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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10:09:48

재키 밀번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파일:external/www.thedailymash.co.uk/milb4.jp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재키 밀번
Jackie Milburn
본명 존 에드워드 톰슨 밀번
John Edward Thompson Milburn
출생 1924년 5월 11일
잉글랜드 애싱턴
사망 1988년 10월 9일 (향년 64세)
잉글랜드 애싱턴
국적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등번호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 9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43~1957)
린필드 FC (1957~1960)
이유슬리 타운 (1960~1962)
감독 린필드 FC (1957~1960)
이유슬리 타운 (1960~1962)
입스위치 타운 FC (1963~1964)
국가대표 13경기 10골 (잉글랜드 / 1948~1955)
가족 오촌조카 잭 찰튼, 바비 찰튼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은퇴 이후
3. 플레이 스타일&평가4. 사생활5. 뒷 이야기6. 수상
6.1. 클럽6.2.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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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뉴캐슬 리즈 시절의 주역
잉글랜드의 전 축구 감독. 뉴캐슬에서 전성기를 보냈던 공격수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밀번은 1924년 뉴캐슬어폰타인 북부의 탄광촌인 애싱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모두 축구를 잘했다고 알려졌는데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모두 애싱턴에서 1920년대에 축구 선수로 뛰기도 했다. 그리고 밀번 역시 8살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축구화를 받고 축구 선수의 꿈을 꾸게 되었다.

밀번은 어린 시절에 선덜랜드의 팬이었고 몇몇 지역 육상대회에 나가 우승을 해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440야드 달리기에서 우승한 밀번이 지쳐 쓰러졌음에도 그의 아버지가 밀번이 성과를 자랑한다고 오해하는 바람에 밀번은 아버지에게 후에 크게 혼났고 이 일로 그를 평생 짓누른 열등감이 그의 마음에 자리잡게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일은 제가 평생 극복하기 위해 싸워온 열등감의 토대를 마련했죠.
재키 밀번

12살 때 밀번은 학교 축구팀의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로 뛰었고 그의 아버지는 그가 득점할 때마다 1펜스씩을 주겠다고 약속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밀번은 14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식료품 저장고에서 선반 정리를 하고 식료품을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밀번은 영국 해군에 입대하려 했지만 입대 지원 당시 키가 1인치 모자라 입대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애싱턴의 탄광에서 중기계를 수리하는 설비 기술자로 일했다. 폐소공포증으로 인해 밀번은 탄광 내에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밀번은 전시에 병역을 면제받고 애싱턴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하지만 밀번의 선택은 의외로 선덜랜드의 최대 라이벌 뉴캐슬이었다. 빌린 축구화를 들고 찾아간 입단 테스트 경기에서 후반에만 6골을 때려박으며 합격했고 작가 마이크 커컵(Mike Kirkup)에 의하면 당시 뉴캐슬의 감독이었던 스탄 시모어(Stan Seymour)가 바로 밀번에게 계약을 제시했지만 밀번은 그의 가족들과 계약을 의논해보겠다고 하고 계약서를 집으로 가져갔다. 밀번의 약속이 있었지만 밀번을 다른 클럽에 빼앗길까 두려웠던 시모어는 밀번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추가적인 부대비용과 교통비등을 더 제안하며[1] 밀번을 뉴캐슬로 데려왔고 그렇게 밀번의 축구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때는 1943년, 한참 전쟁 중이던 터라 3년간 그렇게 많은 시합에는 참가하지 못했고 당시의 밀번도 축구 훈련과 탄광일을 번갈아가며 했다. 이 시기의 밀번은 주로 인사이드 포워드로 활약했고 그는 뉴캐슬에서의 첫 훈련 때 스피드로 뉴캐슬의 동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43년 8월 28일, 밀번은 브래드포드 시티를 상대로 뉴캐슬 데뷔전을 치렀고 시모어는 밀번의 가족들을 경기장에 초대했다. 밀번은 인사이드 포워드로 출전했다. 나중에 밀번은 이 순간이 그의 인생에서 FA컵 우승을 능가할 정도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뉴캐슬은 밀번의 데뷔전에서 1:2로 패배했다. 팀이 패하고 자신도 찬스를 날려 의기소침해 있던 밀번에게 시모어는 따뜻하게 위로를 건넸고 그 위로는 바로 효과를 보게 되었다. 9월 4일,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뉴캐슬은 브래드포드 시티와 재경기를 치러 3:2 승리로 일주일 전의 복수에 성공했는데 그 경기에는 밀번의 데뷔골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문에서는 그것(데뷔골)을 훌륭한 골이라고 보도했지만 그냥 선수들 사이에 공이 보였고 저는 그것을 밀어넣은 게 다예요.
재키 밀번. 데뷔골을 회상하며

이 시기의 밀번의 기량은 빠르게 성장했는데 축구 역사가 폴 조아누(Paul Joannou)는 그를 "프로 축구의 기초를 빠르게 배운 타고난 재능"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1945년, 찰리 웨이먼(Charlie Wayman)이 뉴캐슬에 입단하면서 밀번은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로 포지션을 옮겨야 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포지션을 뺏긴 밀번이 팀을 옮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밀번은 "나는 경기당 30실링을 받기 때문에 뉴캐슬은 나의 포지션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밝히면서 자신을 둘러싼 이적설을 일축했다. 그리고 새로 들어간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포지션에 밀번은 적응을 곧 끝냈고 뉴캐슬은 강력한 공격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946년, 전쟁이 끝나고 드디어 시작된 리그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화려한 현질을 바탕으로 1부 리그 승격을 위한 스쿼드를 짰고 처음에는 그들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그러나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크리스마스 박싱데이를 기점으로 3연패를 당하며 기세가 꺾였고 이 시즌에 2부 리그 5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시모어 감독은 승격 실패의 책임을 지고 뉴캐슬의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1947-48 시즌 10월 팀의 주전 센터 포워드로 뛰던 웨이먼이 사우스햄튼으로 이적하자 그 빈자리는 재키 밀번의 차지가 되었다. 원래 밀번은 자신이 공중볼 경합에 강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센터 포워드 보직 변경을 고사했지만 뉴캐슬의 새 감독 조지 마틴은 밀번이 센터 포워드에 적임자라 주장하며 그를 센터 포워드에 기용했고 그 선택은 적중했다. 밀번은 센터 포워드 데뷔 경기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했고, 그 시즌에 21골을 넣으며 뉴캐슬을 결국 1부 리그에 승격시키는데 성공했다.

밀번은 1948년 10월에 뉴캐슬에 이적 요청을 했다. 사유는 아내 로라의 건강 문제였다. 당연히 뉴캐슬 구단과 팬덤은 난리가 났지만 시모어의 설득으로 밀번의 이적 요청은 철회되었다.

밀번의 소속팀 뉴캐슬은 시즌 초에는 치고 올라가다가 시즌 중에 미끄러지며 4~5위 언저리에서 놀아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대신 밀번은 칠레 출신의 공격수 호르헤 로블레도와 호흡을 맞추며 뉴캐슬이 FA컵 타이틀을 3번 차지하는데 공헌했다. 밀번도 무릎 부상으로 인해 1952-53 시즌의 반을 날린 것을 제외하면 항상 꾸준했다.

1951년 4월 28일, 뉴캐슬은 FA컵 결승전까지 진출했고 상대는 스탠리 매튜스를 내세운 블랙풀이었다. 뉴캐슬로서도 19년 만에 찾아온 FA컵 우승 기회였지만 축구팬들은 당시 36살이던 노장 매튜스의 커리어 첫 우승이 실현될지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상황에 짜증이 난 밀번은 이 관심을 망칠 계획을 꾸몄다. 전반전에 밀번은 득점을 기록했지만 핸드볼 파울로 밀번의 득점이 취소되었다. 밀번은 주심에게 파울이 아니라고 어필했지만 소용 없었다. 전반전은 무득점으로 종료되었지만 후반전에 밀번이 나섰다. 후반 5분, 로블레도의 패스를 받은 밀번은 블랙번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고 선제골을 득점했다. 밀번의 득점포는 5분 후 재가동되었다. 어니 테일러의 백힐 패스를 받은 밀번은 강력한 슛으로 블랙번의 골문을 다시 뚫었다. 밀번이 슈팅을 워낙 강력하게 쏘다보니 밀번은 슈팅 직후 넘어지기까지했다. 뉴캐슬은 밀번의 2골로 블랙풀을 2:0으로 격파하고 19년 만의 FA컵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블랙풀의 간판 선수들이었던 스탄 모텐슨과 스탠리 매튜스는 뉴캐슬의 우승을 신사적으로 축하하는 멘트를 남겼다.[2]
이것(밀번의 2번째 골)은 제가 본 가장 훌륭한 골이에요. 그들은 컵에서 우승할 가치가 있어요.
스탄 모텐슨
확실히 밀번의 경기예요. 그의 놀라운 속도가 첫 골을, 두 번째는 바로 세상에 나온 웸블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이죠. 모든 선수가 꿈꾸는 목표가 될 거예요.
스탠리 매튜스

뉴캐슬의 1951-52 시즌의 전망은 FA컵 우승 이후에 몇몇 선수들이 팀을 떠나서 다소 어두웠다. 밀번도 다리 근육 이상으로 뉴캐슬의 프리 시즌에 치러진 친선 경기에 불참했고 합류가 늦어졌다. 시즌 첫 4경기에서 뉴캐슬은 20득점, 3실점으로 매우 좋은 모습을 보였고 이에 밀번은 스쿼드에 복귀할 수 있는 몸상태였음에도 들어가지 않고 있다가 토트넘 홋스퍼와의 FA 채리티 실드에 복귀했다.[3] 뉴캐슬은 밀번이 복귀골을 넣었지만 토트넘에 1:2로 패해 채리티 실드 우승에 실패했고 밀번은 1952년 1월까지 16골을 넣으며 뉴캐슬의 리그 레이스 순항에 공헌했다. 밀번은 이 시기에 토트넘과의 이적설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밀번 본인이 이적설을 직접 진화하기도 했다. 이 해 리그에서 뉴캐슬은 8위에 그쳤고 밀번은 리그 득점왕 로블레도[4]에 이어 25골을 넣었다. 하지만 뉴캐슬은 작년에 이어 결승에 다시 한 번 FA컵 결승에 진출했다. 만약 뉴캐슬이 우승에 성공한다면 1891년의 블랙번 이후 60년 만에 다시 나오는 FA컵 연속 우승 기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결승전의 상대는 아스날. 아스날에게는 불운하게도 전반 24분에 수비수 윌리 반스의 부상 악재가 터졌다. 그의 축구화가 잔디에 걸려 반스가 심각한 부상을 입어 더 이상 뛸 수 없었고 아스날은 우승을 위해 남은 시간을 10명이 버티고 이겨야 했다. 결국 뉴캐슬은 로블레도의 결승골에 힘입어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1955년 FA컵 결승에서 밀번은 맨체스터 시티 FC를 상대로 45초 만에 골을 넣기도 했는데, 이 기록은 1997년 소년명수에 의해 경신되었다. 밀번은 1956-57 시즌을 끝으로 뉴캐슬을 떠났고 린필드와 이유슬리 등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남은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2.2. 국가대표

밀번은 소속팀에서는 영웅이었지만 국가대표팀과는 그렇게 큰 인연을 맺지 못했다. 밀번은 1950년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그는 계속 벤치에 머물러 있었다. 스페인전에만 출전했지만 그의 활약은 미미했고,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메이저 국가대표 대회 출전이었다.

월드컵 이후 당시 감독이었던 월터 윈터보텀 경의 선택은 냇 로프트하우스였고, 밀번은 항상 2인자였다. 그러다 1955년, 코펜하겐으로의 원정경기에 4년 만에 발탁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포지션은 옛날에 뛰던 라이트 윙어였고 밀번은 이 경기에서 삽질을 거듭했다. 이러한 대표팀에서의 좌절은 밀번의 선수 생활에 대한 에너지를 빼앗아갔고 뉴캐슬에서 비교적 빨리 떠난 원인이 되었다.

2.3. 은퇴 이후

선수에서 은퇴한 후 린필드와 이유슬리 타운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나쁘지 않은 지도력을 보였다. 이후에 그는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떠난 알프 램지의 뒤를 이어 입스위치 타운에서 감독직을 맡았지만 팀의 강등을 막지는 못했다. 그로 인해 밀번은 얼마 뒤 팀에서 경질통보를 받았다. 이후에 밀번은 뉴스 오브 더 월드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했고 뉴캐슬어폰타인의 프리맨[5]에 선정되기도 했다.

밀번은 1988년에 폐암으로 인해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평가

어린 시절에 육상 선수로 활약했던 경력이 있을 정도로 꽤 스피드가 빨랐다. 또한 터닝 능력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공간을 만드는 능력이 뛰어났고 양발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수비에도 일가견이 있어 꽤 괜찮은 태클 실력을 보유했다고 전해진다.

뉴캐슬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영웅. 홈구장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서쪽 스탠드의 이름이 밀번 스탠드이다. 3개의 동상이 있고 통산 200골을 넣어 앨런 시어러의 뒤를 이어 역대 뉴캐슬 구단 통산 득점 2위에 랭크되어 있다. 그리고 2009년 골닷컴 선정 역대 잉글랜드 선수 랭킹 43위에 선정되었다.

4. 사생활

1947년 밀번은 레치워스 호텔에 투숙하다 아내가 되는 로라 블랙우드를 만났다. 로라의 말에 의하면 밀번의 방에서 아침을 서빙하는데 밀번이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다고. 3개월 후 로라가 애싱턴에 놀러갔을 때 밀번이 프로포즈했고 그들은 1948년 2월 16일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들 부부는 슬하에 세 아이를 두었다.

5. 뒷 이야기

저는 운 좋게도 휴이 갤러허(Hughie Gallacher)의 셔츠를 받았고 매주 토요일마다 항상 그가 메인 출입구 10야드 바깥쪽의 같은 위치에서 같은 시간에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했어요. 안녕 재키, 너 잘하네. 그런데 너를 위해 작은 팁을 준비했어 그렇게 그는 이전 게임의 내 플레이에서 무언가를 지적했어요. 내가 경기하는 날 내내 그가 준비하는 조언을 들었죠.
재키 밀번. 1981년 TV쇼에 출연했을 때 그 당시의 밀번의 회상

6. 수상

6.1. 클럽

6.2. 개인



[1] 이때 시모어는 밀번의 아버지를 설득하면서 아버지의 주의를 끌기 위해 계속 지폐 비비는 소리를 일부러 냈다고 한다.[2] 매튜스와 블랙번이 꿈꾸던 FA컵 우승은 2년 후에 더욱 극적인 과정을 거쳐 찾아왔고 지금까지도 매튜스 파이널(또는 모텐슨 파이널)로 불리고 있다.[3] 당시 FA 채리티 실드는 9월 24일에 열려 리그 개막보다 늦었다.[4] 로블레도의 이 득점왕 기록은 잉글랜드 리그에서 처음으로 영연방 이외의 국적 선수가 차지한 득점왕 기록이었다.[5] 지역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