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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대한민국 사적 제301호 | |
<colbgcolor=#315288> 부여 정림사지 扶餘 定林寺址 Jeongnimsa Temple Site\, Buyeo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번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 |
수량/면적 | 61,449㎡ | |
지정일 | 1983년 3월 26일 | |
시대 | 백제시대 | |
소유단체 | 문화재청 등 | |
관리단체 | 부여군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백제역사유적지구 Baekje Historic Areas Aires historiques de Baekje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충청남도 부여군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1477 | |
등재연도 | 2015년 | |
등재기준 | (ⅱ)[1], (ⅲ)[2] | }}} |
<colbgcolor=#008080> 정림사지 전경 |
정림사 추정 복원도 |
[clearfix]
1. 개요
충청남도 부여군에 위치한, 지금은 터와 석탑 그리고 석불좌상만 남아있는 백제 시대의 호국사찰이며, 미륵사와 함께 백제를 대표하는 절이자, 사비백제 시대의 대표적인 불교유적이다. 현재 사적 제301호로 지정되어 있다.2. 역사
이 절이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고 한다. 다시말해 정림사는 사비백제 시대에 백제의 수도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설물로서 여겨졌다는 이야기다. 폐사지가 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고려시대 불상의 존재나 아래 설명할 고려시대 기와조각의 존재를 볼 때 적어도 신라시기를 지나 고려 초기까지는 사찰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훗날 절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그 이름도 잊혀졌지만,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3] 라는 명문이 적혀 있어, 정림사라는 이름이 밝혀졌다. 이 명문이 아니었다면 청암리 사지나 경주 장항리 사지마냥 현재 주소를 따 동남리 사지라고 불렸을지도 몰랐을테니 천운인 것이다.[4] 이후 2008년 발굴조사를 한번 더 하게 되고, 이와 동시에 정림사의 유물을 보관하고 전시한 정림사지 박물관이 개장하였다.
3. 절의 구조
1942년 후지사와 카즈오(藤沢一夫)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정림사의 가람배치는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있으며, 강당 건물과 중문이 회랑으로 이어져있는 북위의 양식인 일탑식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백제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아서 세워졌다고 알려진 일본의 시텐노지에서도 볼 수 있는 가람배치 형식으로, 이후의 연구에서도 사비백제시대의 절은 모두 이런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의견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2008년 정림사지를 재발굴 해본결과, 강당 좌우에 2구의 부속건물지와 강당 뒤의 승방지가 발견되었다. 다시 말해, 정림사의 가람배치 형식은 이전에 정설로 통하던 중문과 금당이 회랑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가 아닌 회랑이 각각 동회랑, 서회랑, 중문과 이어진 남회랑으로 분리되어있고, 동, 서회랑이 각각 금당 동, 서쪽에 위치한 부속건물에 이어져있는 형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발굴된 능산리 사지와 왕흥사지의 가람배치도 이런 형식의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정림사는 이후 사비기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 양식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기단은 기와를 쌓아만든 와적기단임이 밝혀졌으며, 현재는 불상의 보호각으로 세운 건물을 제외하고는[5] 이 와적기단 유구만 복원했다.[6]
3.1. 정림사지 오층석탑
자세한 내용은 정림사지 오층석탑 문서 참고하십시오.4. 사적 제301호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5. 여담
- 전직 국무총리 김종필이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가장 아쉬운 미완사업으로 꼽았던 것이 바로 이 정림사지 복원사업이다. 그는 고향의 백제문화를 몹시도 부흥시키고 싶어했던 사람이었는데 1991년 민주자유당 대표위원으로 있을때 고향 부여의 정림사를 꼭 재건하고 싶어서 일본 측의 도움을 요청했다가 한일관계 문제 때문에 좌절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요청했던 비용이 262억엔(한화로 약 2633억원)이었고 일본 측에서도 꽤 긍정적으로 반응했으나 한국의 문화재 위원들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정림사지를 재건할 수는 없다는 이유를 대어 좌초되었다고 한다. 20여년 후인 2011년 인터뷰에서 (나중에라도) 꼭 이루었으면 하는 미완의 숙원사업이 뭐였는가 하는 질문에 김종필이 제일 먼저 꼽은게 정림사지 복원사업이었던 걸 보면 정말 어지간히도 한이 되었던 모양이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태평 8년, 즉 1028년에 정림사를 재건한다는 기록이었다.[4] 다만 이는 고려시대의 기록이라 창건 당시 백제 때에도 정림사라는 이름의 절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수백년의 시차가 있는데 도중에 절 이름이 바뀌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5] 과거 문서에 이 건물이 강당의 복원이라고 서술되어 있으나, 해당 석불좌상이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을 감안하면 복원이라고 보기는 애매한 점이 있다.[6] 다만 복원조감도와 복원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아다녀서 조만간 완전복원을 할 의향도 있는 듯하다. 이미 백제문화단지라는 선례도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성도 어느 정도 존재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