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베드퍼드 백작 존 러셀 John Russell, 1st Earl of Bedfor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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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존 러셀 John Russell | |
출생 | 1485년경 | |
잉글랜드 왕국 도싯주 베릭바이스와이어 | ||
사망 | 1555년 3월 14일 (향년 69~70세) | |
잉글랜드 왕국 버킹엄셔 체니스 | ||
아버지 | 제임스 러셀 경 | |
어머니 | 앨리스 와이즈 | |
배우자 | 앤 사프코트 | |
자녀 | 프랜시스 러셀 | |
직위 | 초대 러셀 남작, 초대 베드퍼드 백작, 콘월, 데번, 도싯, 서머셋 보안관, 버킹엄셔 의원, 대제독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정치인. 헨리 8세와 에드워드 3세, 메리 1세 치세에 활동했다. 1865~1866년 영국 총리를 역임한 존 러셀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을 포함한 이후의 모든 베드퍼드 백작과 공작 등 러셀 가문의 조상이다.2. 생애
1485년경 도싯주의 배릭바이스와이어에서 도싯주의 기사 존 러셀과 데번주의 타비스톡 인근 시드넘의 지주 토머스 와이스의 딸인 앨리스 와이즈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인 헨리 러셀은 부유한 와인 상인이자 운송업자였으며, 하원에서 4차례나 웨이머스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440년 4월 증서에 따르면, 헨리 러셀은 자신과 상속인들이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임대료로 지불하고 소유할 도체스터의 임대 주택을 딸 크리스티나와 그녀의 남편인 츤테발의 월터 셰버렐에게 양도했다. 이 증서에서, 헨리는 자신을 스티븐 러셀 경과 그의 아내 앨리스의 아들이자 상속인이라고 언급했다. 이 앨리스는 오랫동안 베릭바이스와이어 마을을 소유했던 드 라 투르 가문의 상속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헨리 러셀은 '가스코인'으로 일컬어졌는데, 아마도 가스코뉴에서 와인 무역에 오래도록 종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1442년 사면령에서, 상인 웨이머스의 헨리 러셀을 '젠트리 헨리 가스코인'으로 언급했다. 훗날 제2대 베드퍼드 백작 프랜시스 러셀에 의해, 러셀 가문은 오랫동안 베릭에서 북동쪽으로 3마일 떨어진 도싯의 킹스턴 러셀에서 기원한 고대 러셀 가문의 후손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1930년 족보 학자 글래디스 스콧 톰슨은 런던에서 출간한 <2세기의 가족 역사>(Two Centuries of Family History)에서 고대 러셀 가문의 실체는 없다고 밝혔다. 이 저서는 베드퍼드 백작의 초기 혈동에 대한 포괄적이고 학술적인 저서였다.
존 러셀의 초기 생애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기록에 언급되는 시기는 1506년 1월 웨이머스에서 난파된 카스티야 국왕 펠리페 1세와 그의 아내 후아나 1세를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의 궁정에 안내했을 때였다. 1508년, 그는 헨리 7세의 시종장이 되었고, 1509년 4월 21일 새 잉글랜드 국왕이 된 헨리 8세 치세에서도 시종장 직위를 유지했다. 1513년에는 헨리 8세와 함께 프랑스 원정에 나서 테루안과 투르네 공략전에 참여했다.
이후 브르타뉴의 모를레를 함락하는 과정에서 화살에 맞아 오른쪽 눈을 실명했으며, 1522년 7월 2일 서리 백작 토머스 하워드에 의해 총각 기사 작위를 받았다. 1523년에는 서리 백작의 아버지인 제2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부관으로 부임해 수석 기사가 되었으며, 1525년 2월 23일과 24일에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가 유럽의 패권을 놓고 벌인 파비아 전투를 참관했다. 1528년에는 서머싯과 도싯의 보안관으로 활동했다. 1527년 헨리 8세의 지시에 따라 토머스 와이엇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청원했다.
1529년 버킹엄셔 의원에 발탁되어 1536년까지 버킹엄셔의 이익을 대표했다. 1536년 10월 잉글랜드 북부에서 은총의 순례 봉기가 발발했을 때, 자기 영지에서 군대를 모아 제4대 슈루즈버리 백작 조지 탈보트, 윌리엄 파 경[1], 윌리엄 곤슨 경, 프랜시스 브라이언 경, 사우슴패턴 백작 윌리엄 피츠윌리엄과 함께 글로스터에 병력을 집결했다. 1537년 윌리엄 폴렛의 뒤를 이어 왕실 재정 담당관이 되었고, 1539년 3월 9일 윌리엄 킹스턴이 그의 뒤를 이을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또한 1538년에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539년에는 과거 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가 소유했다가 1521년 반역 혐의를 적용당해 처형당한 뒤 왕실에 몰수되었던 아머샴 영지를 받았다.
1539년 3월 9일자 특허장에 따라, 존 러셀은 잉글랜드 귀족 작위인 '초대 러셀 남작'에 선임되었다. 6주 후인 1539년 4월 24일, 그는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1539년 7월, 그는 초대 엑서터 후작 헨리 코트니의 뒤를 이어 콘월의 스태너리 경이 되었으며, 1553년 아들 프랜시스 러셀이 그의 뒤를 이을 때까지 콘월에서 사법 및 군사 업무를 담당했다. 이와 동시에, 1539년 7월에 콘월의 고위 집사 직책을 맡았다. 한편 헨리 8세가 잉글랜드 수도원을 해산한 후, 존 러셀은 자신과 후계자들을 위해 던크스웰의 시토회 수도원 외에도 타비스톡 수도원의 영지를 인수해는데, 이 영지에는 30개가 넘는 토지와 여러 교회의 후원이 포함되었다. 또한 그는 데번, 콘월, 서머셋, 도싯의 여러 영지들을 받았고, 마찬가지로 해산된 세인트올번스 수도원의 일부도 상속받았다.
1540년, 존 러셀은 사우샘프턴 백작 윌리엄 피츠윌리엄의 뒤를 이어 해군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9명의 국무장관 중 첫 번째 위치가 되었다. 그는 1542년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자리를 물려줄 대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1542년 10월 윌리엄 피츠윌리엄의 뒤를 이어 내무장관이 되었고, 1555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또한 154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의 고등 집사를 역임했으며, 총장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제4차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1544년 몽트뢰유 공방전을 이끌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1545년 불로뉴쉬르메르 공방전에서 선봉대를 지휘했으며,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가 사망한 후 유언장 집행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547년 에드워드 6세의 대관식에서 고위 집사로 참여했다. 이후 에드워드 6세로부터 미첼 번에 있는 몰타 기사단 사제관 자리, 워번의 시토회 수도원, 손니 베네딕토회 수도원, 그리고 엑서터에 있는 도미니크회 수도원을 포함한 더 많은 토지를 받았다. 1549년 8월 4일, 그는 잉글랜드 서부에서 일어난 가톨릭 신자 봉기 진압 작전 중 벌어진 우드버리 커먼 전투에서 왕실군을 지휘했다. 그 후 1550년 1월 19일자 특허장에 의해 초대 베드퍼드 백작이 되었다. 한편, 그는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던 초더 서덜리 남작 토머스 시모어를 찾아가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의사가 있는지 대놓고 물었고, 한동안 그와 논쟁을 벌였다. 그 후 토머스 시모어가 에드워드 6세를 납치하려 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자, 그가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흑심을 품었다고 증언함으로써 참수형에 처해지는 데 일조했다.
1552년, 존 러셀은 데번, 콘월, 서머싯, 도싯 일대에서 보안관에 선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그는 나중에 콘월, 데번, 도싯 주의 보안관 직위를 제2대 바스 백작 존 부르시에에게 물려줬다. 1552년 5월 4일 미들식스에 있ㄴ슨 롱 에이커를 수여받았는데, 이곳은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가 소유했다가 1522년 1월 22일 반역 혐의로 타워 힐에서 참수된 후 왕실에 몰수되었던 영지였다. 1553년 6월 21일 에드워드 6세의 지시에 따라 제인 그레이에게 왕관을 양도하는 조약에 서명한 귀족 26인 중 한 명이었지만, 나중에 대세가 메리 1세 쪽으로 기울자 즉시 그녀에게 달려가 충성을 서약했다. 이후 메리 1세와 결혼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잉글랜드로 온 펠리페 오아자를 시중 들기 위해 파견되었다. 1554년 3월 14일 버킹엄셔 체니스에 사망했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에 있던 교구 교회의 베드퍼드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앤 사프코트(? ~ 1559): 헌팅던셔의 가이 사프코트의 딸. 첫번째 남편 존 브로튼과의 사이에서 아들 1명(존 브로튼), 딸 3명(캐서린, 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을 두었다.
- 프랜시스 러셀(1527 ~ 1585): 제2대 베드퍼드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