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대 시카고 시장 제인 마거릿 번 Jane Margaret Byrne | |
<colbgcolor=#b4def2><colcolor=#ff0000> 출생 | 1933년 5월 24일 |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
사망 | 2014년 11월 14일 (향년 81세) |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재임기간 | 제50대 시카고시장 |
1979년 4월 16일 ~ 1983년 4월 29일 | |
정당 | |
가족 | 남편 윌리엄 번 (1956~1959) 남편 제이 맥뮬런 (1978~1992) |
학력 | 세인트 메리 오브 더 우즈 대학교 바랫 대학교[1] (B.S.) |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로리 라이트풋 당선 이전까지 유일한 여성 시카고 시장이었다.2. 생애
2.1. 시장이 되기까지
1933년 시카고 노스 사이드의 오대호 연안 레이크뷰 지구에서 태어났다. 세인트 메리 오브 더 우즈 대학교를 다니다 바랫 대학교로 편입학해 생물학, 화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정계 입문 의지가 없었지만 1959년 미 해병 항공대 조종사였던 남편 윌리엄 번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1960년 대선에서 존 F. 케네디의 선거 운동을 도우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시카고 시장이자 쿡 카운티[2] 민주당의 보스인 리처드 J. 데일리의 머신에 속하게 되었다. 번은 시의 Head Start Project[3]에 참여하고 다른 시내 빈곤 퇴치 프로그램에도 참여하며 경력을 쌓는다. 그는 데일리의 비호를 받으며 시카고 도시 기회 위원회, 시 소비자 부서장, 쿡 카운티 민주당 중앙위원회 공동 의장같은 요직을 거쳤다.1976년 데일리 시장이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 헌장의 조항대로면 시카고 시의회 임시 의장인 윌슨 리 프로스트(Wilson Lee Frost)가 시장 대행을 보궐선거 이전까지 수행해야 했다. 하지만 시카고 시민들과 시의회 의원들의 흑인 시장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시카고 시의회는 시장 대행직 양보를 대가로 프로스트를 시의회 재정위원장에 추대하는 뒷거래를 통해 마이클 A. 빌랜딕 시의원을 1977년 보궐선거 불출마를 조건으로 시장 대행으로 지명했다. 빌랜딕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1977년 보궐선거에 출마하지만 데일리가 만든 무적의 정치 머신의 지원으로 경선과 본선에서[4] 무난하게 승리했다. 시장이 택시 요금을 12% 인상하려 한 것을 번이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빌랜딕 시장은 그를 모든 시 내 공직에서 해임했다. 빌랜딕 시장은 임기 중 정육점 노조 파업과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폭동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지지를 잃었다.
시카고 시정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시점에 번은 시장 보궐선거 직후 차기 시장 예비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시장만이 아닌 시의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에드 브르돌랴크(Ed Vrdolyak)[5]과 에드 버크(Ed Burke)[6] 시의원을 "악한 음모자"로 비난하며 자신을 개혁가 후보로 이미지 메이킹했다. 두 번째 남편의 지인이었던 유명한 선거 전략가 돈 로즈(Don Rose)의 조언을 받아 풀뿌리 선거운동으로 자금 격차를 메우려 했다. 그는 "One Chicago"라는 슬로건으로 데일리 시정에서 소외된 흑인, 히스패닉 표심을 잡으려 했고 너무 진보적인 페미니스트 후보로 보이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얼굴을 꾸미는 걸 피하는 치밀한 선거 전략을 세웠다. 소수인종에게 다가가는 행보로저명한 민권운동가 제시 잭슨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여전히 데일리 조직의 후원을 받던 블랜딕 후보는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번이 격차를 좁히기에는 요원해 보였다.
1979년 시카고 시장 민주당 예비선거 결과 | ||
후보 | 득표수 | 득표율 |
제인 번 | 412,909 | 51.0% |
마이클 A. 빌랜딕[현직] | 396,194 | 49.0% |
2.2. 시카고 시정
[[테드 케네디|{{{#ffffff 테드 케네디}}}]]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한 제인 번 시장 |
시장 선거운동 중 구축한 소수인종들과의 관계도 빠르게 악화됐다. 루스 러브(Ruth Love)를 시 최초의 흑인 및 여성 학교 교육감으로 임명하는 것 같이 임기 초반에는 흑인 커뮤니티로부터 호평을 얻었지만 시카고 주택청과 교육위원회의 이사를 백인으로 갈아치워버려 지지자들을 배신했다고 여겨졌다. 그의 임기 중 흑인 다수 선거구가 줄어드는 게리멘더링이 시카고 시의회 내 번의 동맹자들에 의해 자행되자 흑인 커뮤니티는 그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렇다고 시내 백인 기득권 보수파가 그를 좋아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번에게 실망한 시민들과 옛 데일리 정치 머신 조직 일부는 리처드 J. 데일리의 장남인 리처드 M. 데일리 뒤에 집결하여 데일리 시대에 대한 향수로 세력을 모았다 .
1983년 시카고 시장 민주당 예비선거 제인 번 광고 |
1983년 시카고 시장 민주당 예비선거 결과 | ||
후보 | 득표수 | 득표율 |
해럴드 워싱턴 | 424,324 | 36.3% |
제인 번[현직] | 393,500 | 33.6% |
리처드 M. 데일리 | 346,835 | 29.7% |
기타 | 5,064 | 0.4% |
2.3. 재선 실패 후
1987년 시카고 시장 민주당 예비선거 결과 | ||
후보 | 득표수 | 득표율 |
해럴드 워싱턴[현직] | 586,841 | 53.5% |
제인 번 | 507,603 | 46.3% |
쉴라 존스 | 2,549 | 0.2% |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 - 2014 | 정계 입문 정계 은퇴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9 | 미국 시카고 시장 선거 | 시카고 | | 700,874 (82.05%) | 당선 (1위) | 초선[12] |
5. 여담
- 시카고 시내 신규 권총 등록 규제 조례가 그의 임기 중 통과되었다. 그러나 2010년 맥도널드 대 시카고 시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로 조례 효력이 상실되었다.
- 로리 라이트풋과 유이(唯二)한 여성 시카고 시장이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임기 중 실정으로 재선에 실패했다.
[1] 현재 드폴 대학교에 인수[2] Cook County, 시카고가 위치한 카운티[3] 린든 B. 존슨의 저소득층 교육 지원정책[4] 어차피 시카고 자체가 민주당의 텃밭 중 텃밭이라 민주당 경선이 본선 취급이었다.[5] 시카고 시의원(1971-1987), 쿡 카운티 민주당 의장을 역임했다. 해럴드 워싱턴 시장 1기 임기 중 시의회 과반이 넘는 "Vrdolyak 29"라고 불리는 29명의 자기 파벌 시의원들로 해럴드 워싱턴 시정을 견제했다. 1987년에는 지역 정당인 일리노이 단결당(Illinois Solidarity Party) 후보로 시카고 시장 선거에 출마하지만 워싱턴에게 밀려 낙선하고 이후 공화당에 입당한다.[6] 1969년부터 2023년까지 무려 54년이나 시카고 시의원을 지냈다.[현직] [8] 경선 패배에 충격받은 빌랜딕 시장은 번을 시장 선거에서 거의 돕지 않았다.[현직] [현직] [11] 현직 해럴드 워싱턴 시장이 심장마비로 급사해 실시[12] 역대 시카고 시장 선거 최고 득표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