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슬리 학살(1937) - 치바오 지역과 도미니카 공화국-아이티 국경 내외의 아이티인들을 학살한 사건. 도미니카는 이전부터 아이티의 식민 지배를 받아 왔고 그 과정에서 모카 참수 등 도미니카인 학살이 따랐던 터라 아이티에 대한 국민 감정이 대단히 나빠져 있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아이티인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불법 월경 및 약탈을 저지른다는 풍문이 들리자 당시 독재자라파엘 트루히요가 결국 학살 명령을 내려 도미니카 공화국군이 아이티 국경에 파견되어 최대 35000여명의 아이티인이 사망했다. 하필 파슬리 학살인 이유는 당시 도미니카 공화국군 측에서 아이티인과 도미니카 흑인을 가려내기 위해 단어 파슬리(Persil)을 스페인어로 말해보도록 시켜서 발음이 부정확한 이들은 아이티인으로 간주하고 처형했다는 루머가 돌았기 때문이다. 정작 본국인 아이티에서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미국과 함께 겨우 나서서 보상을 요구했다.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2023년 12월 29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서 제노사이드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2024년 1월 26일 국제사법재판소는 남아공의 임시처분의 신청을 판단하면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한 행위가 제노사이드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며 이스라엘에 대해 모든 제노사이드방지협약 위반 행위를 방지하고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베냐민 네타냐후
티베트 학살(1950~) - 1950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 이후 중국은 티베트인들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려는 시도를 했고 티베트 망명정부는 중국공산당의 학살로 인해 1950년부터 1984년까지 120만명 가량이 학살당했다고 발표했으며 서방 학자들도 최소 50만명 가량이 학살당했다고 추정한다.-중국의 역대 주석들
킬링필드(1975~1979) - 단순히 반동이라고 의심받은 캄보디아인들만 죽인 게 아니라 캄보디아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베트남인, 화교, 참족 및 캄보디아에 잔류하던 프랑스인, 태국인, 미국인 등 캄보디아 내 소수민족 및 외국인들을 대량학살한 엄연한 제노사이드다.-폴 포트
아르메니아인 대학살(1915~1917) - 오스만 제국의 청년 튀르크당이 20세기 초반에 자국의 소수민족 기독교 신자인 아르메니아인에게 행한 제노사이드. 하지만 문서를 보면 알다시피 오스만 제국은 종교적으로 벌인 게 아니라 무슬림인 아랍인, 아시리아인, 그리스인 등에게도 제노사이드를 가했다. 근대의 대표적인 제노사이드로 50만명 이상의 아랍인, 750,000명의 아시리아인, 900,000명의 그리스인, 1,500,00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참으로 조직화된 목적을 가지고 학살당했다.[1] 아르메니아인만 죽인 게 아니라고 아랍권 등에서 분노하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란 이름부터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와 오스만 말기 제노사이드라는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키자(1972) - 이키자(Ikiza)는 룬디어로 '재앙'이라는 뜻이다. 당시 독재자인 미셸 미촘베로의 주도 하에 투치족들이 후투족 및 트와족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2] 초기에는 자이르, 탄자니아가 미촘베로의 '후투 반란' 진압을 도왔지만 곧 실상을 알고 발을 뺐고 이후엔 프랑스, 우간다,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등이 미촘베로의 학살을 지원했다.
부룬디 학살(1993~2005) - 르완다와 더불어 부룬디에서도 나타난 후투인과 투치인들의 분쟁들. 보통 르완다 내전과 같이 언급된다.
부건빌 내전(1988~1998) - 오세아니아파푸아뉴기니에 위치한 부건빌 섬에서 10년간 진행된 분쟁. 부건빌 주민들은 솔로몬 제도계에 가깝다 보니 파푸아뉴기니에서는 지역차별과 인종차별 등이 나타나서 내전이 번졌다. 내전 기간 동안 부건빌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들이 나타났다.
크림 타타르족 추방(1944~1948) - 크림 타타르족을 경계한 스탈린의 지시로 크림 타타르족을 강제 추방하고 반발하는 이들은 학살한 사건. 이후 크림 타타르족에게 강제 동화정책을 펼쳤으며 해당 사건으로 최소 3만명에서 최대 10만명 가량의 사망자가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학자 노먼 네이마크와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캐나다 정부는 이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분류했다.-이오시프 스탈린
코소보 전쟁(1998~1999) - 알바니아인이 다수인 코소보 지역이 세르비아에게서 독립하려고 하자 일어난 여러가지 학살들. 다만 서방의 뒤늦은 개입과 외교적 오판으로 수많은 보슈냐크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을 초반부터 저지하지 못했던 보스니아 전쟁과 달리 이 쪽은 NATO가 신속하게 개입하여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다. 2007년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스레브레니차 학살이 제노사이드방지협약에서 규정한 제노사이드에 해당한다면서 세르비아가 직접 제노사이드를 자행하지는 않았으나 보스니아 내부의 친세르비아 세력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에 협조하지 않는 것으로 제노사이드를 방지(prevent)할 협약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 국제사법재판소가 제노사이드방지협약을 적용해 의무 위반을 판단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슬로보단 밀로셰비치
[1]튀르키예에서는 부정되는 사건으로, 학살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계획적이었다는 것과 그 규모를 부정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실상 튀르키예의 역사 왜곡으로 취급받으며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이를 제노사이드로 인정하고 있다.[2] 후투족들은 1965년 투치족 왕정에 대해 반기를 일으켰는데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것이 당시 장군이었던 미촘베로였다. 이 때문에 미촘베로와 후투족들은 대립하는 관계였고 1972년 후투족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미촘베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투치족을 선동하여 후투족을 공격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