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8:16:37

섬서행성

원나라의 행정구역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중앙
중서성
행중서성
영북등처행중서성 요양등처행중서성 섬서등처행중서성 사천등처행중서성
감숙등처행중서성 운남제로행중서성 강절등처행중서성 강서등처행중서성
하남강북등처행중서성 호광등처행중서성
특수 행성
정동등처행중서성 교지행성 형호점성행중서성 면중행성
}}}}}}}}} ||

섬서등처행중서성 陝西等處行中書省

1. 개요2. 역사3. 행정구역
3.1. 봉원로(奉元路)3.2. 정안로(延安路)3.3. 흥원로(興元路)3.4. 봉상부(鳳翔府)3.5. 분주(邠州)
3.5.1. 경주(涇州)
3.6. 개성주(開成州)3.7. 장랑주(莊浪州)3.8. 공창등처총수부(鞏昌等處總帥府)3.9. 토번등처선위사 도원수부(土蕃等處宣慰司都元帥府)
3.9.1. 조문어통여아장하서녕등처선무사(碉門魚通黎雅長河西寧等處宣撫司)3.9.2. 예점문주몽고한아군민원수부(禮店文州蒙古漢兒軍民元帥府)

1. 개요

섬서등처행중서성, 줄여서 섬서행성 또는 섬서성은 원나라의 행정구역이다. 영역이 변한 채 현존하는 행정구역 가운데 하나다.

2. 역사

중통 원년(1260) 처음 설치됐는데, '진촉오로사천행성사(秦蜀五路四川行省事)'라는 이름으로 섬서 이남의 사천과 단일 행정구역으로 묶여있었다. 중통 3년(1262) '섬서사천행중서성(陝西四川行中書省)'으로 명칭을 고쳐 세웠다. 승상의 치소는 섬서의 경조(京兆)에 있다가 지원 3년(1266) 이주(利州)로 바뀌었고, 14년 뒤인 지원 17년(1280) 다시 경조로 돌아갔다. 지원 18년(1281)에서 21년(1284) 사이 잠시 분리됐던 사천성은 지원 23년(1286) 사천행성으로 완전히 분리됐다.

3. 행정구역

섬서행성의 하위 행정구역으로는 4로(路), 5부(府), 27주(州)와 그 아래 12속주, 88속현이 있었다.

3.1. 봉원로(奉元路)

옹주(雍州). 당나라에서 관내도, 경조부, 중경, 상도 등으로 불렸다. 송나라는 섬서 등 6로를 분리했고, 금나라가 다시 섬서를 병합했다. 몽골 제국에 들어 섬서사천행성의 치소로 삼았다. 지원 연간 초, 쿠빌라이 칸 때 운양현(雲陽縣), 낙양현, 종남현(終南縣)을 병합해 각각 이름을 경양현(涇陽縣), 임동현(臨潼縣), 주질현(盩厔縣)으로 했다. 지원 16년(1279) 경조현을 안서로총관부(安西路總管府)로 바꿨다. 대덕 원년(1297) 운남행대(雲南行臺)가 이곳으로 옮겨와 섬서행대가 됐다. 황경 원년 안서로총관부에서 봉원로총관부로 개칭됐다. 하위에 1사, 11현, 5주가 있었으며 5주 아래에 또 15영현이 있었다.

3.2. 정안로(延安路)

3.3. 흥원로(興元路)

당나라에서 양주(梁州), 한중군(漢中郡), 흥원부로 불렸다. 원나라 초 흥원로총관부를 세웠고 봉주, 금주, 양주를 예속시켰다.

3.4. 봉상부(鳳翔府)

당나라에서 부평군, 봉상부, 서경 등으로 불렀다. 원나라에서는 평량부를 분할해 진·농 등 여러 주를 공창로에 예속시켰고, 환주(恒州)는 폐지하고 주질현은 위의 안서로로 옮겼으며, 나머지 현을 바탕으로 봉상로총관부를 세웠다. 지원 9년(1272) 산부(散府)로 고쳤다.

3.5. 분주(邠州)

원래 이름은 빈주(豳州)였는데 빈(豳)이라는 글자가 당나라에서 피휘해야 하는 유(幽)자와 비슷해 이 이름으로 고쳤다.

3.5.1. 경주(涇州)

당나라 때는 정안군(安定郡)이라고도 불렸다. 원 초 도원수부에 예속됐는데 분주에서 분할됐다. 이후 공창등처총수부 혹은 평량부에 예속됐다.

3.6. 개성주(開成州)

쿠빌라이 칸의 3남 망갈라가 안서왕에 봉해진 뒤 진, 촉 일대를 다스리게 되면서 개성부를 세웠다. 쿠빌라이가 즉위한 상도(上都)를 상로(上路)라고 바꿔 불렀다. 지치 3년(1323) 부에서 주로 강등됐다. 아래에 1현 1주를 뒀다.

3.7. 장랑주(莊浪州)

장랑주 역시 원래 장랑부였으나 대덕 8년(1304) 주로 강등됐다.

3.8. 공창등처총수부(鞏昌等處總帥府)

원 초에 평창로편의도총수부가 세워져 공창, 평량, 임도, 경양, 융경(隆慶) 5부와 진, 농 등 27개 주를 거느렸다. 지원 5년(1268) 안서주(安西州가 탈사림로총관부(脫思麻路總管府)로 분리됐고, 6년(1269)에는 하주(河州)가 토번선위사도원수부로 분리, 7년(1270) 도주(洮州)가 안서주로 편입, 8년(1271) 민주(岷州)가 분할돼 탈사림로에 편입됐다.

지원 13년(1276) 공창로총관부가 세워졌다가 이듬해 다시 편의도총수부사가 됐다. 융경부와 이주, 파주, 대안주, 포주, 면주, 용주 등을 분리해 사천행성 광원로(廣元路)에 예속시켰다. 위 문단의 분주와 경주도 지원 21년(1284) 섬서한중도선위사로 떨어져나갔으니, 총수부에는 공창부를 비롯한 4개 부와 진, 롱 등 15주만 남았다.

3.9. 토번등처선위사 도원수부(土蕃等處宣慰司都元帥府)

3.9.1. 조문어통여아장하서녕등처선무사(碉門魚通黎雅長河西寧等處宣撫司)

조문(碉門)[1], 어통(魚通)[2], 여주(黎州)[3], 아주(雅州)[4], 장하(長河), 서녕(西寧) 등의 선무사. 지원 2년(1265)에 호부를 받은 아주조문안무사 고보사(高保四)가 말하기를,
조문에는 예전에 성읍이 있었는데, 중통 초에 송나라 사람이 폐한 뒤로는 백성들이 산에 의지해 목책을 세우고 조문을 반은 버렸으니, 옛 성을 다시 지키게 하고 밭을 지켜 편하게 하고자 합니다.[5]
라고 했다. 황제는 진촉행성에 칙서를 내렸고, 이듬해 사천행추밀원에서 조문에 사람을 보내 빈자를 구휼하는 등 조치를 취한 끝에 비로소 다시 성읍 근방에 집을 이루고 모여 살기 시작했다.

3.9.2. 예점문주몽고한아군민원수부(禮店文州蒙古漢兒軍民元帥府)

하주 아래의 도캄스(朵甘思), 우스장(烏思藏), 적석주(積石州) 따위. 기록물이 너무 적어 원사 지리지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원나라는 티베트 불교 샤꺄파(홍모파)의 세습직 종정 쌰꺄틴진을 통해 티베트 전역을 간접 지배했다.
[1] 쓰촨성 야안시 톈취안현.[2] 쓰촨성 간쯔 티베트족 자치주 캉딩시.[3] 쓰촨성 한위안현.[4] 쓰촨성 야안시.[5] 碉門舊有城邑, 中統初為宋人所廢, 眾依山為柵, 去碉門半舍, 欲復戍故城, 便於守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