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紳
? ~ 1637년(인조 15)
1. 개요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유명한 학자이자 효종의 장인인 장유의 동생이다. 단 형과 더불어 세자빈 나아가 왕비가 된 (조카)딸 덕 보기 한참 전에 죽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성보(誠甫). 초명은 장재(張縡)[1]이다.2. 생애
1587년 아버지 형조판서 덕수군(德水君) 장운익(張雲翼)[2]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숭원(朴崇元)[3]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617년(광해군 9) 증광시 진사시에 3등 18위로 입격하였다. #원래는 형 장유의 그늘에 가려 그저 그렇게 살던 사람이었으나 1617년 조정에서 경희궁[4]을 지으려 할 때, 맏형 장륜(張綸)과 함께 자신이 살던 집터를 왕실에 기증했다. 이 공으로 맏형과 함께 벼슬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 뒤 1623년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에 가담했는데, 장인이었던 당시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을 즉석에서 회유하여 반정군 편으로 꼬신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덕창군(德昌君)에 봉해졌다. 이때 그의 형 장유는 1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주로 지방관을 두루 지냈고 병자호란 즈음에는 종2품 강화부유수로서 일종의 수군 장군인 주사 대장을 겸하고 있었다. 호란이 발발하고 강도검찰사로 김경징이 임명되어 왔는데, 김경징은 장신의 병권을 탐내어 그가 무언가 하는 족족 제동을 걸어 내분을 일으켰다.[5] 그 다툼이 워낙 격해서, 인조가 직접 교지를 내려 소위 교통정리를 해주어야 했을 정도였다.#
청군이 염하수로를 통해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려 하자,[6] 이를 막기 위해 판옥선단을 이끌고 나섰다. 그러나 염하수로의 수심이 얕은데다 썰물이 시작되기까지 하여, 판옥선을 운용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했다.[7] 결국 그렇게 싫어하던 김경징과 더불어 배를 타고 내뺐다.
난이 수습된 후 그 죄를 물어 김경징과 함께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았다.[8] 당시 그의 형이 우의정이었던데다가 봉림대군(효종)의 장인이었으므로 왕실과 사돈 집안인 지체 높은 인사였으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얄짤없었다.[9] 그래도 단순히 패전을 이유로 참형을 당한 강진흔에 비해선 너무 고운 죽음이었다.[10] 김경징의 부관 이민구[11]는 10년 넘게 유배살이를 하다가 효종 때에야 복권되었다.[12]
선단을 후퇴시킨 것은 불가피한 행동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장신의 잘못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장신은 강화유수, 즉 강화도 방어의 총 책임자였다.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 전투에 판옥선을 동원한 것은 중대한 실책이었다. 강화해협은 급류가 심하고 수심이 얕아, 광해군 때에 이미 '강화는 판옥선 같은 큰 배보다는 몸체가 작은 병선를 운용해야 하는 곳이다.'라는 건의가 나온 바 있었다.# 장신이 강화유수로 부임된 시기는 인조 14년 3월 9일이고, 병자호란이 발발한 것은 그 해 12월이다. 대략 9개월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 동안 병선을 조달하여 판옥선을 대체하는 등의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전장의 지형이나 기후를 이용하여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은, 주둔군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이다. 원정군은 주둔군에 비해 목표 지점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강화도 방어전 당시에는, 청군이 염하수로의 조석차를 이용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했고, 장신의 함대는 조류의 흐름 때문에 청군의 도하를 저지하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 강화도의 기후를 강화유수 장신보다 막 쳐들어온 청군이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무리하여 염하수로로 나아갔다면, 판옥선단이 급류에 휩쓸리거나 썰물로 인해 수심이 얕아져 배가 전부 좌초될 위험이 있었던 만큼, 퇴각 자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배의 병력을 상륙시켜 육상전에 나섰다면, 적어도 왕족 일가를 비롯한 섬의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신은 전투 자체를 포기하고 그냥 도망쳐버렸다. 이는 어떤 식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중대한 잘못이다.
[1] 형 장유의 사마방목(1606년)과 형 장유의 문과방목(1609년)에는 그 이름이 장재(張縡)로 등재되어 있다.[2] 임진왜란의 공으로 인해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3] 정2품 한성부판윤(判尹)을 지냈다.[4]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개성에 있던 경덕궁(敬德宮)과는 한자가 다르다.[5] 검찰사의 업무는 말 그대로 군무 검찰이다. 직접 나가 싸우는 장수가 아니다.[6] 민가의 집 문짝을 뜯어내서 뗏목을 만들어 쳐들어왔다.[7] 연려실기술 등의 기록 때문에 단순히 겁을 먹고 조류 핑계를 대며 도망친 것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민구의 답정판서서나 실록의 기록 등을 보면 조류 얘기는 단순한 변명이 아니었던 듯 하다. 전투가 있었던 당시에는 썰물이 시작되고 있었을 것이라는 과학적인 분석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8] 정확히는 장신이 먼저 사사되었고, 김경징은 조금 나중에 사사되었다.[9] 김경징도 마찬가지였다. 김류는 반정 이래 줄곧 아들인 김경징을 비호해왔고, 김경징을 비판하는 이가 있으면 모함과 참소를 일삼아 외직으로 몰아냈다. 이 때문에 김경징은 아비의 권세를 믿고 마음껏 전횡을 저질렀으며,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김류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김경징이 강화도에서 저지른 실책은 천하의 김류조차도 덮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문 전체가 쓸려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기에, 김류는 아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보고도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10] 사약이나 교수형처럼, 몸에 큰 훼손이 생기지 않는 사형은, 조선에서는 대단히 자비로운 처형 방법이었다.[11]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의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서자 경녕군의 6대손.[12] 병자호란 당시 검찰부사로서 김경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경징은 늘 이민구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섬의 사람들은 이민구를 김경징의 유모(乳母)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경징과 이민구는 청군을 목전에 두고도 업무를 소홀히 하고 늘 술에 절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럴 때가 아니라고 지적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후 이러한 행적이 문제가 되어 이민구는 관직을 잃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간간이 '이민구는 재주가 뛰어나니 다시 불러들이자.'는 건의가 나오곤 했지만, 병자호란 당시의 실책은 도저히 용서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매번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끝내 재야에서 최후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