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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01:56:37

쥐정

거정에서 넘어옴
파일:사법원장거정.jpg
난징 국민정부 2대 사법원장
한문 居正
한국식 독음 거정
영문 Ju Zheng
매천(梅川)
각생(覺生)
출생 1876년 11월 8일 청나라 호북성 황주부 광제현
사망 1951년 11월 23일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호세이대학 예비부 졸업
니혼대학 법률부 졸업
직업 정치가
종교 불교
사법원장
재임 기간
2대 1932년 5월 21일 ~ 1948년 6월 24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국민혁명2.3. 반장전쟁2.4. 말년
3. 주요경력4. 매체에서5. 참고문헌
5.1. 저서5.2. 논문

1. 개요

청말의 혁명가, 중화민국의 정치인. 국민당 보수파인 서산회의파의 일원이었으며 반장활동을 하다가 만주사변 이후 중단하였다. 중화민국 사법원장을 지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호북성 황주부 광제현에서 태어났다. 청말부터 공진회를 이끌며 혁명활동에 종사했으며 호세이대학 예비부를 거쳐 니혼대학 법률부를 졸업했다. 이후 중국 동맹회에 가입, 쑨원과 함께 수차례 청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조직했다가 싱가포르, 영국령 버마로 망명해야 했다. 1907~1910년 기간 동안 후한민, 왕징웨이 등과 함께 동남아의 혁명세력이 창간한 <중흥일보>의 주요 필진으로 활약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여 호북 군정부가 수립되자 상하이에서 직접 와서 리위안훙에게 도독에 취임할 것을 적극 설득했다. 리위안훙이 변발을 자르고 호북군정부 도독에 취임하자 혁명의 의의에 대해 강연하며 혁명을 지원했다. 이후 리위안훙과 황싱의 갈등이 빚어지자 혁명세력의 일치단결을 위해 황싱이 리위안훙이 임명한 민군 전시총사령에 취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화민국 건국 이후 1912년 3월 3일, 동맹회 본부를 상하이를 거쳐 난징으로 이전, 공개정당으로 탈바꿈하였으며 이때 동맹회 간사로 선출되었다.
파일:거정.jpg
젊은 쥐정

1913년 계축전쟁이 발발하자 상하이에서의 혁명을 지휘, 천치메이, 장제스와 함께 유현과 고밀 일대를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결국 위안스카이에게 진압당해 8월 13일 오송 포대에서 철수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4년 6월 22일, 도쿄에서 중화혁명당 간부선거회를 열어 쑨원을 총리로 추대했으며 7월 8일 정식으로 중화혁명당 성립대회를 개최, 당무부장에 임명되었다. 호국전쟁에서 위안스카이가 타도되어 구국회와 약법이 복구되자 린썬, 마군무 등과 함께 객려파라 불리는 구 국민당의 급진파들을 규합하여 1916년 병진구락부를 조직하였다. 호법운동이 시작되자 광저우로 남하하여 민우사를 조직, 쑨원을 옹호하며 남북화의에 반대, 북방을 무력으로 토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후 익우사 계열과 연합하여 헌법 제정, 정부총통 선거, 정식 정부 수립을 시도했으나 정학회 계열의 반대로 실패했다.

1919년 중국 국민당이 조직되자 국민당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23년 1월 2일, 중국 국민당 개진대회가 소집되고 중국 국민당 당강과 중국 국민당 총장이 발표되자 1월 23일, 쑨원의 지명에 따라 중국 국민당 참의에 임명되었다.

2.2. 국민혁명

이후 국공합작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1925년 국공 갈등을 자신의 카리스마로 봉합하던 쑨원이 사망하고 이어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후한민, 쉬충즈, 린썬, 쩌우루 등의 국민당 우파가 숙청되자 반발, 쉬충즈로부터 베이징으로 가는 여비와 배표를 지원받아 공산당을 국민당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하는 서산회의에 참여했고 '중국이 불평등한 국제지위에서 벗어나 국가와 민중의 이익이 충분히 발전되도록 하는 것'이 국민혁명의 최종 목표라고 천명하며 반공 및 반제활동을 벌였다. 광저우 중앙은 쥐정에게 서면으로 반성을 촉구하고 이에 2개월 안에 따르지 않으면 제명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으나 상하이 당중앙을 수립하여 참여한 쥐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광저우 중앙에서 제명되었다. 중산함 사건 이후 장제스가 샤오위안충을 파견하여 합작의사를 타진하여 상하이의 쉬충즈의 집에서 샤오위안충과 만났으나 청당을 실시하기 전에는 합작이 없다는 장쥐 등의 강경한 발언으로 인해 합작은 무산되었다.

그러던 중 국민혁명 과정에서 국공결렬이 일어나 영한합작이 이루어지자 참여했다. 자신들의 정통성을 부정당한 왕징웨이, 구멍위, 간나이광 등 개조파와 호남군벌 탕성즈가 반 특위활동을 벌이자 구강과 우한에서 이들과 직접 만나 설득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때 리쭝런, 바이충시를 비롯한 계계군벌과 합작하여 특위에 훈정실시위원을 추천할 권한을 받는 등 상당한 지위를 확보했으나 장제스가 복직하면서 위기가 찾아오자 이를 반대했다. 하지만 장제스 복직을 도모하던 광동파 등의 견제로 인해 일본 파견이 결정되었다. 11월 22일, 당계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난징 참안이 발생하자 셰츠, 쩌우루 등과 함께 그 배후로 몰리면서 정치적인 입지가 크게 좁아졌고 1927년 12월 3일에 열린 4중전회 1차 예비회의에서 직권정지, 행동감시의 처분을 받았다.

결국 서산회의파의 권력 기반이었던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가 완전히 해체되자 실의에 빠져 국민당 중앙의 결정에 따라 쩌우루, 쉬충즈와 함께 일본으로 시찰을 떠나게 된다. 이후 쩌우루가 미국으로 떠날 때 일본에 남길 희망하여 일본에 체류하였다.

2.3. 반장전쟁

쥐정은 호세이 대학 유학 경험 덕에 일본에 친구가 많았는데 이들과 중국의 현상에 대해 논의하다가 상하이로 귀국, 상하이 근교에 칩거하며 서산회의파의 기관지인 <강남만보>를 발간하며 국민당 노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거나 반장을 선전하였다. 그리고 셰츠의 도움을 얻어 국민당 내부의 반공파 활동을 정리한 <청당실록>의 편찬에 매달렸다. 1929년 2월, 계계군벌장제스호남 사건으로 충돌하자 장지본과 접촉하여 내전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난징 국민정부가 무력토벌을 선포하여 1차 장계전쟁이 발발하자 격분, 반장활동에 투신했다.

1929년 5월, 쥐정은 셰츠, 쉬충즈와 함께 광저우에 결집하여 계계군벌과의 합작을 시도했다. 5월 18일, 서산파는 계계군벌과의 합작을 합의하였으나 장제스가 계계군벌을 완전히 토벌함에 따라 평진 지역으로 피신해야 했다. 서산파의 계속되는 반장활동에 격분한 장제스는 쥐정, 셰츠, 쩌우루, 쉬충즈 등을 붙잡아 총살하라는 지령을 하달했지만 서산파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장선언>을 발표,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정파에게 장제스를 토벌할 것을 호소했다. 1차 장풍전쟁, 2차 장풍전쟁, 2차 장계전쟁, 장당전쟁 등이 잇달아 진압된 후 1929년 12월 12일, 국민당 중앙은 쥐정의 당적을 박탈하기로 결의하였으나 12월 13일, 쥐정은 오히려 장제스의 출국을 요구하는 통전을 발표했다. 리례쥔 등 국민당 원로들이 이에 호응했고 장제스는 국무회의 명의로 쥐정에게 수배령을 하달함으로 탄압의 강도를 높였다.

1930년 옌시산이 마침내 반장진영에 가담함으로 중원대전이 발발하였다. 쥐정은 베이핑 국민정부 수립 및 태원약법 작성에 참여했으나 장쉐량이 장제스의 편을 들어 참여함에 따라 베이핑 국민정부는 붕괴되었고 서산파는 베이핑에서 타이위안으로 도주해야 했다. 이어 옌시산이 하야를 선언하고 베이핑 국민정부를 해체하자 타이위안에서도 탈출했다. 이후 슝스후이 등과 접촉하여 반장을 시도하다가 결국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구금 중에 불경 공부에 매진하였으며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쥐정은 석방되었고 상하이로 돌아가 항일을 호소하는 연설을 발표했다.

2.4. 말년

1차 양광사변의 결과로 1931년 12월 15일, 장제스가 하야하자 쥐정은 1931년 12월 28일 중국 국민당 제4기 1중전회에서 중앙집행위원 겸 상임위원 겸 사법원 부원장에 선출되었다. 1932년 5월 사법원 원장으로 승진했다. 11월에 최고법원원장에 임명, 1935년까지 재직했다.

1947년 4월 7일 국민정부 조직법이 수정됨에 따라 사법원 원장에 재선출되었다. 1948년 헌정 실시 이후 109명의 추천을 받아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 초대 총통 후보로 출마했다. 1948년 4월 19일의 총통 선거대회에서 269표를 획득하여 2430표를 얻은 장제스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고 첫 헌정내각으로 웡원하오 내각이 출범하면서 6월 23일, 왕충후이가 신임 사법원장에 임명되어 6월 24일에 사법원장에서 물러났다. 1949년 5월 허잉친 내각이 붕괴되자 총통 대행 리쭝런으로부터 신임 행정원장으로 지명되었으나 5월 31일의 입법원 투표에서 303명 중 151명의 찬성밖에 얻지 못하여 임명안이 부결, 6월 3일 입법원 회의에서 옌시산이 행정원장에 선출되었다.

1949년 6월 11일, 중국 국민당 상무위원회는 비상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장제스, 리쭝런, 옌시산, 쑨커, 위유런, 허잉친, 오충신, 장췬, 우톄청, 주가집, 천리푸와 함께 쥐정을 비상위원으로 추대하였다. 리쭝런이 미국 망명을 위해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하자 쥐정은 국민당 중앙의 명령을 받고 홍콩에 파견되어 리쭝런에게 복직하여 정부를 지휘할 것을 요청했으나 리쭝런은 신병 치료를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끝끝내 미국으로 달아났다.

국공내전 이후 대만으로 이주하여 국민당 원로로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1950년 6월 22일, 천리푸와 소쟁의 CC파 계열의 부탁을 받고 쩌우루, 위유런과 함께 장제스에게 국민당 개조방침 선포를 청하였으나 장제스는 도리어 장징궈의 권력 승계에 방해가 되는 천리푸를 미국으로 추방해버렸다. 이후 1951년 타이베이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주요경력

난징 국민정부 역대 사법원장
파일:중화민국 사법원 휘장.svg
1대 2대 헌정실시
왕충후이 쥐정
( 1932년 5월 21일 ~ 1948년 6월 24일)

4. 매체에서

5. 참고문헌

5.1. 저서

5.2.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