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7C2C3B><tablebgcolor=#7C2C3B>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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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킹 | 2대 페인터 | 3대 펜튼 | 4대 그린우드 | 5대 라이얼 | |
6대 마카리 | 7대(대행) 보이스 | 8대 본즈 | 9대 레드냅 | 10대 로더 | |
11대(대행) 브루킹 | 12대 파듀 | 13대 커비실리 | 14대(대행) 킨 | 15대 졸라 | |
16대 그랜트 | 17대(대행) 킨 | 18대 알라다이스 | 19대 빌리치 | 20대 모예스 | |
21대 펠레그리니 | 22대 모예스 (모예스 체제(2기)) | 23대 로페테기 (로페테기 체제) |
잉글랜드의 前 축구감독 | ||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이름 | 존 라이얼 John Lyall | |
본명 | 존 앵거스 라이얼 John Angus Lyall | |
출생 | 1940년 2월 24일 | |
잉글랜드 에섹스 주 일포드 | ||
사망 | 2006년 4월 18일 (향년 66세) | |
잉글랜드 서퍽 태팅스톤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포지션 | 수비수 | |
소속 |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유스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55~1959) |
선수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59~1963) | |
감독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64~1971 / 유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71~1974 / 수석코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74~1989) 입스위치 타운 FC (1990~1994) | |
국가대표 |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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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잉글랜드)의 축구인으로, 해머스의 격동기 시절 감독으로 손꼽힌다.2. 일생
2.1. 선수 시절
웨스트햄 선수 시절 모습.
1940년 런던 인근에 있는 에섹스 주의 일포드에서 태어나 1955년, 15세의 나이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감독인 테드 펜턴의 눈에 들어 웨스트햄의 유소년팀에 입단해 1957년 FA 유스컵 파이널에 진출하는 데 공헌을 했다(결과는 맨유 유소년팀에게 패배.).
이렇게 승승장구한 그는 1959년에 1군으로 프로 무대에 데뷔했으나, 발목 부상으로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1963년에 은퇴한다.
2.2. 감독 시절
2.2.1.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선수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64년에 파트타임으로 유소년팀 감독 자리에 앉기 시작하여 1967년부터 풀타임으로 바뀌어 정식 지도자 노릇을 하게 되었고, 거기서 몸담는 동안 트레버 브루킹, 프랭크 램파드 시니어, 해리 래드냅 등 후학들을 육성했다. 1971년에는 론 그린우드 감독의 부름을 받아 수석코치로 승진했다.
1975년 채리티 실드 당시의 모습. 왼쪽은 1975년에 리그 우승팀 더비 카운티 감독이었던 데이브 맥키.
1973/74 시즌이 끝나고 그린우드 감독이 총감독으로 승진하자 그는 감독직에 부임하여 1974/75 시즌 FA컵에서는 제자 트레버 브루킹, 빌리 본즈, 프랭크 램파드 시니어 등의 기존 멤버들을 이끌고 결승전에서 풀럼 FC를 꺾어 우승까지 시켰으나, 리그에서는 엄청나게 부진하여 1977/78 시즌에 20위로(당시 리그는 총 22팀.) 아깝게 강등당하였다.
1980년 FA컵 우승 당시의 모습. 왼쪽 선수가 빌리 본즈, 오른쪽 선수가 제프 파이크.
이후 그는 리빌딩에 들어가 1979년에는 QPR로부터 골키퍼 필 파크스를 56만 5천 파운드로 영입했고, 동시에 스코틀랜드의 던디 유나이티드로부터 수비수 레이 스튜어트를 43만 파운드로 영입해서 전력을 강화시켜 1980년 FA컵 결승전에서 아스날 FC를 꺾어 우승시켰고, 1981년에는 1부 리그 복귀에 성공하여 1980년대 내내 중위권을 수성했다.
이후 198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트레버 브루킹, 프랭크 램파드 시니어가 팀을 떠나고 빌리 본즈가 노쇠하자 라이얼은 토니 코티, 앨런 디킨스, 조지 패리스, 토니 게일, 스티브 포츠 등의 젊은 선수들을 등용하여 1985/86 시즌에 팀 최고 기록인 3위까지 달성하는 대 성과를 이룩했으나, 1988년에 빌리 본즈가 은퇴하고 전력이 급강하하여 1988/89 시즌에는 19위로(당시 리그는 총 20팀.) 강등당했다. 결국 라이얼은 이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났다.
2.2.2. 입스위치 감독 시절
1989년에 해머스를 떠난 이후 토트넘 핫스퍼의 감독인 테리 베너블스의 부름을 받아 스퍼스에서 스카우트로 일하다가 1990년 4월에 입스위치 타운의 회장인 패트릭 코볼드의 부름을 받고 입스위치의 감독으로 취임. 이곳에서 데이비드 리니건, 로메오 존더반, 믹 스톡웰, 사이먼 밀튼, 크레이그 포레스트, 크리스 키웜야, 프랭크 얄롭 등을 중심으로 한 스쿼드를 형성하여 리빌딩을 한 끝에 1991/92 시즌에는 2부 리그에서 우승하여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여 프리미어리그의 원년 멤버가 되었다.
1993년에 올덤 애슬레틱으로부터 이적한 수비수 겸 공격수인 이안 마셜과 계약하는 모습.
이후 승격 첫 시즌인 1992/93 시즌에 16위로 대탈출에 성공시킨 뒤 1993/94 시즌에 라이얼 감독이 단장까지 겸하자 믹 맥기븐 코치에게 지휘를 맡겨 19위로 강등을 면했고(당시 리그는 총 22팀.) 1994/95 시즌에 라이얼이 단독 지휘를 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1994년 12월에 사임한 뒤 더 이상 감독직을 맡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