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함안 조씨 |
출생 | 1893년[1] 9월 30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부내면 이천리 며두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이천동[2] 미두리마을 138번지) | |
사망 | 1922년[3] 2월 23일 |
종교 | 유교 (성리학) → 개신교 (장로회)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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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3년 9월 30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부내면 이천리 며두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이천동 미두리마을 138번지)에서 조성흡(趙成洽)의 아들로 태어났다.일찍이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9년 선교사들의 복음을 받아 안동교회에 출석하며 가족 전체를 모두 기독교로 개종시켰고, 집사로서 노방전도활동에도 참여했다.
그 뒤 1919년 3월 안동교회에서 김병우(金炳宇)·김익현(金翊顯)·이인홍(李仁洪) 등의 장로들이 안동면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에 적극 동참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선대로부터 상속받은 대지 204평을 매각해 그 대금을 권점필(權點弼)에 건네주며 만세시위를 위한 자금에 충당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거사 당일인 3월 18일 안동면 장터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23일 벌어진 만세시위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이날 안동군 안동면 법상동 목성산(木城山) 아래 마을[4]에서 체포되어 구류당하면서 일본 경찰의 고문을 받았다.
1919년 3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후진들에게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진력했으나[5], 고문의 여독으로 1922년 2월 23일 30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였다.
201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3. 여담
- 외아들인 조재묵 전도사는 안동 도곡교회 등 교회 7곳에서 목회하다가 2007년 별세했다.
- 조재묵은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조광선 반석교회 목사, 조현익 고촌교회 집사, 조옥순 동도교회 권사, 조현선 도곡교회 목사, 조옥금 수원중앙교회 집사, 조현철 숭덕교회 집사 등 6남매가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