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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5 00:24:53

조 믹

파일:NME.png 선정 가장 위대한 음악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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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음악 잡지 NME가 2012년 "50 Of The Greatest Producers Ever"를 선정한 순위다.
<rowcolor=#fff,#000> 1위 2위 3위 4위 5위
조 믹 조지 마틴 퀸시 존스 나일 로저스 필 스펙터
<rowcolor=#fff,#000> 6위 7위 8위 9위 10위
릭 루빈 브라이언 이노 브라이언 윌슨 부치 빅 닥터 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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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000>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리 스크레치 페리 아리프 말딘 팀발랜드 나이젤 고드리치 티 본 버닛
<rowcolor=#fff,#000>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넵튠스 스티픈 스트리트 토드 런그렌 다니엘 라누아 앤드루 웨더럴
<rowcolor=#fff,#000>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크리스 토마스 베이비페이스 짐 스타인먼 DJ 프리미어 존 레키
<rowcolor=#fff,#000>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테오 마세로 로버트 존 머트 랭 제이 딜라 베리 골디 샘 필립스
<rowcolor=#fff,#000>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톰 다우드 지미 로바인 데인저 마우스 비두 제프 린
<rowcolor=#fff,#000>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맥스 마틴 마크 론슨 프린스 트렌트 레즈너 스티비 릴리화이트
<rowcolor=#fff,#000>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트레버 혼 스티브 알비니 지미 밀러 제리 웩슬러 로이 토마스 베이커
<rowcolor=#fff,#000>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RZA 피트 록 조지 클린턴 폴 에버스 DJ 섀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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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NME 선정 500대 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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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조 믹
Joe Meek
파일:b22f013ecfd795933179a6f40af6d1dc.webp
본명 로버트 조지 믹
Robert George Meek
출생 1929년 4월 5일
영국 잉글랜드 글로스터셔 주 네웬트
사망 1967년 2월 3일 (향년 37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음반 프로듀서, 음향 엔지니어, 송라이터
장르 익스페리멘털 팝, 스페이스 에이지 팝, 로큰롤
활동 1954년 ~ 1967년

1. 개요2. 생애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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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음반 프로듀서, 음향 엔지니어, 작곡가.

2. 생애

1929년 4월 5일, 글로스터셔 주 네웬트에서 태어났다.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했으며, 전자 공학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A] 18세에 공군에 입대했고, 전역 후엔 미들랜즈 일렉트릭시티에서 일했다. 1953년 여름엔 그곳에서 음향 효과 편집본인 첫번째 음반을 만들어냈다.[2]

이후 믹은 음악에 뛰어들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1년엔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한 존 레이턴의 "Johnny Remember Me"를 프로듀싱했고 이듬해엔 영국 최초의 빌보드 1위 곡인 "Telstar"를 작곡 및 프로듀싱했다.[3] 이 곡의 큰 성공으로 그는 아이버 노벨로 어워드를 받았지만 표절로 고소를 당했다. 소송은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론났으나, 그가 죽고 3주 후에야 끝났기에 결국 그는 생전엔 로열티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A]

1964년엔 그가 프로듀싱한 더 허니컴스의 "Have I the Right?"이 핫 100에서 5위까지 올라갔다. 그는 한평생 제대로 음악을 배운 적이 없었으며, 악보를 볼 줄도 모르고 연주할 수 있는 악기도 없었지만 기발한 창의력으로 신선한 히트곡들을 만들어냈다.

이 기간 동안 조 믹은 필 스펙터보다 앞서 [5] 오버더빙, 샘플링 등의 스튜디오 실험을 대중음악 최초로 도입했다. 실제 공연자의 연주를 실황 녹음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악기 소리를 따로 녹음한 뒤 합치고 에코, 리버브 등으로 소리를 왜곡했는데 이는 지금에야 당연한 녹음 기술로 받아들여지지만 당대에는 전례가 없던 혁신이었다. 또한 집에 자체적인 녹음 스튜디오를 차리고 우유를 빨대로 불어 거품 나는 소리, 싱크대에서 물이 빠지는 소리, 전기 회로가 합선되는 소리, 숟가락으로 병을 두들기는 소리 등 다양한 소리를 녹음해 변형, 합성하는 등 구체 음악에 경도되는 모습 또한 보여주였다. 이 홈 스튜디오의 작업물은 1959년 "I Hear a New World"라는 LP로 발매될 예정이었지만 음반사의 재정난으로 취소되었고 1960년 데모용 EP가 99장 풀리는 데 그쳤다. 전체 녹음은 먼 훗날 발굴되어 1991년에 들어서야 공개되었는데 들어보면 1950년대에 녹음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혁신적인 사운드가 돋보인다.

하지만 그의 사생활은 매우 불행했는데, 1963년부터 그의 삶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1963년에 'Cottaging'[6]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게 언론에 보도되면서 협박을 받게 되었다.[B] 또한 당시 영국은 동성애가 불법이었기에 그는 어머니가 자신이 게이인 걸 알게 될까봐 두려워했으며, 동성애자임을 빌미로 곤경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늘 밖을 나갈 때마다 선글라스를 끼고 나갔다.[8] 게다가 생전 조현병[9]양극성 장애[C]를 앓고 있었으며, 1966년엔 바르비투르산 과복용으로 양극성 장애가 악화됐다.[C] 심지어 마피아에게 몇 번 폭행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B]

지속적인 재정 악화로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1967년 2월 3일에 집주인을 살해하고는 자신도 산탄총으로 자살해 생을 마감했다.

3. 평가

1950-60년대 대중음악의 선구자로,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프로듀서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A][14]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으며, 앨런 튜링과 함께 호모포비아 시절 영국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로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A] [2] Wayne Bennett, "Welcome to Meeksville: The Incredible World of Joe Meek.", traxploitation.co.uk, 2019.10.25.[3] 연주는 더 토네이도스 (The Tornadoes)가 맡았다. 이후 이 밴드는 반짝스타로 끝나고 만다.[A] [5] 필 스펙터랑 라이벌 사이였지만, 믹이 공개적으로 스펙터를 표절범이라 비난하는 등 사이가 나빴다. 정작 스펙터도 한창 뒤에 믹처럼 살인 혐의로 몰락했다는게 아이러니.[6] 남성 동성애자가 공중 화장실에서 성관계를 맺을 대상을 찾는 것을 말한다.[B] Koos Couvée, "The life and violent death of genius music producer Joe Meek", 「Islington Tribune」, 2017.2.10.[8] "Joe Meek", 위키피디아[9] Manchester Evening News, "Moran's Meek tale set go large", 「Manchester Evening News」, 2005.6.30.[C] Manchester Evening News, "Not a meek and mild story...", 「Manchester Evening News」, 2009.6.25.[C] [B] [A] Heather Phares, "Joe Meek: Biography", 올뮤직[14] 그의 이름을 딴 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 Rob Hughes, "Brian Eno wins the first Joe Meek award", Audioprointernational.com, 2009.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