stalin's Great Purge, and was later praised by Israel for his work helping Jews escape from the Nazis. #[6] In 1938, Tadeusz Brzeziński was posted to Montreal as a consul general. The Brzezinski family lived proximate to the Polish Consulate-General, on Stanley Street. #[7] 정작 게이츠 자신은 미국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유도했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일축했다.[8] 소련이 폭풍333 작전을 발동하여 당시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대통령이자 광적인 공산주의자인 하피줄라 아민을 살해한 날짜이다. 광적인 공산주의자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며 소련마저 아민의 잔혹성에 경악했다.[9] Le Nouvel Observateur. 현 롭스(L'Obs).[10]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소련 몰락에 일조했으니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미국의 인식에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분명히 미국의 핵심적 국익에 해가 되는 일이었다. 상대가 사담 후세인 치하 이라크처럼 사방천지에 적을 만들어놓고 쿠웨이트 침략으로 선빵까치 친 모지리가 아니라 소련이었기 때문에 직접 충돌까지 가지 않은 것이지.[11] Kepel, Gilles (2006). Jihad: The Trail of Political Islam. I.B. Tauris. pp. 138–139, 142–144. ISBN 978-1-84511-257-8.[역자주1] '공격받지 않는 안전지대'를 가리키는 정치학계의 관용어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은 캄보디아라오스 일대에 호치민 루트를 건설하여 '성역'으로 사용했다. 이는 결국 미국과 남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초래했다.[역자주2] 1979~1981년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을 가리킨다.[14] 특히 타라키를 죽여버린 것은 당시 소련의 지도자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를 충격에 빠뜨렸다. 아민을 가리켜 개새끼(bastard)가 따로 없다고 직설적으로 욕했을 정도인데 왜냐하면 타라키는 브레즈네프 자신이 보호하겠다고 공개적으로 확언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KGB 의장이자 후임 서기장이 된 유리 안드로포프도 타라키 암살을 계기로 아민 축출을 결심했다. Rodric Braithwaite. (2012). Afgantsy: The Russians in Afghanistan 1979-89, Profile Books, p.73[15] 미국의 격월간 잡지 <포린 어페어스>의 1994년 3-4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유래한 내용이다. 원문은 "Without Ukraine, Russia ceases to be an empire, but with Ukraine suborned and then subordinated, Russia automatically becomes an empire."라고 나온다.[16] 전자는 9.11과 아프간/이라크전으로 반미 감정의 국제적 확산 속에서 쓴 것이고, 후자는 세계금융위기로 미국의 패권 위축이 가시화된 상황을 배경으로 했다.[17] 나머지 7개국은 대만, 우크라이나, 조지아, 벨라루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그리고 이스라엘 및 중동권 국가들이다.[18] 2006년 패리스 힐튼이 저지르던 기행으로 뉴스가 도배되던 시절, 생방송 뉴스에서 패리스 힐튼 소식이 적힌 뉴스 원고를 읽으려다가 이따위 소식을 전하는게 신물이 난다며 그자리에서 원고를 라이터로 불태우려다 옆에서 말리는 바람에 실패했는데, 이후 기어이 파쇄기에 원고를 갈아버리는데 성공했다.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패리스 힐튼 소식으로 해외 연예 토픽란이 도배되다시피하던 시절이었기에 미카 브레진스키의 행동을 속시원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