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관련 문서: 삼법인제법무아(諸法無我). 줄여서 무아라고 한다.
불교나 도교 등에서 주장하는 개념으로, 모든 존재에는 고정 불변의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는 것이다. 번역되기 전 팔리어로는 anatta, 산스크리트어로는 anatman인데, 이는 즉 힌두교에서 말하는 불변/영원한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1] 아트만은 브라만교의 영혼과 동일시되므로 이는 곧 브라만교식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카스트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무아론은 불교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 이론이다.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영원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무상설과 함께 무아설은 불교 이전 인도의 전통 사상에서 절대적 자아로 간주되었던 '아트만' 개념에 반대해서 생겼다. 석가모니는 절대적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함으로써 이기심이 생기고 이 이기심은 서로의 평화로운 삶을 해치는 근본적인 장애물이 된다고 보았다. 즉 보통 사람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과 자신이 가진 것이 영원할 줄 알고 거기에 집착하며 이 집착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는 없으며 이 존재에 대한 참모습을 바로 알게 되면 집착하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만, 고정된 정신('나'라는 개념: 아트만)이 없다는 것이지, '내 몸' 자체가 없다는 뜻은 아님에 주의. 이를 잘못 받아들이면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으며 실제로도 이런 상황에 빠지는 불자들도 많은 편이다. 한자/중국어로의 번역 때문에 자칫 '나'라는 것이 아예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쉬운데, 이는 석가모니가 삿된 견해라고 비판한 '단견'이다.[2]
이 용어는 자아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 마음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는 글의 화자가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려 하는 자세를 무아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물아일체, 물심일여, 혼연일체 등의 용어와 연결돼 쓰이기도 한다.
무아를 깨달은 자아를 가르키는 진아(참 나)라는 용어도 오해를 많이 한다. 이 진아라는 개념은 유식설에만 해당된다. 유식설에서 말하는 '진아'도 무아의 깨달음을 얻어 '고정된 자아'가 없는 '자신'을 의미하는 말이지, '무아'의 개념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과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사과 0개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없음으로써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아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일뿐, 진짜로 '고정불변의 나'의 개념(아트만)을 긍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아(無我)적 속성을 지닌 신은 전통적인 신의 개념과 다르게 고정된 자아를 지니지 않고 변동성과 상호 연결성을 중시하는 존재로[3] 고정된 본질을 지니지 않은 채 끊임없이 변화했고[4] 주변 환경이나 다른 존재들과 상호작용 하면서 자신의 특성과 역할을 변화시키며[5] 모든 존재와 상호 의존적이라서 단일한 자아가 아닌 모든 것과 연결되었고 서로의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 존재했다.[6] 개별적 자아가 아닌 전체적 존재로서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통합된 원리로 이해될 수 있어서 자신과 다른 존재를 분리된 개체로 보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존재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원리 및 힘에 해당되는 개인적 성격, 감정,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고 자아의 개념 자체가 부재한 것으로 볼 수 있었고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원리 및 법칙으로서 우주와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역할을 맡았다.[7]
다양한 존재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특정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는 상호작용의 매개체로서 역할을 수행했고 한정된 자아를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녀 특정한 형태와 경계를 가지지 않는 무한히 확장된 존재로 해석할 수 있었고[8] 단순히 자아의 부재를 넘어서 존재와 상호작용의 근본 원리로서 신의 본질을 정의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모든 존재와 상호작용하면서 우주적 통찰을 지니고 있었고 개별적 자아와 욕구 없이 전체적 원리와 법칙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을 지녔고 모든 존재와의 상호작용을 하면서 얻게 된 지혜를 토대로 전체적인 조화와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통찰력을 지녔고 자아와 감정, 의도 없이 자연의 힘과 법칙을 이해 및 조정하고 우주적 원리와 법칙을 실현했고 존재들 간의 통합된 힘을 발휘해 개별적 자아 없이 전체적인 흐름과 질서를 통합적으로 관리 및 조절하고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며 조화롭게 기능하도록 촉진했고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는 것으로 다양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적절한 대응과 변화가 가능했고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조정이 가능했다.
우주와 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고 고정된 본질 없이 변화의 흐름을 매개해 새로운 질서와 형태를 창조할 수 있었다.
2. 과학적 접근
명상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 중 하나가 DMN의 활성도인데, 대개 수행 과정이나 환경에 크게 압도되는 상황에서 비활성화된다. 이때 위치정보 및 자기 인식에 대한 경계가 옅어지는데, 이때 자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무아라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 과정이 '명상을 통한 무아'를 신경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로, 이러한 관계가 밝혀지면서 명상을 계량해 심리치료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우울 치료제 중 하나인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elective serotonine reuptake inhibitor) 투여를 통한 우울증의 완화 및 DMN의 기능 정상화와 맞물려 입증된 바 있으며,[9] 마음챙김 요법은 유럽에서 의료보험지원을 받고 있다.3. 여담
- 화엄경에는 무아라는 수가 등장하는데, 지수로 표현하면 10554597137599850363154807652352다.
[1] an이 영어의 un과 같다.[2] 앞서 말했듯이 한역이 완료된 경전에서는 무아의 맥락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3] 여러 종교 및 신화에서 이에 해당되는 존재로는 인도 신화(=힌두교)의 브라흐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인간과 신의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인간의 감정과 욕망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고정된 자아를 지녔다기 보다는 다양한 상황과 역할에 따라 변화하는 존재로 해석할 수 있었다.), 북유럽 신화의 오딘(끊임없이 지혜를 추구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지식을 얻는다는 점에서 특정한 자아에 집착하기 보다는 지식과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변모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무아적 개념과 연결된다 볼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용이 있었다.[4] 고정된 자아를 가지기 보다는 상황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존재로 묘사된다.상황, 시간, 환경에 따라 지닌 바 역할과 측면이 달라질 수 있었다.[5] 신의 성격이나 역할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볼 수 있었다.[6] 모든 존재와 상호 연결되어 있기에 독립적인 자아가 없는 모든 것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의 존재를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 정의하고 존재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현되고 나타나는 원리와 힘으로 볼 여지가 있었다.[7] 이러한 점으로 특정한 자아가 아닌 전체적 원리로서 기능했고 모든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통합적 힘이나 원리로 여겨질 수 있었다.[8]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는 시점에서 특정한 형태와 개념으로 제한되지 않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녔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시점에서 제한이 없는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성을 지닌 특정한 형태와 방식에 구속되지 않는 모든 가능성을 포괄했고 기존의 질서와 형태에 제약받지 않는 채 새로운 형태와 질서를 창조할 수 있었고 무한한 잠재력을 토대로 새로운 방식으로 우주의 구성 및 창조가 가능했고 다양한 혹은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을 수용하는 것으로 우주와 존재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 및 실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에 있는 것들의 변형이 가능했다.[9] ISSN 2635-88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