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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제이콥스

<colbgcolor=#000><colcolor=#fff> 조지프 제이콥스
Joseph Jacobs
파일:조지프 제이콥스.jpg
본명 조지프 제이콥스
Joseph Jacobs
출생 1854년 8월 29일
영국령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시드니
(현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 시드니)
사망 1916년 1월 30일 (향년 61세)
미국 뉴욕주 용커스
국적 파일:뉴사우스웨일스 주기.svg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1854~1900)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자치령(1901~1916)[1]
직업 민속학자, 역사학자, 번역가, 작가
학력 시드니 대학교 중퇴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 (학사)

1. 개요2. 활동
2.1. 초기 생애2.2. 유대인 관련2.3. 민담 연구
3. 저서
3.1. 유대교 서적3.2. 문학평론과 연구3.3. 우화, 민화, 동화3.4. 그 외
4.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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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에서 활동한 호주민속학자, 역사학자.[2]

독일에 그림 형제가 있다면 영국에는 이 사람이 있다. 영국 각지의 민담들을 수집하여 발표하였는데, 아무래도 영국은 다민족국가이다 보니 잉글랜드 민담과 켈트 문화권(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민담을 따로 수집했다.[3] 여기서 제이콥스는 켈트족 어린이와 색슨족 어린이에게 풍요로운 상상력이라는 공동 재원을 준다면 어떤 정치보다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묶어줄 것이라고 평했다. 이 과정에서 제이콥스는 영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게일어 원문을 달아놓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인도유럽어족의 공통 요소에 관심을 가져 인도 지역의 민담 수집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본인이 유대인이라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도 연구하였다.

잉글랜드의 대표 민담인 아기돼지 삼형제, 잭과 콩나무, 잭 더 자이언트 킬러, 엄지 톰 이야기 등을 수집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그가 모은 민담들은 전세계의 어린이들이 널리 읽고 있다.

호주 태생이고 호주 시민권자였지만 정작 호주와는 별 관계가 없고, 영국(잉글랜드)하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이에 관련된 활동을 하였다. 자기가 호주인이라는 사실을 까먹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호주를 위해 해 준 것은 딱히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 사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게, 19세기 말 당시 호주는 영국의 식민지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특별히 인문학적으로 발전한 것이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정도가 있겠으나 백호주의 사상의 영향인지 당시 사람들은 관심갖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호주가 천국이겠으나 조지프 제이콥스는 인문학 종사자다. 하여튼 그의 삶에서 호주와 관련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2. 활동

2.1. 초기 생애

1854년 8월 29일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뉴사우스웨일스 시드니에 사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시드니 그래머 스쿨과 시드니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고전, 수학, 화학 분야의 장학금을 받았다. 다만 시드니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했고 18살에 영국으로 떠났다.

그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공부하여 1876년에 학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그는 수학, 철학, 문학, 역사, 인류학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2.2. 유대인 관련

영국에 있는 동안 제이콥스는 널리 퍼져있는 반유대주의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그는 1877년 6월에 맥밀런 잡지에 발표된 에세이인 "모데카이"를 썼다.

이후 1877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모리츠 슈타인슈나이더 아래에서 유대인 문학과 서지학을 공부했고, 모리츠 라자루스 아래에서 유대인 철학과 민족학을 공부했다.

제이콥스는 그 후 영국으로 돌아와 프란시스 갈튼 밑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이 시점에서 민속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1878년부터 1884년까지 히브리 문학 협회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반유대주의 포그롬을 우려했고 1882년 1월에는 런던 타임즈에 이 주제에 대해 편지를 썼다. 이것은 그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고, 1882년부터 1900년까지 그가 비서로 있었던 맨션 하우스 기금과 위원회를 결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1887년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영국-유대인 역사 전시회의 문학과 예술 위원회의 명예 비서였고, 루시엔 울프와 함께 전시 목록을 편찬했다.

1880년대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통계학 연구소에서 프랜시스 갈튼(Francis Galton) 밑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유대인 통계학에서의 그의 연구: 사회적, 생명력 그리고 인간 측정학(1891)은 당시 "유대인 인종 과학"이라고 불렸던 것의 첫 번째 지지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1888년 제이콥스는 그곳의 오래된 유대인 원고를 조사하기 위해 스페인을 방문했다. 마드리드 왕립 역사 아카데미는 그를 회원으로 선출했다.

1891년 그는 런던에서 처음 출판되고 미국의 유대인 출판협회에 의해 미국에서 출판된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라는 짧은 책에서 러시아의 반유대주의라는 주제로 돌아갔다. 1896년 제이콥스는 연간 유대인 연감의 출판을 시작했고, 1899년까지 연재를 계속했고, 그 후 다른 사람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그는 또한 유대인 역사 학회의 회장이었다.

1896년 제이콥스는 필라델피아의 그라츠 대학에서 "유대인 역사의 철학"에 대한 강의를 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1900년에 그는 600명의 기고자들의 글이 포함된 유대인 백과사전의 수정 편집자로 초대되었다. 그는 이 일을 맡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또한 미국 유대인 역사 학회에 참여했고, 유대인 출판 학회의 출판 위원회의 실무 위원이 되었다. 미국 유대인 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제이콥스는 조지나 혼과 결혼하여 두 아들과 딸을 낳았다. 1900년, 그가 뉴욕에 기반을 둔 유대인 백과사전의 수정 편집자가 되었을 때, 그는 미국에 영구적으로 정착한다. 이후 1916년 1월 30일 뉴욕 용커스에 있는 자택에서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08년 그는 미국 유대인 출판협회를 위한 성경의 새로운 영어 번역을 만든 7명의 편집자들의 이사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1913년 미국 히브리어의 편집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 자리를 사임한다.

1920년에 그가 사망할 당시 실질적으로 완성된 그의 유대인 문명에 대한 공헌서 1권이 필라델피아에서 출판되었다.

2.3. 민담 연구

제이콥스는 그 외의 저서로 이솝 우화를 칵스톤이 처음 인쇄한 것으로 편집했고(1889년), 화가의 쾌락의 궁전 (1890년), 발타저 그레이시안의 세속적 지혜의 기술 (1892년), 하웰의 편지 (1892년), 바라암과 요사파트 (1896년), 천일야화 (6권, 1896년) 등이 있다. 또한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과 제임스 헤이스팅스의 종교와 윤리에 관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기고했다.

제이콥스는 1899년부터 1900년까지 민속 저널을 편집했고 1890년부터 1916년까지 존 딕슨 배튼의 삽화와 함께 출판된 여러 동화 모음집을 편집했다. 잉글랜드 동화, 켈트 동화, 인도 동화, 더 많은 잉글랜드 동화, 1916년 켈트족의 더 많은 동화(1890년부터 1895년까지)와 유로파의 동화책(유럽 민속 및 동화로도 발행됨) 등이 있다.

그는 그림 형제들과 그 나이대의 민속학자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낭만적인 민족주의에 영감을 받았다. 그는 잉글랜드 아이들이 주로 프랑스와 독일 이야기를 읽는 반면, 잉글랜드 동화에 접근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샤를 페로가 시작한 것, 그림 형제가 완성.(What Perrault began, the Grimms completed.)"이었다.

그는 동화(Fairy Tale)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야기를 모았지만, 많은 이야기들이 특이한 종류의 이야기들이었다고 한다. 발라드의 산문 버전, 동요, 우화, 신화적 함축성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잉글랜드 동화에 대한 그의 분석에 따르면, "제 2권에 수록된 87편의 이야기 중에서 38편이 메르헨 고유의 이야기이고, 10편의 사가나 전설, 19편의 인형, 4편의 누적 이야기, 6편의 짐승 이야기, 10편의 허튼 이야기."라고 했다.

3. 저서

3.1. 유대교 서적

3.2. 문학평론과 연구

3.3. 우화, 민화, 동화

3.4. 그 외

4. 관련 링크


[1]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식민지 시민권인 대영제국 신민(British Subject)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2] 영국에서 활동했으면서 호주 출생이고 호주 시민권(식민지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활동 무대는 영국이었다. 재영국 호주인 신분이었던 것. 한국으로 비유하면 지방 사람이 서울로 상경하는 것과 한국계 미국인이 한국에 와서 활동하는 것의 중간 형태인 셈이다. 비슷하게 오세아니아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이주해 활동한 인물로 뉴질랜드 출신의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있다. 식민지 시절의 오세아니아는 여러가지 기반이 부족해 여러모로 영국에 의지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3] 같은 영국(United Kingdom)이라 해도 영어권에서는 잉글랜드와 켈트 문화권을 따로 여기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