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국방부 CALS 사업단 단장 이재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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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8년 ([age(1948-01-01)]세) | ||
경상북도 월성군 | |||
본관 | 전주 이씨 | ||
링크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 |
배우자 | 불명 | ||
자녀 | 슬하 딸 2명 아들 1명 | ||
학력 | 국방대학원 (석사과정/졸업) | ||
경력 | 군인공제회 C&C 사장 |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28기)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72년 ~ 2002년 | |||
최종 계급 | 준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국방부 CALS 사업단 단장 | ||
주요 보직 | 제8보병사단 21연대 3대대 소대장 제8보병사단 21연대 연대 군수장교 제8보병사단 21연대 1대대 작전장교 제8보병사단 21연대 2대대 6중대장 정승화 전속부관 육군대학 교관 육군본부 군수참모부 소요관리과 과장 제8보병사단 21연대 연대장 국방부 CALS 사업단 단장 | }}}}}} |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2. 일생
2.1. 초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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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생도 시절 모습 |
경주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같은 면에 육사 출신 군인을 보고 공직을 원했셨던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릴겸[1] 육군사관학교 28기로 입학했으며 병과는 보병이었다
2.2. 군인시절
임관후 제8보병사단 21연대 3대대 소대장으로 보직되었다. 당시 대대장은 이진삼이었고 연대장은 노태우였는데 당시 이재천을 좋게 봤었다고 한다. 후에 21연대에서 군수 장교와 작전장교, 중대장직을 맡았다.[2][3] 중대장 시절에 미군의 지원을 업고도 각종 부정부패와 권력형 비리 등으로 몸살을 앓고있는 월남 정권과 징병제을 실시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한계를 보며 지휘관의 훌륭한 리더십 없이는 군대를 이끌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육군사관학교 훈육관을 희망하여 육군사관학교로 발령받았는데 그는 처음에는 훈육관이나 교관이 되고 싶었으나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이었던 정승화의 전속부관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정승화의 인연이 시작되었다.[4]정승화가 영전할때마다 계속해서 전속부관직을 맡았으며 여러 장군들을 만났다고 한다.[5] 그러던 중 소령으로 진급하고 몇달 뒤에 이재천의 인생에서 큰 사건, 12.12 군사반란이 터지는데 10.26 사태로 당시 육군참모총장 전속부관이었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10.26 사태 이후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의 전속부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12.12 군사반란 때 당시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의 신군부 측에 총격을 받고 말았다. 당시 정승화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속부관 이재천한테 지시하였고 이러한 지시에 따라 노재현 장관이나 최규하 대통령한테 전화를 걸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있을 때 근거리에서 보안사 요원들에 의해 총격을 받아 의식을 잠시 잃었다가 정신차렸을 때 밖에서 총소리와 자동차가 출발하는 소리를 듣고 10.26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대통령경호실 경호원들을 확인 사살했던 것이 생각나 전속부관방을 나와 응접실 바로 이동하여 즉시 육군본부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지금 보안사 일원들이 총장 공관에 총기난사를 일으키고 보안사 정보처장과[6] 육군 범죄수사단장이 총장님을 납치했다, 지금 즉시 병력을 출동시키고 구급차를 보내달라”고 신고하고 난 뒤 윤성민 육군참모차장한테 전화를 해 상황설명 하고 난 뒤에, 운전병의 부축을 받아 사력을 다해 해군제2차장공관 담을 넘고 맨발로 순천향병원으로 걸어가 병원에 도착하여 의식을 잃었다. 그후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에서 긴급 개복 수술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12.12 군사반란이 반란군 승리로 끝난 후 이재천은 정승화 라인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감시와 총상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그러나 정승화 라인이라는 꼬리표는 지워지지 않아서 중령 진급도 겨우 했고 대대장 및 사단군수참모를 맡으면서 대령으로 진급해 제8보병사단 21연대장을 맡았고 이후 문민정부 출범 이후 1997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국방부 CALS 사업단 단장을 맡고 2002년에 전역하였다.
2.3. 예편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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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시절 |
전역 후에 군인공제회 C&C 사장을 역임해 군 골프장 통합예약시스탬과 나라사랑카드시스템을 설계 및 개발하였고 그 후로 2010년 고향 경주로 귀향하여 고향 마을 재개발사업 등 여생을 고향 마을 복원에 힘쓰고 있다.
현재도 살아있으며 최근에는 10.26 사태와 12.12 군사반란때 당시 상황을 직접 진술했다. 지금은 고향 경주에서 문중 게스트 하우스를 관리하고 있으며 토함장군이라는 이름으로 네이버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다. 2024년에는 대한민국을 뒤흔든 격동의 현대사 주요 사건, 1968년 1.21사태부터 1979년 10.26 현장과 12.12 군사반란 사건 현장을 수행했던 일기를 정리해'현대사 사건 수행 일기'라는 책을 출판했다.
3. 대중매체
4. 기타
- 제4공화국 당시에는 초급장교라는 한계 때문에 존재감이 거의 없었으나 정승화 전속부관이었다는 점 때문인지 상당히 굵직한 사건에 연루되었다.(부마항쟁, 10.26 사태, 12.12 군사반란) 그중에서도 12.12 군사반란 당시에는 거의 죽을뻔 했다.
- 박흥주 대령과는 육군사관학교 10년 선후배 사이로서 1979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전속부관으로 수행하는 중 자주 만났다. 참군인 박흥주 대령이 왜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시해에 가담했는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한다.
5. 저서
- 현대사 사건 수행 일기 - 인사이드북스. 2024.
[1] 앞서 말해듯이 이재천 아버지는 경찰시절에 빨치산 일원들을 체포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문에 6.25 전쟁때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집안 어르신들께서 아버지께 ‘이러다가 집안 다 망하겠다’며 어쩔수 없이 경찰을 그만두셨다고 하셨다고 한다.[2] 군수관리 장교시절에 사단장 전속부관이 될 뻔했으나 당시 연대장이었던 노태우의 반대로 군수관리 장교직을 계속 맡을 수 있었다고 한다.[3] 대대 작전장교 맡을 예정이었을때도 공수여단 대원으로 차출될 뻔했으나 여기서 중대장직까지 맡고 싶은 목표가 있어서 거절했다고 한다.[4] 당시에는 원하는 목표와 그리고 결혼준비도 해야되서 거부할려고 했으나 선배의 설득으로 인해 결국 맡았다고 한다.[5] 이때 훗날 정승화와 숙적이 되는 전두환도 만났다는데(당시 1사단장) 당시 전두환을 "정규 육사 11기생 선두 주자답게 과묵하고 신념에 가득 찬 장군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6]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은 권정달이나, 실제 허삼수가 그를 사칭하여 정승화를 납치했다.[7] 대표적으로 육참 납치장면으로 영화에서는 공관 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진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는 보안사측의 기습공격으로 제대로 반격도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