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주멕시코공사 윌리엄 로즈크랜스 William Rosecrans | |
본명 | 윌리엄 스타크 로즈크랜스 William Starke Rosecrans |
출생 | 1819년 9월 6일 |
미국 오하이오주 킹스턴 타운십 | |
사망 | 1898년 3월 11일 (향년 78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돈도비치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소장 |
복무 기간 | 1842~1854 1861~1867 |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오하이오주 킹스턴 타운십 출신으로 184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제임스 롱스트리트, D. H. 힐, 애브너 더블데이 등과 함께 졸업했고, 5위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버지니아주 포트 먼로가 초임지이며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었으며 로드아일랜드에 복무하다가 버지니아 군사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다.1854년 제대하고 웨스트버지니아에서 광업 회사를 차렸고 이익을 얻자 석유쪽으로 확장했다. 케로신 램프 개조형, 비누 제조법 등 몇 가지 발명을 하고 특허를 획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램프 폭발로 정제소에서 화재가 발생해 큰 화상을 입고 복귀하는 데 18개월이 걸렸으며, 수염으로 가려지기는 했지만 얼굴에 평생 남은 흉터가 생겼다. 남북전쟁 직전까지 계속 대표로 일하고 있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해 군으로 복귀했고 오하이오 주지사 윌리엄 데니슨 주니어에 의해 조지 매클렐런이 이끄는 오하이오 자원병에 합류했다. 곧바로 대령 계급을 부여받았고 제23오하이오보병연대장이 되어 미래의 대통령 러더퍼드 헤이스와 윌리엄 매킨리를 잠시 지휘하기도 했으며, 몇 개월 뒤 준장으로 진급했다. 서버지니아 전역에서 현 웨스트버지니아 지역을 남군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리치 마운틴 전투에서 승리하고 로버트 E. 리의 서버지니아 탈환 시도를 큰 전투 없이 기동만으로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매클레런은 로즈크랜스의 공을 자신의 공으로 포장하여 동부전선 주력군 포토맥군 사령관과 연방군 총사령관에까지 올랐다. 매클레런의 후임으로 서버지니아 방면 사령관이 되기는 했지만 매클레런은 로즈크랜스의 공세 계획에 반대하고 오히려 로즈크랜스 휘하 병력 대부분을 다른 장군에게 차출해 버렸다. 존 C. 프리몬트의 동부 부임으로 로즈크랜스는 자리를 잃었고 잠시 워싱턴에서 근무했는데, 이 때 전쟁장관 에드윈 스탠턴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그의 커리어에 영향을 미쳤다.
샤일로 전투 이후 헨리 할렉이 직접 서부전선 지휘권을 잡고 존 포프가 동부로 이동하자, 로즈크랜스는 할렉 휘하에서 포프의 옛 병력 일부의 지휘권을 잡았다. 미시시피주 코린트 점령 이후 할렉도 동부로 이동했고 로즈크랜스는 할렉의 후임 율리시스 S. 그랜트 휘하의 주요 지휘관이 되었다. 브랙스턴 브래그가 켄터키로 북진한 가운데 그랜트는 휘하 군대를 이끌고 브래그가 남겨둔 스털링 프라이스와 얼 반 돈의 남군을 상대했다. 1862년 9월 이우카(Iuka) 전투에서 그랜트와 에드워드 오드의 본군이 기상 이상으로 인해 전장에 합류하지 못한 가운데, 로즈크랜스는 단독으로 프라이스의 남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전투 뒤 북부 언론은 로즈크랜스를 띄워주고 그랜트를 비난했으며, 로즈크랜스와 그랜트의 사이도 악화되었다. 10월 제2차 코린트 전투에서는 반 돈과 프라이스가 합류하여 코린트를 직접 공격했지만 로즈크랜스는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우카와 코린트에서 로즈크랜스의 활약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편이지만 두 전투 모두 서부전선에서 남군의 기세를 꺾은 중요한 승전이었고, 로즈크랜스는 북군의 주요 장군들 중 하나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랜트와 관계가 불편했던 로즈크랜스는 켄터키에서 브래그를 상대로 대응이 느렸던 오하이오군의 돈 카를로스 뷰얼 대신 후임으로 부임했다. 자신이 이끄는 오하이오군의 이름을 컴벌랜드군으로 바꾼 로즈크랜스는 참모장 제임스 A. 가필드, 핵심 군단장 조지 H. 토머스와 좋은 관계를 구축했다. 브랙스턴 브래그의 테네시군을 상대하게 된 로즈크랜스는 1862년 12월 스톤스 리버 전투에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으면서도 브래그의 공격을 막아내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브래그는 중부 테네시의 요충지 털라호마로 후퇴했는데, 로즈크랜스는 빨리 공격하라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스탠턴 장관을 무시하고 6개월 동안 준비한 끝에 뛰어난 기동을 통해 수백명에 불과한 작은 인명 피해로 털라호마와 중부 테네시를 장악했다. 하지만 이 전공은 그랜트의 빅스버그 함락과 조지 미드의 게티즈버그 전투 승전과 같은 시기였기 때문에 언론의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링컨과 스탠턴은 다시 로즈크랜스에게 공격하라고 압박했고, 로즈크랜스는 애팔래치아산맥을 넘어 남군 요충지 채터누가로 향했다. 한편, 위기감을 느낀 남부 정부에서는 제임스 롱스트리트가 이끄는 지원군을 로버트 E. 리의 북버지니아군에서 차출하여 브래그에게 급파했다. 브래그는 채터누가를 우선 로즈크랜스에게 내준 뒤 야전에서 수적 우위를 통해 반격하려 했다. 1863년 9월 치카모가 전투에서 증강된 남군은 갈라져서 행군하는 로즈크랜스의 연방군을 공격했다. 전투 첫 이틀 동안 로즈크랜스는 토머스와 힘을 합쳐 남군을 잘 방어했고 인명 피해는 남군이 더 컸다. 하지만 9월 20일 셋째 날 전투에서 로즈크랜스는 전열에 빈틈이 있다고 잘못 판단하고 전선의 다른 부대를 이동시켜 빈틈을 메우려 했는데, 오히려 이 때문에 실제로 틈이 발생해 버렸다. 우연의 일치로 롱스트리트의 대규모 돌격이 바로 이 틈을 강타했고, 로즈크랜스는 전체 군대의 1/3과 함께 채터누가로 밀려났다. 토머스가 전장에서 끝까지 버티며 방어하지 않았다면 로즈크랜스의 군대는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었다.
로즈크랜스가 브래그에 의해 채터누가에 포위된 뒤에도 링컨은 로즈크랜스를 신임하려 했지만 로즈크랜스는 이미 멘탈이 흔들린 상태였다. 사적으로 링컨은 로즈크랜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오리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빅스버그를 함락시킨 그랜트와 셔먼의 테네시군, 동부전선 포토맥군으로부터 차출된 조셉 후커 휘하 분견대가 채터누가로 파견되었고, 그랜트에게는 로즈크랜스를 토머스로 교체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랜트는 로즈크랜스와 토머스 모두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로즈크랜스의 상태를 보고 토머스를 임명하는 것을 선택했다.
로즈크랜스는 이후 미주리에서 스털링 프라이스의 기병 습격을 상대하기도 했지만 큰 싸움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옛 참모장 가필드는 로즈크랜스에게 링컨의 부통령 후보가 될 생각이 없냐고 문의하기도 했다. 로즈크랜스는 은근하게 수락하는 답신을 보냈지만 가필드는 답장을 받지 못했는데, 로즈크랜스의 친구들은 로즈크랜스와 사이가 나빴던 전쟁장관 스탠턴이 중간에 답신을 가로챘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퇴역 후 주멕시코공사에 임명되었고 사우스퍼시픽 철도의 임원이 되기도했다. 1880년 캘리포니아의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어 4년 동안 임기를 수행했다. 1898년 디프레티아로 인해 사망했다.
남북전쟁에서 많은 군공을 세운 장군이지만 상관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세운 전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 등 불운한 편이었다. 잘 나가다가 마지막 치카모가 전투에서의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며 역사에서 잊혀진 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