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미합중국 육군 총사령관 조지 브린턴 매클렐런 George Brinton McClellan | |
출생 | 1826년 12월 3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
사망 | 1885년 10월 29일 (향년 58세) |
미국 뉴저지주 웨스트오렌지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소장 |
복무 기간 | 1846~1857 1861~1864 |
학력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중퇴 미국육군사관학교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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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1840년 13세로 나이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다가 2년 후 장래 목표를 군인으로 바꾼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존 타일러 대통령에게 보내게 하여 1842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846년 59명 중 2등으로 졸업하고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미국-멕시코 전쟁당시 참가했으나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했으며 퇴원후 전투를 치러 공을 세웠다. 이후 군을 나와 철도회사에서 일했고 정치에도 관심을 보여 스티븐 더글러스를 지지했다.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복귀하여 웨스트 버지니아 전역에서 남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고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는 부하 윌리엄 로즈크랜스의 공이 컸고 매클레런은 로즈크랜스의 공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명성에 힘입어 북군 주력 야전군 포토맥군 사령관이 되었고, 윈필드 스콧을 견제한 끝에 그의 뒤를 이어 연방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매클레런은 제1차 불 런 전투의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연방군을 효과적으로 재건하고 포토맥군의 사기와 조직력을 끌어올렸다. 워싱턴 주변에 매우 단단한 방어 체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클레런은 제1차 불 런 전투 이후 워싱턴 근처까지 올라온 남군이 10만 명 이상이라고 착각하고 경계하여 남군을 선제공격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대신 남군 위치 남쪽에 상륙하려 했으나 남군의 조셉 E. 존스턴이 먼저 후퇴하여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남군이 주둔했던 매너서스 정션에서는 남군이 통나무로 만든 가짜 대포 '퀘이커 건'이 여럿 발견되어 매클레런은 망신을 당했다.
매클레런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공격 전략을 요구하자 남부연합 수도 리치먼드 남동쪽에 상륙하여 리치먼드를 위협하는 반도 전역을 계획하고 링컨의 승인을 받아냈다. 1862년 3월 11일 링컨은 매클레런이 반도 전역에 집중하도록 연방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했는데, 이로 인해 매클레런의 불만을 샀다. 전역 초기 남군의 존스턴은 리치먼드 근처에서 방어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고 계속 후퇴했고 매클레런은 순조롭게 리치먼드 근처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존스턴이 부상을 당한 뒤 남군 지휘관이 된 로버트 E. 리는 과감한 (또는 무모한) 공격으로 매클레런을 압박하여 전술적으로는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전략적으로는 매클레런을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매클레런은 방어 태세를 잘 갖추고 리를 요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공세 지속에 자신감을 잃고 계속 지원군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매클레런은 지휘를 아군 병력 가까이가 아닌 주변 강의 배 위에서 하는 등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고 링컨과의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매클레런이 지원군을 요구하자 링컨은 셰넌도어 계곡, 버지니아 북부의 북군 부대들을 남하시키려 했지만 스톤월 잭슨에게 각개격파당하면서 저지되었다. 이에 링컨은 여러 북군 부대를 통합하여 존 포프 휘하 버지니아군을 창설하고 리치먼드 북쪽으로 배치시켰지만 매클레런은 여전히 공격을 주저했다. 링컨은 결국 매클레런에게 후퇴하고 포프에게 지원군을 보낼 것을 명령했지만 매클레런과 링컨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지원군 파견이 다소 늦어졌고 결국 포프가 제2차 불 런 전투에서 리에게 대패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리가 북진하며 워싱턴을 위협하자 링컨은 다시 매클레런에게 의지했다. 포프의 버지니아군 잔여 병력이 포토맥군에 통합되었고 매클레런은 통합 병력과 워싱턴 방어 지휘권을 잡았다. 우연한 계기로 리의 작전 계획을 입수한 매클레런은 분산된 잭슨과 리의 병력을 각개격파하는 것을 노렸고 사우스 마운틴 전투에서 리를 저지하였다. 하지만 매클레런이 느리게 움직이는 동안 잭슨은 아슬아슬하게 리와 합류하여 앤티텀 전투를 치렀고, 매클레런은 압도적인 병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술적 무승부에 만족해야 했다.
반도 전역이나 앤티텀 등에서 여러 번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리한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본인의 소심함, 전력차에 대한 착각으로 인해[1] 공세를 상당히 회의적으로 판단해 들어가지 않았다. 특히 앤티텀 이후 링컨이 공세를 명령했으나 항명에 가까운 태도로 공세에 응하지 않아 포토맥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더 이상 지휘관 보직을 받지 못하고 퇴역했으며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서 링컨을 상대로 나섰으나 낙선했다. 민주당 전쟁파가 링컨 지지로 이탈한 가운데 민주당은 남부연합과의 평화를 내세웠지만, 전쟁영웅 출신 매클레런은 즉각적인 평화에 반대했기 때문에 선거활동에서 엇박자를 일으킨 것이 패배의 한 원인이었다. 이후 1878년 뉴저지주 주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뉴저지 웨스트오런지에 거주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 매클레런은 핑커톤 탐정 사무소를 정보원으로 활용했는데, 상대 남군의 규모가 자신의 북군보다 우세하다고 잘못 파악했다. 물론 실제로는 북군이 큰 격차로 우세했다. 역사가들은 만약 실제로 북군이 크게 열세한 상황이었다면 매클레런의 지휘가 나무랄 데 없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전제 자체가 잘못된 상황이었기에 의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