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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3 10:16:59

정전제

정전론에서 넘어옴
드라마 정도전에서 묘사한 정전제
1. 개요2. 설명3. 실존했는가?4. 후대의 논의5. 창작물에서의 정전제

1. 개요

井田制[1]

기록상 등장하는 중국 최초의 토지제도. 실존여부에 의문이 있으나 수천년 간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주목받았다.

2. 설명

맹자(孟子)》, 《주례(周禮)》, 《춘추(春秋)》 등에서 언급된다. 하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주공(周公) 단이 창안했다는 설이 있으나 《맹자》에서는 100무(畝)를 1전(田)으로 했다는 대(周代)의 정전법을 기준으로 하여 설명할 뿐, 창안자는 거론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주(周)나라 이전부터 미진하게나마 시행했다는 암시를 하는 듯한 구절이 있다.[2]

정전제는 땅을 우물 정(井)자로 총 9등분하여 외곽의 땅 여덟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잇도록 하고, 가운데의 땅은 공전(公田)이라 하여 공동으로 경작하는 제도이다. 사전에는 세금을 거두지 않으며, 오로지 공전에만 세금을 거둔다. 《맹자》는 하나라는 50무의 공법(貢法)을, 은나라는 70무의 조법(助法)을, 주나라는 100무의 철법(徹法)을 썼다라고 설명했다. 하나라는 1명이 밭 50무를 받고 5무의 소출을 세금으로 거두었으며, 은나라는 630무의 땅을 9등분하여 가운데 땅은 공전을, 나머지 560무를 8명에게 각각 70무씩 나누어 주었으며, 사전(私田)에서는 세금을 거두지 않고 공동경작하는 공전에만 세금을 거두었으니 세율은 1/9이었다.

주나라는 900무의 땅을 100무씩 나누고 8명에게 100무씩 나누어주며 공전 중 20무를 떼서 여막(廬幕)을 만드니, 한 명이 공전 10무씩을 경작하게 된다. 따라서 한 명이 사전 100무와 공전 10무를 경작하고 그 중 10무의 소출을 세금으로 납부하니 세율은 1/11이 된다. 《맹자》는 상고할 수는 없으나 은나라의 조법도 이렇게 운영되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정전제의 한 구획은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한 변의 길이 135m짜리 정사각형으로, 면적은 약 1.82헥타르이다.

정전제의 의미는 세금 공출의 목적도 있었지만 마을 공동체의 유지·관리의 측면이 있다. 마을의 홀로된 과부나 노약자, 노동 수단을 상실한 집안에 공동의 경작지를 경작하게 하고 이에 일정 부분을 지급함으로 마을 공동체가 책임져야만 하는 사회적 비용을 최대한 낮추면서 공동체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러 가구를 어느정도 한 공동체로 묶는다는 점에서는 오가작통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3. 실존했는가?

정전제를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일단 농지가 현대의 경지정리된 밭처럼 반듯한 네모로 나올 리가 없다. 모양이 당연히 다를테니 소출이 다를건데 누구나 좋은 땅을 가지고 싶을 것이다. 일단 분배받은 후도 문제인데 가정마다 노동력의 차이도 존재하는데 밭 크기가 똑같으면 아들을 많이 낳아서 10대 초반의 아들들처럼 가용 노동력이 많은데 먹일 입이 많은 가정은 어쩌란건지, 아들을 못낳았는데 가장이 힘이 약하거나 병에걸려 누워있거나 심지어 죽었다면 어쩌란건지, 아무런 대책이 없다. 상식적으로 엄청난 변수가 발생할텐데 고작 1/11의 세율로 이 행정력은 어떻게 확보할 것이며 이걸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도 대책이 없다. [3] 이런 문제 때문에 왕망이 정전제를 강행했을때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고 무엇보다 조세가 안걷혀 신나라는 바로 망하고 후한이 들어선다.

상나라 춘추전국시대가 철기로 넘어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여기서 착안해 정전제를 당시 아직 철제 농기구와 우경이 등장하기 이전이라 조잡한 농기구만으로 농사를 짓기에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만 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농업 방식이라는 설명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일단 그 제도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판국에 거기에 또다른 가설을 얹은 것이 증거가 있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공동 경작을 할거면 그냥 여전제처럼 공동농장을 해서 공동경작 공동분배를 하지 굳이 우물 정자로 집집마다 땅을 나눠줄 필요가 없다.

4. 후대의 논의

현실성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토지의 균등 분배와 1/10의 이상적인 세율로 주목을 받았으며, 권력자들에 의한 토지겸병이 극심해질 때마다 대안으로 자주 제시되었다.

신나라의 왕망이 실시한 왕전제, 그리고 북위에서 시행한 균전제는 정전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된다.

명말청초의 양명학황종희는 당대에 시행되던 공법의 폐단을 비판하고 둔전제를 보며 정전제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유학자인 오규 소라이는 정전제를 "영원히 변치 않는 훌륭한 법"이라고 추앙하며, 경전에 얽매인 선비들과 썩어빠진 유학자, 옛것을 답습하는 자들이 정전제의 시행을 반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토지가 일부 계층에게 집중되고,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빈농이 늘어나는 16세기 이후 조선에서도 정전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류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등 중농학파 실학자들의 토지개혁론은 정전제의 영향을 받았고, 정약용은 기존에 내세웠던 여전론이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자 정전제를 현실에 맞춰서 도입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항로는 지주들의 토지겸병 문제를 해결하고 병농일치가 이루어지는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전제를 시행하여 부를 균등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창작물에서의 정전제

정도전육룡이 나르샤에서 '계민수전(計民授田)'이라는 이름으로 정전제가 등장한다. 두 드라마 다 정도전과 조준 등이 주축이 되어 추진한 정책이다. 하지만 반발 끝에 타협적인 정책인 과전제로 마무리되고 만다. <정도전>에서는 계민수전을 단순한 이상이 아닌 이성계에게 민심을 끌어 모아 결과적으로 왕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정치적 도구로 썼으며, 이를 눈치챈 정몽주정도전이 명에 간 사이에 이성계와 조준을 설득하여 좀 더 온건적인 과전법을 채택하도록 유도하여 정도전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다만 그 당시 토지가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생계 수단 중 하나였음은 염두에 둬야 한다.

<육룡이 나르샤>의 경우 정도전의 사상과 대비되는 무명이란 비밀단체를 등장시키는데, 극중 후반부 무명의 지도자와 정도전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무명 조직의 지도자는 "왕이 모든 땅을 차지하던 세상에서 개인의 권리를 조금이나마 더 낫게 만들어 온 것은, 왕권이 미치지 않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 땅을 일궈 이득을 보려한 개인의 이기심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도전은 "그 결과 권문세족이 평민들의 땅까지 뺏어먹는 세상이 되지 않았는가? 정전제를 통해 땅을 더 얻을 수도 없지만 빼앗길 수도 없는 세상을 만들어, 평등의 기반 위에 성리학적 이상이 구현된 세상을 만들겠다."고 답변한다. 물론 저 둘이 대화를 나눈 시점이 조선이 건국되고 얼마 되지 않았단 점,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패악이 실제 심각했던 점을 고려하자면 둘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무명은 자본주의, 정도전은 사회주의적 입장을 각각 대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애초에 무명이란 단체 자체가 역사에 실존하지 않는 단체인만큼, 작가가 선악구도가 분명히 초반부와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일부러 이런 선악이 모호한 철학적 대립구도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4]

참고로 두 창작물 다 고증은 사실과 좀 다른 부분이 있다. 이는 조준을 정도전 당여 수준으로 묘사하면서[5] 생긴 문제이기도 한데, 학계에서는 경제육전에 밀린 사찬에 불과했던 조선경국전처럼 계구수전 또한 말만 그럴싸 했을뿐 토지개혁 논의에 정도전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바는 없다고 본다. 당시 토지개혁은 조준의 주도로 시행되었으며, 계구수전은 개혁파들 사이에서도 큰 이슈가 되지 못해 정도전은 사상과 별개로 주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진 못했다.
[1] 정전법(井田法)이라고도 한다.[2] 《맹자》, 〈등문공 상〉, 3장을 참고하라.[3] 예를 들어 가장이 죽었고 자식들이 노동력이 안되면 땅을 도로 회수한다는 원칙이 있다 가정하자. 그러면 과부와 자식들은 굶어죽으란 이야기가 된다. 아들이 많고 노동력도 많은데 아직 성인이 안되어 결혼을 못시켜서 조혼을 시켰다고 치자. 그러면 이 10대 초반 아동 부부와 20대 건장한 부부가 똑같은 땅을 분배받으면 노동력 투입의 극심한 비효율과 논쟁이 발생한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없고 쓸데없이 복잡한 법칙만 무한히 늘어나는데 이걸 정리해줄 군사력 행정력을 꼴랑 9/1세로 확보할 방법이 없다.[4] 사족으로 여기서 더 나아가자면, 사실 현대에서도 볼 수 있듯 타협의 여지가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5] 단, <정도전>에서 조준은 문하좌시중으로 부임한 이후로 정도전의 당여가 아닌 모습을 확실하게 보였다. <육룡이 나르샤>도 비슷한 흐름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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