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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30 17:10:00

주병화


파일:독립운동가주병화선생님.jpg
출생 1891년(?)[1]
경상남도 웅천군 북부동
(現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2]
사망 1931년 1월 11일(향년 41세)
평안남도 평양부 평양형무소
(現 평양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 -119
본관 신안 주씨[3]
배우자 이순이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 표창

1. 개요

진해에서 활동한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 생애

경상도 웅천군 북부동 백일마을에서 출생했다.

1913년 경화동에서 대서업을 개업, 1915년 진해에서 처음으로 민족운동을 하는 청년회를 결성했다.

1916년 대정학교의 운영을 지원하는 진해장학회의 회장이 되고 뒤에 생도보호회장도 되어 일제의 민족차별 교육정책 아래에서도 우리고장의 후진들이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야학교를 설립하였다

1920년 3.1 운동 후 창간된 동아일보조선일보의 지국을 경영하여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3년 동지들을 규합하여 소작회를 창립하여 일본인과 소작쟁의에 들어갔다. 소작회를 조직한 후 간악한 일본인과 그를 비호하는 일본관헌과의 투쟁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1927년 소작쟁의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민족운동가의 결속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창원군 지부를 결성하여 지회장을 맡았다.

1931년 마산에서 회의를 마친 귀로에 급성맹장염으로 당시로서는 가장 시설이 좋았던 해군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한 군의관이 격렬한 항일 투쟁을 하는 민족운동가임을 연락받고 치료를 소홀히 하여 41세를 일기로 비명에 가고 말았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독립유공자로서 포상을 받았다.

2016년 6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셨다.



[1] 41세로 운명하셨다는 기록을 토대로 한국나이로 계산한 것이다. 하지만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검색 시스템에도 생년은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사실은 불명확하다.[2] 신안 주씨 집성촌이다. 주기용 제헌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웅천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