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000>빅스버그 전역 Vicksburg campaign | ||
시기 | 1862년 12월 29일 ~ 1863년 7월 4일 | |
장소 | ||
교전국 | 미합중국(북부) | 미연합국(남부) |
지휘관 | 율리시스 그랜트 윌리엄 테쿰세 셔먼 | 존 C. 펨버튼 조셉 E. 존스턴 |
병력 | 테네시군 73,095명 | 미시시피군 65,8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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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남북 전쟁 중 물자의 이동통로인 바다와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여 남부를 양분하는 것을 내용으로하는 아나콘다 계획을 완성시킬 목적으로 북군의 율리시스 그랜트가 강가의 강력한 요새도시, 빅스버그를 공략하기 위해서 벌였던 일련의 군사작전을 의미한다. 이 전역의 마지막에 빅스버그 포위전으로 빅스버그가 북군에게 함락되면서 끝났다. 이 전역에서의 성공으로 율리시스 그랜트는 북군 최고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전쟁의 향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북부에 유리하게 기울게 된다. 특히 후반의 '그랜트의 대 빅스버그 작전'은 그랜트의 군사적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로 거론된다.2. 배경
북군의 서부전선 사령관 헨리 할렉이 승진하여 동부로 떠나자, 그 자리를 율리시스 그랜트가 이어받게 된다.그리고 할렉은 곧바로 1862년 11월 23일, 그랜트에게 빅스버그를 목표로 할당한다.미시시피 강은 바다에서 부터 커다란 나무가지 뻗어가는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미국 남부와 중부에 걸쳐서 물자가 운송되는 동맥과 혈관과 다름 없었다. 때문에 강을 장악하는 것은 전쟁의 시작부터 북군 아나콘다 계획의 중요한 목표였다. 이를 위해서 북군은 해군으로 강 하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한편, 육군으로는 강의 상류에서 부터 하류로 진격해 나간다. 하지만 그들의 진격은 각각 커다란 요새들에 의해서 막히는데, 해군의 길을 막은 것은 포트 허드슨(Port Hudson), 그리고 육군의 길을 막은 것이 바로 빅스버그다. 이 두 요새화된 도시들 덕분에 남군은 그 요새들 사이에 놓인 강 지류(루이지애나 주)를 여전히 지배하면서 철도와 배를 통해 서부의 풍부한 물자와 인적자원을 동부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빅스버그는 미시시피 강의 중간 쯤에 위치해 있는데, 바다에서 부터 큰 배로 접근하기 용이한 한계 지점에 놓여 있었다. 다시말해서 빅스버그보다 상류로 올라가려면 배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자연히 빅스버그 미시시피 강에서 중요한 중계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우회하는 변변한 수로가 없었기 때문에 이 보다 상류로 올라가는 배들은 곧바로 빅스버그 코앞을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병목 지점을 남부가 철저하게 요새화 시켜버렸다는 것이다. 덕분에 빅스버그는 서부의 지브롤터라는 별명[1]으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빅스버그를 함락하는 것이 이 전쟁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빅스버그는 열쇠다... 이 전쟁의 끝은 그 열쇠가 우리 호주머니에 들어오기 전에는 절대로 가까워 지지 않을 것이다."
("Vicksburg is the key. ...The war can never be brought to a close until that key is in our pocket.")
때문에 북군의 목표로 빅스버그가 떠오르게 된다.("Vicksburg is the key. ...The war can never be brought to a close until that key is in our pocket.")
사실 1862년 여름까지만 하더라도 빅스버그 병력증강이 이루어지기 이전이라 북군에게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할렉은 당시 바다에서 강을 따라서 올라오던 북군 해군의 대규모 진격의 위세를 전해듣고서는 그들의 화력만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여 군사행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고,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 전쟁이 계속되면서 드러났지만, 육군이고 해군이고 단독작전으로 요새를 공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마침내 북군의 해군작전에 위협을 느낀 남부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빅스버그가 북부의 목표로 떠올랐다는 것을 인식하고 병력증강을 한다.[2] 그래서 그랜트가 지휘권을 잡을 겨울 무렵에는 공략이 훨씬 어려워져 있었다. 게다가 계절적인 어려움도 있었는데, 미시시피강이 수량이 겨울에는 줄어들었다. 때문에 작은 배를 동원 할 수밖에 없고, 이는 보급선을 유지하면서 병력을 움직여야하는 북군에게 더 큰 어려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시스 그랜트는 지휘권을 잡자마자 바로 빅스버그로 진격을 시작한다.
3. 양측 지휘관
빅스버그 주변은 주로 펨버튼의 미시시피 동루이지애나군(이하 미시시피군)이 방비하고 있었다. 미시시피군에는 총 5개 사단, 4.3만 병력이 있었는데, 이 중 2개 사단이 빅스버그에 주둔하고 있었고, 빅스버그보다 북쪽의 그레나다(Grenada)에 나머지 3개 사단 3만 병력이 동서로 흐르는 작은 강을 이용하여 북군의 남하를 직접 견제하고 있었다. 별도로 홈스 휘하의 중미시시피군이 미시시피강 삼각주 서쪽 아칸서스 요새에 6천명 있었다. 한편 북군의 테네시군은 라그랑지(Lagrange)에 주둔했는데, 4만 병력이 있었다.펨버튼은 본래 북부 펜실베니아 출신이었지만, 유력한 남부가문의 여성과 결혼해서 남쪽으로 온 군인이었다. 미육사 출신이었고, 멕시코 전쟁에 참전 경험이 있었다. 다만 야전 지휘관으로의 경험은 거의 없었다. 그의 커리어는 대부분 사단급 참모직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가 빅스버그 방어지휘관으로 앉은 것은 상당부분 그의 장인의 정치적 영향력이 필요했던 대통령 데이비스의 의도 때문이었다. 때문에 미시시피군 사령관으로 발령받고 나서 펨버튼은 스스로의 역할을 야전 사령관이 아니라 일선 지휘관들을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역할로 이해했다. 그는 근처 플랜테이션에서 노예들을 차출해서 빅스버그를 요새화하는 한편, 빅스버그 안에 주둔군이 사용할 5개월치 식량을 확보하는 노력을 하는데 집중했다. 반면에 야전 지휘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는데, 5개 사단을 총괄하는 군단 사령부도 설치하지 않았다. 게다가 홈스의 아칸서스 주둔군 또한 펨버튼의 지휘하에 놓여있지 않았다는 문제도 있었다. 이러한 남군의 조직적 약점은 나중에 남군이 각개격파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져버리는 문제로 연달아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사단급 지휘관은 로링을 제외하고는 모두 육사출신이었고, 로링조차 남군이 건설되기 이전부터 대대를 지휘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진급해온 뛰어난 군인이었다. 특히 사단장 중에 가장 선임인 스미스는 이미 빅스버그를 한번 지켜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펨버튼이 활용하기 좋은 상황이었다.
펨버튼의 상관은 서부 사령관 조세프 존스턴이었는데, 전쟁개시 당시 남부에 넘어온 가장 높은 계급의 장성이었으나, 병력을 보존하면서 지연전에 치중하는 성향 때문에 인기를 잃은 상태였다. 그는 빅스버그 방어 계획을 거점마다 남군의 일부를 배치하고, 그들이 방어하는 동안 주력이 기차로 이동해서 증원하는 광범위한 지역방어 방식으로 짰다. 이것은 빅스버그만 최우선적으로 지켜내라는 대통령의 명령과는 정면 충돌하는 것 이었는데, 빅스버그 주변을 북군에 내어준다는 것은 그곳의 민심은 물론 이 지역 지원병들이 상당 수 포함된 미시시피군의 사기와도 연결되는 문제라서 존스턴이 더 현실적이었다고 평가되는 편이다. 게다가 존스턴의 지역방어 계확은 전역 초기에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서 북군이 제대로 발도 못붙이며 곤란하게 만들게 된다. 다만 한가지 문제는 그가 이전 반도전역에서의 부상으로 오랜기간 서부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이는 나중에 전세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그가 잭슨빌에 나타남으로써 남군이 상황통제력을 상실하는 문제로 나타나게된다.
율리시스 그랜트군의 중요 지휘관은 셔먼, 제임스 B. 맥퍼슨, 존 A. 매클러넌드가 있었다. 셔먼과 맥퍼슨은 육사출신이었고, 매클러넌드는 일리노이주의 유력한 민주당 정치인으로써, 스스로 군대를 모집해서 나온 의욕적인 정치군인이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그를 통해서 일리노이주의 지지를 얻고자 했기 때문에 상당한 자율권을 주고, 군단지휘권도 약속을 한 상태였다. 게다가 공명심도 많았기 때문에 그랜트가 지휘하는데 좀 골치가 아픈면도 있었다. 셔먼과 마찰도 심해서 상호 불신이 깊었다. 때문에 그랜트는 그에게 군사적 능력이 덜 필요한 임무를 높은 자율권을 주면서 맡기는 방식으로 그를 통제하려 했다.
그랜트에게 가장 중요한 지휘관은 사실 그의 휘하에 있는 장군들이 아니라, 그와 협조하는 미해군 포터 제독이었다. 그랜트는 이례적으로 이 해군 지휘관과 높은 신뢰를 쌓았는데, 덕분에 결정적인 순간에 해군의 도움을 받으며 이 전역을 풀어나가게 된다.
4. 대 빅스버그 작전과 그랜트의 바유 작전
1862년 12월부터 1월까지 이루어진 북군의 겨울 군사작전들을 대 빅스버그 작전(the operations against Vicksburg)이라고 부르고, 1월부터 3월까지 이루어진 작전을 그랜트의 바유 작전(Grant's bayou operations)이라고 부른다. 이 두 작전기간동안 그랜트는 빅스버그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실패한 작전들, 호의적으로 평가해도 실험적 작전들 정도로 본다.
율리시스 그랜트는 11월 14일 첫 작전을 시작하면서 군대를 크게 둘로 나눈 양동작전으로 계획한다. 서쪽 미시시피 강을 따라서는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멤피스에서 3개사단 3만명을 새로 모집해서 남하하도록 하는 한편, 동쪽의 육로로는 자신의 본대 4만 병력을 동시에 남하하게 한다. 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막히는데, 평탄한 지형을 움직이는 동쪽 그랜트 본대가 남군 반 돈 지휘하의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의 기병대에 의해 보급로가 공격당하면서 얼마못가서 멈춰버린 것이다. 기병대는 주로 철도역을 노렸는데, 그 과정에서 북군 수백명의 포로와 대포 손실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홀리스프링스역에 있던 엄청난 규모의 보급창고가 불타버렸다는 것이었다. 보급품 손실로 군대를 움직일 수가 없어진 그랜트는 결국 본대를 보급선이 닿는 미시시피 강가로 후퇴시켜야 했다.[3] 문제는 이렇게 그랜트의 본대가 이탈해 버리면서 본래 고착시켜야 했던 남군의 병력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기차를 타고 나중에 치카소우 늪에 나타난다.
서쪽을 맡은 셔먼의 3개 사단의 경우 보급선의 위협은 받지 않았다. 미해군 미시시피강 편대(Mississippi River Squadron)와 같이 움직이면서 순조롭게 강의 서편으로 남하하여 빅스버그의 코앞에서 강 건너편으로 12월 27일 도하한다. 그런데 이 도하지점은 치카소우 늪(Chickasaw Bayou)이라 불리는 지형이었는데, 이 늪 뒷편에는 언덕과 월넛 숲이 놓여있어서 남군이 고지에서 방어하기 매우 이상적인 지형이었다. 이곳에 남군 1.4만 병력을 데리고 빅스버그에서 나온 펨버튼은 고지와 월넛 나무들 사이에 병력을 숨기고서는 늪을 느리게 가로질러오는 북군을 오리사냥하듯 손쉽게 피해를 입혔다. 결국 셔먼은 1700명이라는 남군의 10배에 달하는 일방적인 사상자를 내고서는 물러나야만 했다. 때문에 이곳은 셔먼이 실패한 곳(Where Sherman failed)라는 별명이 언론에 의해서 붙는다. 결과적으로 그랜트의 양동작전은 내선의 이점을 살린 남군에게 각개격파 당하면서 막혀버린 꼴이 되어버렸다.이 실패로 북군은 빅스버그에 대한 접근조차 만만치 않을 것임을 실감한다. 그래도 해군의 활동을 위해서 일단 미시시피강을 장악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셔먼은 돌아오는 길에 남군 6천으로 방비되던 미시시피 삼각주의 서쪽에 위치한 홈즈의 아칸서스 요새를 해군과 협동하여 1월 11일 함락한다. 지휘관 홈즈는 펨버튼과 공조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요새를 잃었다.
한편 그랜트는 빅스버그 코앞에서 도하하는 작전이 막혔으니, 다른 지점들에서 도하하는 것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1월부터 4월까지의 작전을 그랜트의 바유 작전(Grant's bayou operations)이라고 부른다. 대 빅스버그 작전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시도 끝에 실패한 작전으로 평가된다.
그랜트의 목표는 북군을 빅스버그 측면에 진출시키는 것이었다. 문제는 빅스버그 요새의 포들이 빅스버그보다 남쪽으로 배를 움직이는 것을 막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그랜트는 남군의 병력이 적을 것이 분명한 빅스버그의 남쪽에 도하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랜트의 운하(Grant's Canal)라고 불리게 되는 수로를 건설하는 공병작전을 시도한다. 빅스버그 코앞의 위치에다가 그 대포를 피해서 배가 다닐 수 있는 우회로를 확보하려고 했다. 북군은 일단 물을 막고, 땅을 파내서 수심이 깊은 수로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겨울이 끝나면서 미시시피 강의 물이 갑자기 불어나면서 물을 막던 댐이 무너지고, 결국 땅을 충분히 파내기도 전에 전체가 수몰되면서 실패한다. 그랜트의 운하(Grant's Canal)라는 이름도 이러한 실패를 비꼬면서 붙인 이름이다. 그래트 = 바보(fool)로 불리고 있었는데, 영어에서 Fool's 라고하면 '엉터리 가짜'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 멍청한 가짜 운하라고 비아냥 거린것이다. 특히 남부는 이 운하의 실패를 너무나 기쁘게 여겨서 현재도 이 운하의 잔재를 보존 중이다.
수로가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북군은 빅스버그 북쪽에서 도하하는 선택지를 반복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앞의 셔먼의 실패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했다. 빅스버그 인근의 지형은 모두 전방의 늪지대 + 뒷 편의 숲 + 언덕이라는 최고의 자연적 방어선을 구성하고 있었다. 어디로 도하하든지 셔먼과 똑같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펨버튼은 군대를 빅스버그에 박아놓지 않고 끌고나와서 움직이면서 적극적으로 방어를 했는데, 아예 도하부터 봉쇄해버리는데 거듭해서 성공한다. 예를 들어 북군의 야쭈 원정(Yazoo)에서 북군이 빅스버그의 먼 북쪽에 도하를 노리자, 펨버튼은 거기까지 북상해서 북군이 지체하는 사이에 해당지점을 요새화 시켜버렸다. 여러모로 펨버튼의 수성은 매우 모범적으로 잘 수행되고 있었다. 결국 돌파구가 없는 빅스버그의 북단은 포기하고, 남쪽에서 도하해야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그래서 그랜트는 다시 운하 뚫는 작업을 시도(Duckport Canal)하는데, 이번에는 수량이 오히려 줄어들면서 가장 작은 배 조차 통과하기 어려워지면서 실패했다.
이렇게 대 빅스버그작전은 일단 실패로 끝난다. 북부 여론은 험악해져서 그랜트를 교체해야한다는 주장이 빗발친다.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를 막아내며 그랜트를 지켜냈는데, 사실 링컨도 빅스버그 공략이 불가능하지 않겠냐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 하지만 이러한 세상의 비난을 비웃듯이 율리시스 그랜트의 전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5. 그랜트의 대 빅스버그 작전
율리시스 그랜트는 군대를 빅스버그 남쪽에 도하시킨다는 목표를 정했다. 이를 가로막는 문제가 두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진격로이고, 다른 하나는 보급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배를 타고 병력과 보급을 움직이는 것이지만, 빅스버그의 막강한 포대에 막혀서 이것은 불가능했다. 그러자 그랜트는 그러면 따로 따로 보내면 되지 않겠냐는 발상을 떠올린다.
우선 군대가 움직일 진격로를 정했는데, 그랜트는 미시시피강의 서쪽을 따라서 남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계획은 큰 장애물이 있었는데, 미시시피 강의 악명높은 늪지대를 구부진 강을 따라서 100킬로미터 넘게 뚫고가야 한다는 것이다. 수만의 병력이 움직여야 하는 만큼 결코 가능해 보이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북군은 흡사 고대 로마군대와 카이사르를 떠올리게하는 대규모 공병작업으로 이를 극복해낸다. 3/19부터 셔먼 휘하의 맥클런드의 사단이 이 미시시피 강 서쪽을 따라서 통나무를 깔고, 늪지대를 흙으로 메꾸며 1달 가까이 작업하여 무려 110킬로미터의 길을 도하지점으로 정한 하드 타임즈(Hard Times) 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보급의 문제는 매우 저돌적인 방식으로 해결했다. 빅스버그 포대 바로 앞을 그냥 두들겨 맞으면서 지나가버린 것이다. 4/16 달이 없는 밤을 골라서 건보트 7척 + 수송선 3척을 보냈다. 철저하게 소등하고, 엔진 소음에 대책을 세워서 남군 몰래 지나가버린다는 것이 본래의 생각이었는데, 그러한 노력이 허무하게도 통하지 않아서 남군의 빅스버그 포대는 즉각 사격을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포탄이 북군의 배들에게 쏟아졌다. 그런데 이 와중에 북군 함대는 남군의 포대들이 내림각이 그다지 깊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배를 격침 시키려면, 배와 물이 닿는 지점이 흘수선을 노려야 하는데 남군의 포탄은 엉뚱하게 훨씬 위쪽만 박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깨달은 북군의 함장들은 적의 포대 바로 밑으로 배를 기동해서 적의 포탄을 머리 위로 지나가게 피하면서 경미한 피해만 입고 지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남군 포대의 실패는 어느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전 후 조세프 존스턴은 당시 펨버튼이 구축한 빅스버그 축성물에 대해서 평을 했다.
큰 공학적인 문제가 있었다. 강가의 포대들은 적의 수로 이용을 봉쇄하는 것보다 빅스버그를 포격에서 지키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다. 전면에 2마일에 걸쳐서 배치되었는데, 적선을 한척식 집중하는 화점을 만드는 대신에 말이다.
남부 서부 사령관 존스턴
남부 서부 사령관 존스턴
한편 그랜트는 북군의 주공이 빅스버그 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감출 필요를 느끼고 성동격서 성격의 작전 2개를 준비했다. 하나는 이전에 그랜트의 본대를 괴롭혔던 남군의 기병대를 떼어놓는 작전이었다. 4/17, 그리어슨(Benjamin H. Grierson)이 지휘하는 기병 1개 여단 1700필로 하여금 남군의 철도를 따라서 약탈을 하면서 남하하도록 했다. 그리어슨의 레이드라 불리게 되는 이 작전은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되어서 짧은 기간 동안 970킬로미터를 이동하면서 그 여단은 철도역과 3,000명 무장시킬 분량의 군물자를 불태우고, 1,000필의 말과 당나귀를 노획하는가 하면, 노예까지 풀어주면서 일대의 혼란을 일으키며 요란하게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적과의 접촉은 최대한 피했기 때문에 사상자는 불과 25명에 불과했다. 이 것은 남부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북군이 남부의 본토를 깊숙히 헤집고 다니면서 약탈을 벌인것은 이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남부여론에서 성토가 쏟아졌고, 결국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남군은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의 기병대로 하여금 추격하게 한다. 하지만 이 추격은 북군의 다른 기병대를 막는 약간의 성과만 거두었을 뿐 정작 그리어슨과는 접촉한번 못한채 그리어슨 여단이 미해군이 점령한 지역으로 빠져나가버림으로써 끝이 난다. 한편 또 하나의 작전은 남군의 본대의 발을 묶는 목적으로 아래에서 서술하는 4/29 도하작전과 같은 날에 이루어졌는데, 미리 셔먼의 군단에서 1개 사단을 빼내서 이전과 똑같이 빅스버그 북쪽에서 도하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도록(스나이더의 블러프 전투:Synader's Bluff) 한 것이다. 여기에는 4만명의 그랜트 본대 병력이 예전과 똑같이 동쪽 육로로 내려오게 해서 남군으로 하여금 그가 양동작전을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다. 이러한 북군의 대규모 움직임은 남군 본대가 혹시라도 남쪽으로 기차를 타고 내려가 버리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를 일으켰다.
마침내 준비가 끝나자 그랜트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북군은 예정대로 윌리엄 테쿰세 셔먼을 선임으로하는 3개 군단이 맥클런드가(승진해서 군단장이 되어 있었다) 깔아놓은 통나무 길을 이용해서 남하했다. 그리고 빅스버그 보다 남쪽 40km 즈음에 위치한 하드 타임즈(Hard Times)에서 다리를 만들어 건너갈 준비를 했다. 한편 이를 지원하기 위해서 미해군의 철갑선 7척이와서 건너편의 요새에 포격을 가해서 제압을 시도(그랜드 걸프 전투)했다. 하지만 요새의 방어력은 생각보다 훌륭했고, 이 포격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랜트는 셔먼의 군단이 그랜드 걸프 요새를 계속 견제하는 사이에 나머지 2개 군단이 더 남쪽 브루인스버그(Bruinsburg)로가서 도하를 시도하도록 지시한다. 철갑선들은 바지선을 호위하며 남하했고, 그리고 이들의 도움으로 2개의 군단은 마침내 4/29, 그랜트가 작전을 시작한지 약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도하에 성공한다. 위 그리어슨 기병여단의 활약으로 남부 기병대의 견제를 받지 않은 이 2개 군단은 곧장 깁슨항(Port Gibson)으로 진격하여 맥클렌 군단 주도로 단 하루만에 함락(5/1)시킨다. 북군의 우월한 포병을 앞세워서 포격전으로 남군의 포대를 제압하고 2만명의 보병이 공격하지 기세에 눌린 남군 8천이 물러나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두개 군단이 계속 동진하면서 후방을 위협하자, 셔먼 군단을 견제하던 남군의 그랜드 걸프의 병력은 의미를 잃어버린 요새를 포기하고 빅스버그에 합류하기 위해 북상한다. 이틈을 타서 셔먼 군단도 도하하면서 북군의 3개 군단이 빅스버그 남쪽 진출에 성공한다.
여기서 그랜트의 다음수가 매우 중요했다. 상식적으로는 그랜트의 목표가 애초에 빅스버그인 만큼, 군대를 빅스버그로 향하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실제로 남군도 그러한 기대를 하고 일단 빅스버그를 보강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랜트는 빅스버그를 제압하려면 이를 지원하는 주변세력을 먼저 제압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의 기대를 깨고 북진이 아니라 동진을 하기 시작한다. 그의 목표는 빅스버그 동쪽의 철도가 모이는 미시시피주의 주도, 잭슨시 였다. [4]
그는 3개 군단을 동진시키면서 왼쪽에 빅 블랙 강(Big Black River)를 끼고 움직이게 했는데, 혹시나 펨버튼이 빅스버그에서 나와서 북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위함이었다. 그랜트의 군대가 빅스버그가 아닌 잭슨시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펨버튼은 빅스버그를 나와서 그랜트의 후방 치려고 철도를 이용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잭슨시의 존스턴은 남부에 지원군을 요청했는데, 찰스턴항을 지키던 피에르 보우리가드의 군대가 올것이라고 전보를 받는다. 존스턴은 이 지원군을 받아서 펨버튼과 협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곧 현실성이 없는 계획이란 것이 드러난다. 수만의 지원군이 기차로 이동한다는 것은 길면 3개월까지 걸리는 매우 큰 전략기동이었다. 하지만 그랜트는 3개월은 커녕 앞으로 단 일주일만에 전역을 정리해버릴 속도로 움직인다. 그랜트는 5/11, 잭슨시로 가는 길목에 30km 지점에 있는 레이몬드를 먼저 친다. 초기에 북군 단 1개 군단 1만 병력을 마주한 남군 4천 병력은 한동안 자신들이 3배 숫자의 북군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분전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포병 화력과 병력차이가 명백해지자 잭슨시 방향으로 퇴각한다. 한편 그랜트는 뒤에서 펨버튼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탐지하고, 멕클런드의 군단으로 이를 고착시키도록 하는 한편 나머지 2개의 군단으로 잭슨시를 5월 14일에 공격한다. 잭슨시 존스턴은 아직 6천의 병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존스턴은 그가 앞서 요청한 남군의 지원군이 시간내에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서는 잭슨시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일단 군대를 물린다. 이것은 전술적으로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지만, 전략적으로는 큰 손해가 되었는데, 셔먼 군단이 물자와 철도를 철저히 파괴하는 한편 전신선을 끊어버리면서 존스턴과 펨버튼 사이의 연락이 두절된 것이다. 때문에 펨버튼은 존스턴이 북쪽으로 이탈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잭슨시로 계속 나아가려고 했다.
5.1. 챔피언 힐 전투
그랜트는 셔먼 군단에게 잭슨시 파괴를 맡게하고, 나머지 2개 군단으로 빅스버그에서 나와있는 펨버튼의 미시시피 군 2.2만과 5월 16일에 결전을 노린다. 이것이 챔피언 힐(Champion Hill) 전투다. 공격을 시작하면서 그랜트는 펨버튼이 빅스버그로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든지 차단해서 야지에서 끝장내려고 했다. 남군의 뒷편에는 빅스버그의 동쪽을 흐르는 강 빅 블랙리버 지류인 베이커 크릭(Baker Creek)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랜트는 이곳 잭슨로드에 놓인 다리를 남군의 유일한 퇴로로 파악했다. 그래서 맥클런드 군단의 4개 사단으로 남군의 3개 사단[5] 모두를 고착시키고, 맥피어슨 군단의 3개사단을 북군의 우익을 맡게해서 곧장 다리까지 진격시킬 계획을 세웠다. 한편 같은날 펨버튼은 뒤늦게 존스턴의 전령을 받아들고는 빅스버그로 퇴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는 빅스버그로 향하는 2개의 길을 방어하면서 퇴각하려 했는데, 그 동안 레이몬드를 점령하며 그와 대치하던 맥클런드의 4개 사단만 봤기 때문에 맥피어슨 군단 3개 사단이 남군 좌익으로 조만간 쏟아질 것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다행히도 남군의 좌익을 맡은 스티븐슨 사단은 우회해서 오는 북군의 3개 사단을 포착하고서는 사단을 여단 단위로 쪼게서 각각 북군의 1개 사단을 막도록 지시한다. 남군 좌익이 이러한 분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남군 중앙의 보웬 사단도 정면을 내버려두고 빨리 남군 좌익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인다. 이로 인해서 갑자기 더 많은 남군을 마주한 북군 우익은 일시적으로 패퇴한다. 하지만 곧장 북군 우익이 재공격에 나섰을 때 스티븐슨 사단이 이미 패퇴하고, 보웬이 혼자서 공격을 고스란히 다 받아내는 일이 일어나고, 이로인해 보웬의 군마저 무너진다. 이제 남군은 퇴각하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북군의 우익은 당초 그랜트가 계획한대로 베이커 크릭의 다리까지 진출하면서 남군의 퇴로를 끊어버린다. 남군의 좌익 스티븐슨의 병력 일부는 패퇴하면서 북군의 우익보다 먼저 다리를 건너가 버렸지만, 나머지 남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남군은 퇴각을 위해 급히 레이몬드 길에 다리를 놓는데 이를 이용해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남군 좌익과 중앙은 이 다리를 건너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남군의 우익이었던 로링 사단이 다리를 막 건너려고 할 때 다리 건너편에서 북군의 우익 로건 사단과 크록커 사단이 나타났다.
로링은 다리건너편의 북군을 보고서는 북군이 그 뒷편의 기차역까지 점령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기차역에는 아직 펨버튼의 본대가 있었다. 만약에 펨버튼과 협공하면 우회해온 북군을 4배의 병역차로 손쉽게 물리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통신이 차단 되어있어서 펨버튼은 로링을 구원하러 다리까지 돌아가야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로링은 북군 뒷편에 펨버튼 본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로링은 단념하고 자신의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동쪽의 잭슨시 방면으로 빠져나가려고 남하해버린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펨버튼은 빅 블랙리버 다리에서 로링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던 로링은 나타나지 않고 북군이 나타나 공격을 해오자(빅 블랙리버 전투) 남군은 단념한체 빅스버그로 퇴각한다. 로링의 8천 병력이 전선에서 이탈해버린 것은 이어지는 빅스버그 포위전에서 남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는데, 북군과 병력차이가 과도하게 벌어지면서 펨버튼이 이전과 같은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어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남군은 일방으로 수세에 몰려서 북군의 포격을 두둘겨 맞으며 희망없이 버텨야하는 처지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이렇게 그랜트는 단 17일 동안 적지에서 300km 넘게 행군하면서 5번의 전투를 치른 끝에 지난 6개월간 노렸던 목표인 빅스버그에 마침내 도달함과 동시에 완전히 고립시킨다.
6. 빅스버그 포위전
7. 결과 및 영향
8. 기타
- 후반부 그랜트의 대 빅스버그 작전은 미 육군 사관학교에서 다각도로 장시간 학습하는 주제라고 한다.
- 걸프전쟁의 사막의 폭풍작전 또한 이 작전에 영향을 받았다고 미군은 자평했다.
[1] 한 국가의 생명선을 통제하는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의미다. 프랑스 제1공화정 시기부터 이미 쓰이던 관용 표현인데, 당시에는 왕당파가 해외로부터 군대와 물자를 들여오는 거점이었던 툴롱의 수로를 통제하는 반도 끝자락의 포대 위치를 '작은 지브롤터'라고 불렀다. 이곳은 젊은 나폴레옹에게 공략당했다.[2] 남부 내부에서 이러한 결정에 적지않은 반발이 있었다. 다수의 군인들은 그렇게 병력을 분산할 것이 아니라, 동부 전선에 병력을 집중하여 워싱턴 D.C.를 놓고 결전을 벌이려는 로버트 리의 북부침공계획(나중에 게티스버그 전투로 이어지는 작전)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링컨과 마찬가지로 빅스버그가 이 전쟁의 향방을 크게 좌우할 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독단으로 결정을 밀어붙인다.[3] 기병대가 사단급으로 작전하면서 한 전역을 주저앉힌 것은 남북전쟁을 통틀어서 이 사건이 유일했고, 때문에 그랜트와 셔먼 등 북군의 서부 지휘관들은 포레스트 기병대라고 하면 아주 학을 떼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제거하는데 눈에 불키고 다니게 된다.[4] 이러한 결정은 링컨조차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링컨은 이것이 명백한 실책이며, 그랜트가 빅스버그를 일단 무시하고 남하해서 뱅크스와 합류한 다음 남쪽 요새들부터 공략하며 북상하는 것이 옳다고 봤기 때문이다.[5] 남북군 편제가 달라서, 남군의 사단은 병력 숫자가 북군의 군단급이다. 남군 연대가 북군보다 1.5배 숫자의 대대를 가졌는데, 사단급도 그러한 대형 연대를 1.5배 산하에 두었기 때문에 남군 사단은 2배에서 4배까지 규모가 컸다. 북군 편제상 사단 2~4는 군단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