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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00:27:34

정동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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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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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등처행중서성 征東等處行中書省

1. 개요2. 상세3. 기타4. 같이보기

1. 개요

정동등처행중서성(征東等處行中書省), 줄여서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정동행성(征東行省), 약칭 정동성(征東省)은 원 간섭기원나라의 일본원정을 목적으로 고려에 설치된 광역 행정구역으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연락 기구이자 내정간섭 기구였다.

몽골 제국의 2차 일본 정벌 직전 군사령부로써 요양행성요양에 설치되었다가, 충렬왕이 정동행성 승상에 임명된 이후인 1281년(충렬왕 7) 3월 힌두[忻都]와 홍다구몽골군이 고려로 들어오면서 같이 들어왔다. 일본 원정이 실패한 뒤 폐지되었고 1283년(충렬왕 9) 다시 설치되었다가 쿠빌라이 칸이 일본 원정을 포기하면서 다시 폐지되었다.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면서 일본 원정에 대한 군사적 책무는 면제되어 연락 기구로 존재하였으며, 이후 내정 간섭의 매개로 작용하거나, 반 국왕 세력의 거점이 되거나, 반대로 고려의 권익 보호와 향상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

정동(征東)은 '동쪽을 친다'는 의미로 블라디보스토크 지리적으로 동쪽에 있는 일본까지 복속하여 동아시아 지역을 모두 정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행중서성(行中書省)은 원나라의 중앙 행정기관중서성(中書省)[1]의 권한을 대행하여 지방을 통치하는 광역 행정구역 및 그 파출 기구를 의미하며 보통 행성(行省)이라 줄여 불렀다.[2] 이 때문에 줄임말이 '정동행성'이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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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은 약 30여 년에 걸친 여몽전쟁 끝에 고려원나라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남송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정복 전쟁을 준비하는 한편, 당시 일본의 정권을 장악한 가마쿠라 막부에게도 자신들에게 복속할 것을 종용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순순히 응하지 않자 결국 쿠빌라이 칸은 일본도 정복하겠다고 결정하고 1274년(원종 15) 1차 일본 원정을 진행하였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근성의 쿠빌라이 칸은 포기하지 않고 7년 뒤 1281년에 2차 원정을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정동행성이라는 조직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2차 원정은 역시 처참하게 끝났고, 결국 1282년(충렬왕 8) 정동행성은 다시 폐지되었다. 원은 이듬해 베트남 원정까지 취소시키고 다시 3차 일본 원정을 계획했고, 정동행성 역시 이 과정에서 1285년(충렬왕 11)에 다시 설립되었다. 하지만 3차 원정은 계획으로만 끝났다. '일본 원정'이라는 본래의 목표가 사라져버린 이후, 정동행성은 군정기관의 목적을 상실하고 연락기구의 성격으로 변모했다. 그렇다고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차지했던 것은 아니고, 기껏해야 하정사(賀正使)[3]를 파견하는 것과 같은 부수적인 일을 담당하는 게 전부였던 정도. 차라리 원나라에 를 바치는 응방(鷹坊)의 영향력이 더 컸을 정도. 1285년쯤에 잠시 원 본국의 중서성이 상서성으로 개칭된 예를 쫓아 행상서성(行尙書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도로 복원된 적이 있었다.

충렬왕의 복위 직후 원성종이 국사를 함께 의논하기 위해 파견된 좌승(左丞) 카산[哈散]이 5개월 뒤 귀국하면서 한희유(韓希愈) 사건에 대해 충렬왕이 자신의 무리를 복속시키지 못하니 원 조정에서 관리를 파견해 함께 통치할 것을 요청하면서 1299년(충렬왕 복위 1) 고르기스를 정동행성 평장정사로, 야율희일(耶律希逸)을 좌승으로 부임하게 하여 정동행성관을 파견했다. 행성관의 파견은 행성 승상을 겸하고 있는 고려 국왕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몽골 관원에게 실제 관할권을 부여한 조치였다. 고르기스는 고려의 나라 풍속을 바꾸고자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노비 제도를 몽골의 제도에 맞춰 개편함으로써 양인을 증가시킨 뒤 행성 내에서만은 세금 수입의 증대를 노렸다 (고려 자체는 원나라에 정기적 납세할 의무는 없었다). 위협을 느낀 충렬왕은 1300년(충렬왕 복위 2) 6월 직접 성종을 알현하고 '세조구제'를 내세워 행성관을 철수시켰다.

충숙왕 대 이래 계승 분쟁과 충혜왕의 실정, 충목왕충정왕이라는 어린 국왕이 즉위하여 고려 국왕권이 약화되면서 여러차례 고려원나라의 정식 인 정동행성으로 개편하여 원의 완전한 영토로 병합시키려는 입성책동을 일으킴에 따라 덕녕공주 섭정 기간에 이르면 국왕의 보거(保擧)권을 명목상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했으며, 기황후와 연결된 기철이 섭행정동성사(攝行征東省事)가 되어 정동행성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자 고려 국왕의 보거권은 사실상 빼앗기고 말았다. 고려 국왕권을 이루고 있던 정동행성 승상의 위상이 원나라의 지방 장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반 국왕 세력 내지는 독자적인 세력의 거점이 되어간 것이다.

공민왕은 반원 개혁을 통해 반 국왕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동행성 이문소(理問所)[4]를 폐지, 관제를 복구하여 원 조정이 직접 고려를 통제하는 것을 방지하고, 승상의 보거권을 침해하는 정동행성관의 폐단을 막음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몽골과의 관계 단절이 아니라 개편을 시도했던 공민왕은 갑작스러운 단교를 원하지는 않았기에 정동행성의 좌, 우사만은 남겨두어 정동행성의 연락 기구 성격은 남겨 두었다. 그 당시 원나라의 행성에서 좌, 우사는 행성의 행정을 맡지만, 국체가 보전된 고려에서는 이미 도첨의사사가 독자적으로 이를 맡아 대몽 연락기구로 작용할 뿐이었다.

그러나, 1388년(우왕 14) 4월 명나라 군이 원을 북방 지역으로 쫓아내어 부이르 호(Буйр нуур)에서 북원 정권을 붕괴시키고, 6월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친명을 표방하는 신진 사대부가 집권하게 되면서, 사실상 정동행성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개성의 정동행성 관청 건물은 조선 건국 후 한성 천도 당시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시설인 태평관(太平館)[5] 건물의 모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태평관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사라졌지만, 지금의 숭례문 로터리에서 세종로 사거리(광화문광장사거리)에 이르는 태평로는 태평관의 이름에서 따왔다.

3. 기타

4. 같이보기



[1] 당나라3성 6부제에서 유래하여 이후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정치 제도의 모델이 되었다.[2] 왕궁의 지방 궁궐행궁(行宮)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3] 신년과 같은 기념일을 맞이해서 조공과 함께 파견하는 사신을 지칭한다.[4] 전근대 중국에서 광역 행정구역마다 두었던 일종의 지방법원.[5] 태평관은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등장하는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사용하던 그 시설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