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hen Arnold Douglas
1813. 04. 13. ~ 1861. 06. 03.(향년 48세)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버몬트 주 브랜든 출신이다.2. 생애
오늘날에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정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대통령 후보로 나설 정도로 당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특히 그의 중후하고 우월한 목소리에서 나오는 명연설은 더글러스를 당대의 연설의 달인으로 만들어줬다. 외모도 비록 키는 좀 작았지만 미남에 단단한 몸을 갖고 있어서 단순히 외모만 보고 평가한다면 누가 봐도 호감을 갖는 외모를 지녔다.
정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선거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정치인이었으며, 동시에 술을 매우 좋아했다.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노예제에 대해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한 북부 민주당의 지도자였다. 그는 인민주권(popular sovereignity) 이론을 내세워 곧 주로 승격할 준주(territory)들이 주민들의 투표로 노예제를 지지할지 거부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지역구인 시카고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대륙횡단 철도 건설을 위해 캔자스 준주를 승격시키면서 인민주권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고 통과시켰다(캔자스-네브래스카 법). 이는 연방영토에서 노예제 확대의 여지를 남겨 놓아 남부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나, 루이지애나 구입으로 얻은 영토 중 36도 30분선 이북에서 노예제를 금지하는 미주리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으므로 북부로부터는 비난받았다. 이후 캔자스는 주민투표에서 승리하기 위해 몰려든 노예제 지지 남부인들과 노예제 반대 북부인들의 대립으로 인해 내전에 가까운 혼란에 빠졌다. 이후 더글러스는 남부인들이 세운 캔자스 주정부가 내세운 친노예제 르컴튼 기본법을 반대하였고, 캔자스를 노예주로 받아들이려는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계획을 반대했다. 그 결과 이번에는 반대로 남부인들이 더글러스에게 실망했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더글러스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지만, 남부 민주당원들은 더글러스를 거부하고 존 C. 브레킨리지를 독자후보로 내세웠다. 그 결과 공화당 후보 링컨이 선거인단 투표에서 여유롭게 승리했으며, 더글러스는 미주리와 뉴저지 일부에서 선거인 12명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대선 직후에는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막기 위해 타협을 시도했지만, 남부연합의 섬터 요새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링컨의 연방군 소집을 지지하고 자신의 지역 기반인 중서부를 순회하며 연방 지지를 호소했다. 링컨의 취임 연설에 높은 평가를 내렸으며, 친구들에게도 링컨이 대통령직을 잘 해낼 거라 말했다고 한다.
3. 에이브러햄 링컨과의 관계
이 사람이 미국 이외의 문화권에서 유명한 이유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라이벌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웅변가이자 정치가로 유명하지만 미국 이외의 국가에서는 그냥 링컨의 라이벌로만 기억될 뿐이다.더글러스는 링컨과는 달리 단신이었다.[1] 대신 키만 컸을 뿐 깡마르고 멋 없는 외모의 링컨과는 달리 더글러스는 준수한 얼굴에 다부진 몸매를 갖고 있었다. 또한 더글러스는 목소리가 우렁찼으며 달변가로도 소문이 났다. 이른바 "작은 거인"이다.
공화당의 링컨과는 매우 거세게 맞붙었는데 링컨은 정치인으로서 뭘 하려 해도 항상 더글러스에게 막혀 좌절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메리 토드는 더글러스와 교제 중이었는데, 후에 링컨을 선택해서 결혼했다.
185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현직 일리노이 상원의원이었던 더글러스를 상대로 링컨이 도전장을 던졌다. 링컨은 공개 토론을 요구했고 더글러스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봄부터 가을까지 7회에 걸쳐 일리노이 각지를 순회하면서 전개된 링컨-더글러스 토론이 특히 유명하다. 서부 연방영토에서 노예제도를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는 각 준주의 시민들이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더글러스의 ‘주민투표론’에 대하여 링컨은 연방영토에서 노예제도를 금지해야 한다고 반론을 폈다.
더글러스가 링컨에게 "저 녀석은 금주령이 내려졌을 때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라고 링컨을 디스하자 링컨은 "그 당시 우리 가게 최고의 고객은 더글러스였다."라고 응수했다. 링컨에 대해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비난했다가, "나한테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면 내가 이 얼굴을 하고 다니겠냐?"라는 링컨의 자학개그에 데꿀멍한 적도 있다고 한다.[2]
결국 더글러스는 상원의원 선거에서 링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토론을 계기로 링컨은 전국구 정치인이 되었고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더글러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설욕했다.
사실 이 선거 이전부터 민주당 내에선 노예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비교적 온건파에 속했던 더글러스를 민주당 내 남부 계열 인사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결국 존 C. 브레킨리지 미국 부통령을 비롯한 남부 계열의 민주당 과격파들은 더글라스가 선출된 민주당 전당대회에 불복해 1860년 6월 28일 입헌민주당을 창당하였다. 반대로 민주당 내 북부 출신들은 더글러스를 지지했다고 한다. 남북전쟁은커녕 대통령 선거 시작도 하기 전부터 당 자체가 남북으로 분열되어있던 상태였던 셈이다. 결국 스티븐 더글러스는 득표율에서 29.5%로 2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남부주 지지표 이탈로 선거인단에서 단 12명을 얻는 참패를 당하고 그렇게 허무하게 링컨에게 패배하였다.
대선 낙선 이후에 더글러스는 전쟁 직전에는 남북 화해에 힘을 썼고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남부가 아닌 링컨 대통령의 연방통일제를 지지하며 북군의 편에 서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였다. 또한 정적이었던 링컨에게도 매우 협조적인 아군이 되어주었다. 링컨 대통령이 7만 5천명의 북군을 모집해줄 것을 요청하자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고, 오히려 대통령에게 7만 5천이 아닌 20만 의용군을 모집해야할 것이라며[3] 조언을 건넸다고 한다.
이후에는 전국을 돌며 미합중국을 지키기 위해 링컨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칠 것을 호소했다고 한다. 미국의 위기 상황에서 라이벌과의 악연은 접어두고 초당적으로 링컨을 위해 나섰다. 이후 지지자들을 모으던 도중 시카고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사실 이런 초당적 협력에는 더글러스의 대의도 물론 있지만, 현실적인 정치 생존 문제도 작용했다. 더글러스가 속한 민주당은 남북전쟁으로 인해 반역자 집단으로 낙인찍히게 생겼기 때문이다. 즉 당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링컨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더글러스 외의 민주당 인사들도 전쟁 수행 자체에는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도 이 때문이다.[4]
링컨의 정적으로 주로 언급되는 덕에 링컨과 달리 노예제 찬성론자였다는 이미지가 많이 박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위에 잠시 언급했듯이 더글러스는 노예제에 대해선 공식적으론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말고~"하는 식의 온건파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1860년 대선에서 남부로부터 비토를 받았다.[5] 게다가 더글러스는 개인적으로는 노예제에 반대했다는 언급이 1970년대 이후로 기밀 해제된 여러 편지나 문서들을 통해 언급이 되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남부 편이었던 링컨 직전의 대통령인 제임스 뷰캐넌보다는 훨씬 반노예제에 가까웠다. 단지 1820년대부터 민주당의 당권파는 남부였기 때문에 눈치를 봤을 뿐이다. 더글러스는 북부 출신이었는데 북부는 휘그당 - 공화당으로 이어지는(뉴욕도 당시에는 휘그-공화당) 노예제 반대파가 잡고 있었다. 결국 민주당은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가 주도를 하게 됐다. 더글러스도 이런 당내 분위기 때문에 확실한 반대파가 아닌 온건파로 자신의 정치적 방향을 수정했다.[6]
4. 기타
마치 조조 항목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타인이 원소(삼국지)이듯 이 항목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타인의 이름이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물론 링컨 항목에도 가장 많이 언급된 인명이 더글러스이고.시카고 대학의 설립자이지만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인한 반인종차별주의가 퍼지면서 기념물을 제거하겠다고 한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소개되었는데, 아무래도 만화 특성상 라이벌 링컨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더글러스의 정치인으로서의 활약과 긍정적인 면모 대부분이 묘사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는 노예제에 반대했으며 남북전쟁 당시 링컨을 헌신적으로 도왔다는 사실 등이 쏙 빠졌다. 게다가 외모도 강단있는 느낌은 없고 뺀질거리는 능구렁이처럼 묘사되어 자기 이름값만 믿고 있다 링컨에게 한방 먹은 정치인 정도로 읽히기 쉬워 이미지가 썩 좋지 않다.
링컨의 부인 메리 토드 여사의 전 남자친구가 바로 더글러스였다.
[1] 링컨은 키 193cm의 엄청난 장신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키가 크다.[2] 이 발언에서 볼 수 있듯 링컨은 실제로 드립에 능하고 재치가 많았던 인물이어서, 일상생활에서도 농담과 개그를 즐겼다.[3] 더글러스 자신 또한 남북전쟁의 양상(총력전)을 예측했다는 반증으로 만약 죽지 않고 좀 더 오래 살아서 조력했다면 북군의 조기승리에 크게 공헌하지 않았을까 싶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민주당은 남북전쟁 후 공화당으로 공격당하며 굉장히 오랜 기간동안 야당 신세였다. 링컨 당선 후(1860년)부터 우드로 윌슨 당선(1912년) 전까지 52년동안 민주당 집권기는 두 차례의 징검다리로 그로버 클리블랜드 행정부 시기인 8년 뿐이었다. 그마저도 민주당 대통령 두 명이 연이어 나오는건 프랭클린 루스벨트-해리 S 트루먼으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뤄졌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민주당 집권기는 앞서 나온 클리블랜드에 더해서 우드로 윌슨 재임기 8년이 고작이다.[5] 당시 남부 입장에서는 이런 온건 성향좌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노예제 확대 문제인데 남부=노예주 북부=자유주로 나뉘고 노예제로 의견이 갈리게 되면서 남부 입장에서는 북부의 노에제 정치공세를 버티려면 정계에서의 목소리를 확보하는게 중요했는데 인구가 북부가 앞선지라 인구별로 선출되는 하원에서는 남부의 목소리가 약했다. 그러나 주별로 선출되는 상원은 남부주와 자유주의 숫자가 같아진다면 하원에서 약한 목소리를 상원에서 어느정도 보충할 수 있었기에 남부 입장에서는 노예주가 늘어나는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 새로 가입하는 주들은 이주민 대부분이 북부 출신이라 노예제를 금지하였고 만일 이대로 간다면 남부는 상원에서조차 북부에게 밀려 거창하게 노예해방선언 그런거 없이 의회에서 노에제 금지 법안을 제정해서 노에제가 없어질 수도 있는 문제인지라 저런 온건론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물론 애초 그런 상황을 자초한건 남부였지만.[6] 사실 이런 온건 성향은 당시 정계에서 이상한게 아니었다. 오히려 필모어, 피어스, 뷰캐넌처럼 남부에 유화적인 케이스도 많았고 노예를 당장에 해방해야 한다는 주장은 굉장한 급진적인 주장 취급을 받았다. 이런 류의 주장을 한 링컨시기 공화당 주류를 공화당 급진파라고 하는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