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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4:59:44

빅스버그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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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의 대 빅스버그 작전 지도. 이 전략기동은 미 육군에서 한산도 대첩 수준으로 깊게 연구된다고 한다.

1. 개요2. 배경3. 양측의 병력과 빅스버그의 방어4. 공격5. 포위
5.1. 지휘권 변경5.2. 루이지애나 작전5.3. 제3루이지애나 철각보의 구덩이
6. 항복과 이후7. 유산

1. 개요

Siege of Vicksburg

남북 전쟁 중 서부 전역에서 벌어졌던 빅스버그 전역(Vicksburg Campaign)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이다.

2. 배경

빅스버그는 제퍼슨 데이비스가 "빅스버그는 남부의 두 부분을 이어주는 못머리와도 같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남부에겐 아주 중요한 전략적인 가치를 지닌 도시였다. 우선 미시시피 강 삼각주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를 지나가지 않으면 미시시피 강을 통해 멕시코 만을 거쳐 대서양으로 나가는 게 불가능했다. 또한 남부에 가담한 주들 중 가장 서쪽에 있었던 텍사스, 아칸소, 루이지애나 주와의 연락도 빅스버그를 거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남부의 전쟁수행에 필요한 가축과 말, 증원병력이 유입되는 곳이었다.

빅스버그 시는 방어에 유리한 천혜의 자연조건과 요새 시설로 인해 '남부 연방의 지브롤터'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로 공략하기 어려운 도시였다. 미시시피 강을 낀 편자 모양의 굽이를 내려다보는 높은 절벽에 도시가 위치하고 있어 선박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했으며, 도시의 북부와 서부는 삼각주가 둘러싸고 있었다. 북부는 약 200마일 (320km), 동부는 약 50마일 (80km)의 넓이를 자랑하며, 물길도 많고 복잡해서 일부만 소형 증기선으로 항해할 수 있었고 도보로도 다니기 힘든 늪지대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빅스버그 근방에는 남군의 포병대와 참호까지 있었으며 그렇다고 서쪽은 강이 많고 도로사정이 안 좋은 루이지애나 주였으므로 서쪽으로 우회해서 공략하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북부 입장에서는 이 도시를 꼭 점령할 필요가 있었고[1], 한번 공격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 남부의 대도시였던 뉴올리언스를 점령한 북군의 제독 데이비드 패러것(David Farragut)이 1862년 5월 18일에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빅스버그의 항복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병력이 부족하여 제대로 된 포위를 할 수 없어서 실패했다.

한편 같은 해 7월, 서부 전역의 지휘관이었던 헨리 할렉(Henry W. Halleck)이 북군 총지휘관으로 진급했고 율리시스 S. 그랜트가 그 후임이 되었다. 이미 남부측에서 빅스버그 수비군에 상당한 증원병력을 보냈기에 해군으로는 점령이 불가능했으므로, 그랜트는 전진기지를 전설하고 윌리엄 테쿰세 셔먼에게 4개 사단(약 32,000명)을 주어서 내려보내고 자신은 4만 명을 병력을 이끌고 기다리면서 남군을 유인해 야전을 치를 생각이었다.

그랜트는 빅스버그 전역을 진행하여 약 6개월 동안 빅스버그 주변에서 여러 전투를 치렀다. 이 시기는 기간에 따라 2가지로 분류한다. 1862년 12월부터 1863년 1월까지는 대 빅스버그 작전(Operations Against Vicksburg)이라고 칭하며, 1863년 3월부터 7월까지는 그랜트의 대 빅스버그 작전(Grant's Operations Against Vicksburg)으로 구분한다.

그랜트는 먼저 강과 철도를 따라 북쪽으로부터 빅스버그를 공격하는 정공법을 시도했지만 내선의 이점을 살려 방어하기 좋은 위치를 선점한 남군에 막힌다. 이후 그랜트는 미시시피강에 빅스버그를 우회하는 운하를 파고 운하를 통한 침투를 시도했지만 지형적, 기후적 악조건과 남군의 방해로 인해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그랜트는 미시시피강을 도하하여 강 서안을 따라 남하한 뒤 다시 도하하여 강 동안에서 빅스버그로 북상하는 대담한 기동을 기획했다. 이는 대성공을 거두어, 그랜트는 방어하는 남군에게 여러 차례 승리하고 미시시피주의 주도 잭슨을 점령한 뒤 남군을 빅스버그로 몰아넣었다.

많은 사람들은 남군 서부 전역을 지휘하는 조셉 E. 존스턴(Joseph E. Johnston)이 빅스버그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존스턴은 반도 전역에서 입은 부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아 지휘권을 늦게 이양받았고, 이미 근처의 남군 병력 대다수가 펨버튼에게 지원되었기 때문에 휘하 병력도 얼마 없었다. 존스턴은 수비대를 이끌던 존 C. 펨버튼(John C. Pemberton)에게 각서를 보내 도시를 포기하고 병력을 보존할 것을 요구했다.[2] 하지만 별도로 남부의 대통령 데이비스로부터 빅스버그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펨버튼은 도시를 포기하지 않고 빅스버그로 들어가기 전에 주변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고 긁어모은 후 후퇴하여 전투를 준비했다.[3] 존스턴은 당장 그랜트를 위협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는데, 존스턴이 어떻게든 3만 병력을 규합했을 때는 이미 셔먼이 이끄는 5만 병력이 그랜트의 후방을 지키며 존스턴의 지원군이 빅스버그를 구원하지 못하도록 막은 후였다.

3. 양측의 병력과 빅스버그의 방어

북군이 빅스버그를 향해 진격해오자, 펨버튼은 겨우 18,500명만을 전선에 세울 수 있었다. 그랜트에겐 35,000명이 있었고 증원병력이 더 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형조건이 방어에 유리하고 요새시설 역시 워낙 잘 구축되어 있었기에 도시의 방어는 거의 난공불락에 가까웠다. 빅스버그 주변의 방어선은 약 6.5마일(약 10km) 길이였는데, 공격자가 공격을 받기 좋은 가파른 언덕이 널린 지형에 있었고, 방어선에는 작은 요새, 요형 포좌, 참호, 보루, 안경보(Lunette, 요새 건축양식의 하나로 원래는 반월형이었던 V자 모양의 보를 말한다) 등이 흩어져 있었다.

그랜트의 테네시군은 존 A. 매컬리넌드(John A. McClernand)의 제13군단, 셔먼의 제15군단, 제임스 B. 맥퍼슨(James B. McPherson)의 제17군단의 총 3개 군단을 동원했다. 펨버튼의 미시시피군은 카터 L. 스티븐슨(Carter L. Stevenson), 존 H. 포니(John H. Forney), 마틴 L. 스미스(Martin L. Smith), 존 S. 보웬(John S. Bowen) 소장 지휘 하의 4개 사단을 동원했다.

4. 공격

그랜트는 남군이 방어태세를 재정비하기 전에 그들을 압도해버리길 원했고, 5월 19일 스톡에이드 보루에 대한 즉각적인 공격을 명령했다. 셔먼의 군단 소속 병사들이 빅스버그 북쪽에서 공격을 시작했으나, 제36 미시시피 보병연대의 사격과 야포공격을 받아서 위치에 도달하는 게 어려웠다. 공격자들은 먼저 가시울타리가 보호하는 가파른 협곡을 극복하고, 깊이 1.8m에 넓이 2.4m의 도랑을 건너야만 5.2m 높이의 철각보 벽에 다다를 수 있었다. 첫번째 공격시도는 간단히 격퇴당했다. 오후 2시경, 그랜트는 수비를 약화시키기 위해 포격을 명령했으며, 이후 다시 공격이 시도되었으나 소수의 인원만이 겨우 도랑에 도달했고 그나마도 소총 사격과 수류탄 투척을 받아 또 실패했다.

공격 실패로 인해 북군의 사기는 떨어져서 병사들이 자신감을 잃어버렸으며 157명 전사, 777명 부상, 8명 실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남군은 8명 전사에 62명 부상이라는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을 뿐이었다. 사기가 저하된 줄 알았던 남군이 전투감각을 되찾은 것이다.

5월 22일, 그랜트는 다시 공격을 준비했으나 이번에는 훨씬 더 신중하게 계획을 짰다. 먼저 철저하게 정찰을 한 후 야포와 함포사격을 통해 수비를 약화시켰다. 선두부대에겐 벽을 기어올라갈 사다리를 지급했다. 그랜트는 포위전이 오래 지속되는 걸 원하지 않았으므로 이번 공격은 넓은 전선이 걸쳐 전 부대가 할 예정이었다.

4일 전에 격퇴당했지만, 북군은 배불리 먹고 의욕이 충만해진 상태였다. 그랜트가 지나가는 걸 본 한 병사가 '건빵!'이라고 외쳤는데, 곧 주변 병사들까지 합세해서 '건빵! 건빵!'을 외쳐댔다(…). 그리하여 5월 21일 저녁에는 건빵과 콩, 커피가 제공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 다음날에 빅스버그가 함락되리라 예측했다.

북군에서는 220문의 야포와 함포사격을 동원하여 밤새도록 빅스버그에 포격을 가했다. 재산피해는 거의 없었으나 밤새도록 포격을 당했으니 도시 내 시민들의 사기는 떨어질 밖에 없었다. 5월 22일 아침에는 공격 전에 4시간 동안 다시 포격을 퍼부었다. 이후 오전 10시를 기해 셔먼이 다시 공격에 나섰다. 셔먼은 사다리와 판자를 들고 앞장선 150명의 자원병(포론 호프 파견대란 별명이 붙어있었다)을 데리고 그레이브야드 로를 내려가 다시 공격을 했고, 그 뒤를 블레어와 제임스 M. 터틀(James M. Tuttle) 준장의 사단이 긴 종대를 이루어 따랐다. 이는 좁은 전선에 병력을 집중시켜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남군의 극심한 소총 사격을 받고 격퇴당했다. 길레스 A. 스미스(Giles A. Smith)와 토마스 킬비 스미스(T. Kilby Smith) 하의 블레어 여단은 스톡에이드 칠각보의 남쪽 끝인 그린의 칠각보에서 100야드 떨어진 능선까지 도달하여 남군 위치에 집중 사격을 퍼부었으나 효과가 없었다. 전진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터틀의 사단은 전진할 기회도 없었다. 셔먼의 맨 오른쪽에서는 프레드릭 스틸(Frederick Steele) 준장이 민트 스프링 늪의 협곡을 통해 공격 위치에 도달하는 데 아침을 보냈다.

맥퍼슨 군단은 잭슨 로를 따라 중앙을 공격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오른쪽 측면에서는 토마스 E.G. 랜섬(Thomas E. G. Ransom) 준장의 여단이 남군 방어선에서 100야드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으나 그린의 칠각보에서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측면 사격을 피하기 위해 진군을 멈췄다. 맥퍼슨의 왼쪽 측면에서는 존 A. 로건(John A. Logan) 준장이 제3루이지애나 칠각보와 대보루를 공격하기로 되어있었다. 존 E. 스미스(John E. Smith) 준장의 여단이 철각보 비탈까지 왔지만, 어두워질 때까지 수류탄을 피하며 옹송거리다가 후퇴 명령을 받았다. 존 D. 스티븐슨(John D. Stevenson)의 여단은 보룰 향해서 2열 종대로 순조롭게 전진했지만, 가져온 사다리가 요새 벽을 타기에는 너무 짧아서 공격은 실패했다. 아이작 F. 퀸비(Isaac F. Quinby)의 여단은 수백야드를 전진했으나, 지휘관들이 혼란스러운 논쟁을 벌이는 동안 수 시간을 지체했다.

북군의 좌익에서는 매컬리넌드의 군단이 발드윈 페리 로와 미시시피 남부 철로에 걸쳐 이동했다. 유진 A. 카(Eugene A. Carr) 준장의 사단은 철로 보루와 제2텍사스 안경보를 탈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피터 J. 오스터하우스(Peter J. Osterhaus) 준장의 사단은 스퀘어 요새 탈취 지시를 받았다. 카 휘하의 병사들이 제2텍사스 안경보에서 작은 돌파구를 마련하여 지원병력을 요청했다.

오전 11시가 되자, 돌파는 실현되지 않았고 셔먼과 맥퍼슨의 진격은 실패라는 게 분명해졌다. 바로 그 때, 그랜트는 맥컬리넌드에게서 심한 교전을 치르고 있으며, 남군이 증원되고 있으므로 맥퍼슨의 군단이 자신의 오른쪽 측면에서 주의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는 전갈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랜트가 요구를 거부했고 매컬리넌드에게는 본인의 예비군을 지원에 이용하라고 했다. 이는 그랜트가 매컬리넌드가 가벼운 교전을 치르고 맥퍼슨이 심한 교전 중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인데, 현실은 반대였다. 매컬리넌드는 다소 잘못된 전갈을 점부했는데, 2개의 요새를 탈취했고(그 두 곳에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다) 전선을 따라 한 번 더 공세를 가하면 북군의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그랜트가 또 다시 항변했으나, 다시 군단을 전진시켰던 셔먼에게 이 급보를 보여줬다. 다시 판단한 그랜트는 맥퍼슨에게 퀸비 사단을 보내 매컬리넌드를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셔먼은 공격을 2번 더 명령했다. 오후 2시 15분에는 길레스 스미스와 랜섬이 진격했으나 즉시 격퇴당했다. 오후 3시가 되자, 터틀 사단이 진격 중에 너무 많은 손실을 입었고, 셔먼은 터틀에게 "이건 살인이네. 병사들을 후퇴시키게."라고 명령했다. 이 때 스틸 사단이 마침내 셔먼의 오른쪽 측면으로 기동했고, 오후 4시에는 제26 루이지애나 보루로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도 셔먼이 행한 다른 공격과 똑같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맥퍼슨이 맡은 구역에서는 로건 사단이 오후 2시경에 잭슨 로 아래쪽으로 다시 진격을 했으나 심한 손실을 입어 공격이 취소되었다. 퀸비 사단의 증원을 받은 매컬리넌드가 다시 공격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북군은 502명 전사, 2,550명 부상, 147명이 실종되었고 이 수치는 3개 군단에 균등하게 나뉘어졌다. 남군의 사상자는 직접 보고되지 않았으나 500명 이하로 추산한다. 그랜트는 좋지 못한 전투 결과를 잘못된 급보를 올린 매컬리넌드에게 원인을 돌렸으며, 빅스버그 전역에서 너무 많은 지체를 유발한 정치 장군[4]에게 불만을 또 쌓아놓게 되었다.

5. 포위

역사가 셀비 푸트(Shelby Foote)는 그랜트가 "공격을 한 걸 후회하진 않았다. 그저 공격이 실패했다는 걸 후회했다."고 적고 있다. 그랜트는 마지못해 포위에 들어갔다. 5월 25일, 그랜트를 대신하여 존 A. 롤린스(John A. Rawlins) 중령이 특별명령 제140호를 발령했다. "군단 지휘관들은 통상적인 방법으로 적을 섬멸할 작업을 즉시 시작할 것. 빅스버그 파괴와 수비대 생포에 더 이상 전사자가 나오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지뢰나 참호, 전진 포대에 이르는,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전장의 자연적인 불평등함을 모두 이용할 것…" 그랜트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제, 나는 이를테면 '적을 끌어내기 위해', 그리고 더 이상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통상적인 포위를 결정했다."고 적고 있다.

북군 병사들은 공사를 시작하여 도시를 둘러싼 정교한 참호(당시의 병사들은 '배수로'라고 불렀다)를 건설했고 남군의 방어시설에 점점 더 가까이 접근했다. 뒤편에는 미시시피 강과 강에서 포격을 하는 북군의 건보트가 있는지라 남군 병사와 시민들은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펨버튼은 존스턴이나 다른 곳에서 구원을 해주길 바라면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미시시피 강의 몇 마일을 유지하려고 필사적이었다.

그 와중에 남군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그랜트의 병사들 중 전사자와 부상자가 미시시피의 여름 더위 속에 널브러져 있었고, 죽은 사람과 말의 악취가 공기를 더럽혔으며, 부상자들은 물을 주고 치료를 해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랜트는 약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정전 요청을 거절했으나, 결국 그는 휴전에 동의했고[5], 남군은 북군에서 부상자와 전사자들을 수습하는 동안 사격을 중지했으며, 양 편의 병사들은 잠깐동안 적대감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서로 어울렸고 물건을 교환했다.

이 휴전 후, 그랜트의 군대는 빅스버그 주변으로 12마일 길이의 고리모양 참호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북군 5만명이 와도 남군 방어부대를 완전히 둘러쌀 수 없을 것이라는 게 분명해졌다. 펨버튼은 탈출 전망에 관해선 비관적이었지만, 아직까지 북군이 방어하지 않고 있는 방면으로 빅스버그를 빠져나가 남부로 이어지는 길이 여전히 있었다. 이에 그랜트는 북군 총사령관 할렉 소장의 도움을 받았다. 할렉은 그랜트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재빨리 북군 병사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런 증원군 중 포위선에 첫번째로 도착한 이들은 6월 11일자로 프랜시스 J. 헤론(Francis J. Herron) 소장의 지휘 아래 미주리 지역에서 파병된 5천명의 사단이었다. 프론티어군(미시시피 강 너머의 전장에서 전투를 치른 부대, 1863년 6월에 해산되고 남은 연대는 프론티어 구역으로 편성되었다)의 남은 부대였던 헤론의 병사들은 맥퍼슨 군단에 편성되어 먼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 다음에는 캐드월래더 C. 와시번(Cadwallader C. Washburn) 준장 지휘의 제16군단에서 파견된 3개 사단이 근처의 코린스, 멤피스, 라그랜지 주둔지의 병사들로 편성되어 6월 12일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중요한 증원병력은 오하이오 지역의 제9군단에서 온 병력 8천명으로, 존 G. 파크(John G. Parke) 소장이 지휘했으며 6월 14일에 도착했다. 파크 부대가 도착하여 그랜트는 빅스버그 주변에 7만 7천명을 배치했다.

그랜트의 보급선을 끊기 위한 시도로서, 존 G. 워커(John G. Walker) 소장의 지휘하에 루이지애나 주의 남군이 6월 7일에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 와서 밀리켄 굽이(Milliken's Bend)를 공격했다. 이곳은 주로 훈련을 받지 않은 흑인 병사들이 방어를 맡고 있었는데, 그들은 열세인 무장으로 용감하게 싸웠으며 건보트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남군을 몰아냈으나 끔찍한 손실을 겪었다. 방어자들은 652명이 전사했고 남군은 185명이 전사했다. 밀리켄 굽이에서의 패배로 남군에겐 조심스러운 존스턴의 구원을 제외하면 구원의 희망이 없게 되었다.

펨버튼은 먹을 수 없는 탄약만 잔뜩 가진 채, 식량 없이 갇혔다. 6월 말이 되자, 병력의 절반이 괴혈병, 말라리아, 혈변, 설사, 또는 다른 질병을 앓고 있거나, 이들 질병으로 입원하여 병사수가 줄어들었다. 도시 거주민 중 적어도 1명은 밤을 세워서 배고픈 병사들을 야채 밭에서 쫓아내야만 했다. 계속되는 포격도 식량 부족만큼 펨버튼을 괴롭히지 못했다. 포위가 계속될수록, 빅스버그 주변을 배회하는 말, 노새, 개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많은 성인들에게는 신발가죽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 되었다.

포위 중, 북군 건보트에서는 빅스버그에 2만 2천발의 포탄을 쏟아부었고, 육군의 야포 사격은 더 맹렬했다. 포격이 계속되자 빅스버그 내에서 살만한 주택은 거의 없어졌다. 마을과 남군 방어선 사이에 있는 절벽이 여러 시민들에게 포위 중 거처가 되었다. 빅스버그의 노란 점토 언덕에 동굴 500개 이상을 팠다. 집들이 구조상 튼튼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이런 대피호에서 사는 게 더 안전하다고 간주한 것이다. 사람들은 양탄자, 가구, 그림을 가져와서 가능한한 거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이동과 채집을 포격 주기에 맞추려고 했지만 때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대피호나 동굴 때문에 북군 병사들은 마을에 "프레리 독 마을"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마을을 향한 북군의 거센 사격에도 불구하고 포위 전체 기간 중 죽은 시민의 수는 십여명도 되지 않았다.

5.1. 지휘권 변경

포위 중 그랜트가 취한 행동 중 하나는 지속되는 경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5월 30일, 맥클리넌드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곧 올 승리에 자신이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자화자찬하는 각서를 썼다. 그랜트는 빅스버그 전역 초기의 아칸소 초소 전투에서 맥클리넌드와 충돌한 이래 지난 6개월 동안 맥클리넌드가 실수하기를 기다려 왔다. 그랜트는 1863년 1월에 맥클리넌드를 교체한다는 승인을 받았지만 명백한 도발이 나타나는 걸 기다렸다. 드디어 그랜트는 6월 18일 부로 맥클리넌드를 교체했다. 그랜트가 워낙 부지런히 취할 행동을 준비해서 맥클리넌드는 의지할 것 없이 떠났다.[6] 그가 지휘하던 제13군단은, 해치 다리(Hatchie's Bridge)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회복한 에드워드 오드(Edward Ord) 소장에게 넘어갔다. 맥클리넌드는 후방인 일리노이로 배치받아 사실상 보직없는 장교가 되었으나, 전쟁 후반 승리가 확실해지자 링컨은 정치적 안배를 위해 그를 복귀시켰고, 1864년 5월 맥클리넌드는 멀리 떨어진 텍사스에서 지휘관으로 복귀했다.

6월 22일에는 또 다른 지휘권 변경이 있었다. 전면에 있는 펨버튼에 더해서, 그랜트는 조지프 E. 존스턴 지휘하에 있는 남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만 했다. 존스턴은 빅 블랙 강 다리 근처에 일 개 사단을 배치했고, 다른 사단은 메카닉스버그(Mechanicsburg)까지 북쪽으로 정찰을 하면서 두 사단을 엄호 부대로 이용하고 있었다. 6월 10일 존 G. 파크 소장 하의 제9군단이 그랜트의 지휘권으로 넘어왔다. 이 군단은 존스턴이 캔턴(Canton)에서 병력을 집결시켜 포위를 방해하는 걸 저지하는 임무를 띈, 특수 작전 부대의 중핵이 되었다. 이 작전 부대의 지휘권은 셔먼에게 부여되었고 프레데릭 스틸(Frederick Steele) 준장이 제15군단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존스턴은 드디어 펨버튼을 구원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여 7월 1일에는 빅 블랙 강에 다다랐으나, 까다로울 수 있는 셔먼과의 조우를 회피하다가 빅스버그 수비대에겐 시기가 너무 늦게 되어 잭슨(Jackson)으로 후퇴했다.

5.2. 루이지애나 작전

포위전 동안, 북군과 남군 병력은 미시시피 강의 루이지애나 쪽에서 지원 역할을 하느라 바빴다. 남군의 미시시피 서부 부서(Trans-Mississippi Department) 사령관인 에드먼드 커비 스미스(Edmund Kirby Smith) 중장은 5월 9일에 미시시피 강을 따라 존재하는 그랜트의 통신선에 대한 작전을 요구한 펨버튼의 전보를 받았다. 그랜트는 스미스의 관할구역 안에 있는 밀리켄 굽이, 영 곶(Young's Point), 프로비던스 호수(Lake Providence)에 중요한 보급고를 설치했는데, 스미스는 펨버튼의 상황이 위중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6월이 돼서야 스미스는 리처드 테일러(Richard Taylor) 소장에게 "빅스버그 수비대를 위해 무언가를 하라."는 지시를 내려, 펨버튼에 요구에 따른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테일러는 서부 루이지애나 군구를 지휘하여 그랜트의 보급고 3곳에 대해 세 갈래로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이들 공격은 전부 격퇴당했다.

루이지애나 지역에서 늘어나는 남군의 활동에 대응하기 위해, 그랜트는 빅스버그 참호에 있는 병사들을 도하시켜 루이지애나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존 G. 워커(John G. Walker) 소장 지휘하의 사단이 특히 신경 쓰였는데, 빅스버그에서 남군이 철수할 수 있게 도와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알프레드 W. 엘렛(Alfred W. Ellet) 준장의 미시시피 해병여단과 셔먼 군단 소속의 조지프 A. 모워(Joseph A. Mower) 지휘 하의 여단이 밀리켄 굽이 근처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워와 엘렛은 루이지애나 주 리치먼드(Richmond) 근방에 주둔하고 있는 워커 사단을 상대로 협공을 가할 예정이었다. 거기다가 리치먼드는 루이지애나 주에서 빅스버그로 식량을 공급하는 중요한 보급선이기도 했다. 6월 15일, 엘렛과 모워는 워커를 패배시키고 리치먼드를 파괴했다.

엘렛의 부대는 데 소토(De Soto) 지점으로 돌아와서, 이미 쓴 북군 야포탄피를 재주조하는 주철 공장을 목표로 삼고 야포 포대를 건설했다. 건설은 6월 19일에 시작되어 철로의 철로 만든 포곽 안에 10파운드 패럿 포가 설치되었다. 목표로 삼은 주철 공장은 6월 25일에 파괴되었고 그 다음날에는 포대에 패럿 포가 하나 더 설치되어, 수비대가 항복할 때까지 방어군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루이지애나 주에서 있었던 또 다른 남군의 활동은 6월 29일, 굿리치 상륙지(Goodrich's Landing)에서 있었다. 남군이 옛 노예들이 관리하는 플랜테이션과 훈련소를 공격한 것이다. 남군은 플랜테이션을 파괴하고 100명 이상의 옛 노예들을 생포한 후 엘렛의 해병대와 마주치자 철군했다. 이런 남군의 기습은 성가셨고 피해를 입혔지만, 그저 경미한 차질에 불과했으며 남군이 루이지애나에서 그저 일시적인 혼란만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5.3. 제3루이지애나 철각보의 구덩이

북군 병사들이 포위 후반에, 제3루이지애나 철각보 아래로 굴을 파고 화약 2,200 파운드를 굴에 채워넣었다. 이 폭발로 6월 25일에 남군 수비선이 날아갔고, 로건의 제17군단 사단 병사들이 폭발 후에 공격을 했다. 재스퍼 A. 몰트비(Jasper A. Maltby) 대령 지휘하의 제45일리노이연대('선두 굴착 연대'로 알려져 있었다)가 지름 40피트(12m), 깊이 12피트(3.7m)의 구덩이에 손쉽게 진격했지만, 태세를 정비한 남군 보병들에게 저지당했다. 북군 병사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수비대들이 짧은 신관의 야포 탄을 구덩이로 쏟아부으면서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 북군의 폭파 전술의 실패는 후에 피터스버그 포위전에서 일어날 더 큰 비극의 예고에 불과했다. 북군 공병들이 보병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구덩이 안에 포곽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고, 병사들은 곧 새로운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6월 25일의 폭발로 생긴 구덩이에서, 북군 광부들은 남쪽으로 향하는 새로운 굴을 팠다. 7월 1일, 이 굴이 폭파되었지만 보병들의 공격이 이어지진 않았다. 7월 2일과 3일에는 공병들이 훗날 있을 것으로 예상한 공격을 위해, 보병 4개 종대가 지나갈 만큼으로 구덩이를 넓히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다음 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더 이상 공격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6. 항복과 이후

7월 3일, 펨버튼은 포트 도넬슨(Fort Donelson)에 있던 그랜트에게 급보를 보내, 처음에는 무조건 항복을 요청했다. 그러나 북군 포로 수용소에서 굶주린 3만명의 남군 포로들을 먹이는 걸 원치 않았던 그랜트는 다시 생각하여 모든 포로의 석방을 제안했다. 궁핍하고 사기가 꺾였으며 굶주린 남군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랜트는 남군이 다시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그는 남군이 패배의 오명을 나머지 남부 지역으로 전해주기를 바랐다. 어떤 경우에든 그렇게 많은 포로를 북부로 이송하는데는 군대를 바쁘게 할 것이며 몇 개월이 걸릴 것이었다. 7월 6일에 석방된 포로들 대다수는 1863년 8월 4일, 앨라배마 주 모빌 항(Mobile Harbor)에서 교환되어 남군으로 복귀했다. 복귀한 이들은 9월에는 테네시 주 채터누가(Chattanooga)로 돌아가 일부는 채터누가 전투를 치르고, 1864년 5월 셔먼의 조지아 침입 때도 싸웠다. 남부 정부는 석방의 타당성을 기술적인 부문에서 항의했으며, 이 문제는 1864년 4월 북군 총사령관이 된 그랜트에게 돌려졌다. 이 분쟁으로 이후 남북전쟁 중 까다로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더 이상의 포로 교환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항복은 늙은 오크 나무 옆에서 공식화되어, '이 사건으로 역사가 되었다.' 그랜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불행한 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무의 줄기, 뿌리, 가지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고, 그 조각은 기념물로서 가져갔다. 그 이후, 같은 나무에서 많은 나뭇줄이 기념물의 모습으로, '진정한 십자가'로서 제공되었다."

항복은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에 공식화되었고, 이 날은 펨버튼이 북부에게서 좀 더 동정적인 조건을 얻을 수 있을거라 기대했던 날이었다. 빅스버그 전역은 사소한 몇 개 작전이 계속되었지만, 요새 도시가 함락되고 7월 9일에 포트 허드슨(Port Hudson)이 항복하면서 미시시피 강은 확실히 북부의 손에 들어오자 남부는 둘로 쪼개졌다. 링컨 대통령은 유명한 선언을 남겼다.

"강의 아버지가 다시 바다로 거침없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또 7월 15일에 기도문으로 작성된 승리 선언문을 발표했다.
고통받는 이들의 기도를 받으시며, 오늘 승전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미 연방이 굳건하고 헌법이 준수되며 미국의 평화와 발전은 하나님이 뜻하신 바라 믿사오니,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주변의 전투와 빅스버그 포위로 북군이 겪은 손실은 4,835명이었고 남군은 32,697명이었다(29,495명 항복). 3월 29일 부터의 전역 전체에서는 북군 10,142명, 남군 9,091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항복한 병사에 더하여 펨버튼은 포 172문, 소총 5만정을 그랜트에게 넘겼다.

7. 유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빅스버그에서 독립기념일을 기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1907년부터 빅스버그에서 독립기념일 행사가 열렸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빅스버그 주변의 모든 것은 국립 공원국(National Park Service)에서 빅스버그 국립 군사 공원의 일부로서 관리하고 있다.


[1]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남부 연합의 교통의 요충지여서 물자 보급은 물론이고 중간 연락처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는터라 남군측의 병력증원 요청을 차단하는 목적으로도 꽤 중요한 지역이다. 당연히 북군의 입장에선 점령해야 할 이유와 명분이 있었다.[2] 존스턴은 언제나 병력 보존을 우선시하는 신중한 지휘관이었다. 빅스버그뿐만 아니라 반도 전역이나 애틀랜타 전역에서도 일관적으로 드러난 성향이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남부 연합의 대통령인 데이비스 역시 못마땅해했다.[3] 이에 대해 펨버튼이 북부 태생이었기에 도시를 잃었을 때 일반인들에게 받게 될 비난을 두려워 했다는 추측이 있다. 펨버튼은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북부인이었고 그의 두 동생들도 북부를 위해 싸웠으나, 아내가 남부인이었고 남부인 친구가 많아서 남부를 위해 싸웠다. 빅스버그 함락 이후 패전과 항복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남부인들로부터 어마어마하게 욕을 먹었고, 남북전쟁 이후에는 고향 펜실베이니아로 돌아와 거기서 살다가 죽었다.[4] 매컬리넌드는 정규 군대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미국 하원의원 중에서도 거물급 인물이었다. 비록 그는 링컨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더글러스의 동맹자였지만, 그의 부인은 링컨의 영부인과 절친이었다. 그는 이런 정치적 배경을 이용하여 링컨에게 직접 연락을 취할 수 있었고 심지어 직접 만나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가 다른 장군들을 헐뜯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랜트에 대해서도 좋은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랜트가 주정뱅이어서 작전중에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언론에 퍼뜨리기도 했다.[5] 사체들이 부패로 인한 비위생적인 환경과 이로 인한 전염병의 창궐은 포위전을 벌이고 있는 북군에게 있어서 좋은 일은 아니다.[6] 그랜트는 맥클리넌드가 어지간히 싫었는지, 역시나 맥클리넌드와 사이가 나쁜 장교를 보내 해임통보를 했다. 맥클리넌드는 군인으로써는 형편없었지만 정치가로써는 연륜이 있어서, 이 상황에서도 나름 재치있게 대응했다. 해임통보를 받자, "후련하네요."라고 답한 후, (자신과 사이가 나빴던) 해임을 통보한 장교를 슬쩍 보고는, "맙소사, 우리 모두 후련한가보네요!"라고 농담을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