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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구(야구선수)

이인구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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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KBO 퓨처스 남부리그 타격왕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63번
김제빈
(2002)
<colbgcolor=#000> 이인구
(2003~2004)
황준영
(2005)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4번
손인호
(2004~2006)
이인구
(2007)
최길성
(2008)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9번
김문호
(2006~2007)
이인구
(2008~2013)
임종혁
(2014~2015)
}}} ||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4091201323_0.jpg
이인구
李寅求|Lee In-koo
출생 1980년 11월 7일 ([age(1980-11-07)]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서울강덕초(동부리틀) - 잠신중 - 배재고 - 동아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 입단 2003년 2차 8라운드 (전체 57번,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2003~2013)
지도자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4~2015)
부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6)
병역 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4년 11월 18일 ~ 2006년 11월 17일)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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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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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
2.1. 롯데 자이언츠
2.1.1. 2003~2007 시즌2.1.2. 2008 시즌2.1.3. 2009 시즌2.1.4. 2010 시즌2.1.5. 2011 시즌2.1.6. 2013 시즌
3. 지도자 경력4. 연도별 주요 성적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2. 선수 경력

2.1. 롯데 자이언츠

2.1.1. 2003~2007 시즌

동아대를 졸업한 뒤 200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당시 암흑기의 최절정이었던 롯데에서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2004년 말 상무에 입대해 군 문제부터 해결하게 된다. 2006년 말 전역하여 팀에 복귀한 뒤,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이 2007 시즌의 3번 타자감으로 지목하며 기대를 받았었다. 그러나 정작 2007 시즌 개막 후에는 지나친 기대를 받아서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실력 발휘를 하지 못했고 시즌 내내 1할대 타율에 머물며 기대와는 다르게 꽤 부진했고, 강병철의 양아들 취급을 받으며 강병철 감독과 함께 세트로 많이 까였다.

2.1.2. 2008 시즌

2008년도엔 2군에 계속 머무르면서 본즈놀이(타율 3할 출루율 4할 장타율 5할)를 하며 무력시위를 벌였지만 1군에 한번도 콜업되지 못해 '롯데의 학연 영향으로 2군 선수들은 올라오지 못한다' 는 기사까지 나왔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무식할 정도'로 많은 훈련량을 소화한다고 하며 악바리로 유명한 박정태마저 이인구의 훈련을 보고 지독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한다. 8888577 이후 놀기 좋아하는 젊은 선수가 많아진 롯데에서 드문 노력파라 그런지 이 이야기 덕분에 롯빠들의 시선이 많이 관대해졌다.

그 노력의 보답인가, 2008년 7월경 정수근이 불미스러운 일로 출장 정지를 당한 틈을 타 1군 로스터에 다시 콜업된 후 침체된 롯데 타선에서 맹활약, 많은 롯빠들에게 칭찬을 받았다.[5] 시즌 중에는 테이블 세터로서 꾸준히 출루를 해줬고 결국 팀이 준플까지 진출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외야수로서도 받기 어려운 타구를 몇번씩이나 잡아내는 호수비를 몇 번이나 보여 줬다. 롯데가 죽을 쑨 2008년 준 플레이오프에서는 김주찬과 함께 나란히 각성. 계속해서 출루를 해주었고 포스트시즌 한경기 최다안타 타이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특히 3차전에서는 클린업 트리오에서 점수가 안 나오니까 아예 테이블 세터 둘이서 득점까지 올리는 맹활약을 했다. 준플에서 이인구의 타율은 무려 5할이였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 왈, 이인구 없이 롯데의 가을 야구도 없었다. 롯데의 전력의 명실상부한 핵으로 부상했다.

2008 시즌에는 타율 0.289, 홈런 2, 타점 14, 도루 11, OPS 0.724로 데뷔 후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2.1.3. 2009 시즌

2009 시즌 초창기에는 2008 시즌 보다 좀 더 부진했으며 사람들이 다시 이승화, 심지어 정수근을 찾게 만들었다, 하지만 조성환의 부상 이후 톱타자로 나서면서 각성 급격한 타율 상승을 이뤘다. 혹자는 정수근 복귀설이 불러온 해담로이드 효과에 주목한다. 그러나 본인이 상황에 따라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타입인지라 타순 변경만 있으면 다시 죽을 쓴다. 무엇보다도 김주찬과 뇌를 나눠쓴다는 말이 나올만큼 주루센스가 형편이 없어서 빠른 발을 생각보다 잘 살리지 못한다. 사실 허벅지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고 했다.

장점으로 평가되는 부분은 성실함과 수비[6]다. 2008 시즌 이후에는 수비가 많이 안정되어 롯데의 외야수 중에서는 이승화 다음으로 중견수 수비가 좋고, 롯데의 외야수 중에서는 타격/수비/주루 등 모든 면에서 가장 고른 성적을 냈다. 2007 시즌에는 2007년 1할 7푼의 타율에도 불구하고 출루율은 3할이라는 좋은 선구안을 보이기도 했지만, 2008 시즌 이후부터는 BB/KK가 08 시즌 0.56, 09시즌 0.43으로 평범한 선구안을 보였다.

2009 시즌에는 타율 0.269, 홈런 5, 타점 33, 도루 6, OPS 0.735를 기록했다.

2.1.4. 2010 시즌

롯데의 넘치는 외야 자원으로 인해, 2010 시즌은 출장할 기회가 없다시피했다. 1군 5경기 출장이라고 해도 실제 타석에 들어선 것은 2차례(안타 無)뿐. 9월 24일 경기에 대주자로 출장해서 1득점한 것이 전부. 그래도 박정준(2경기 출장, 단 1차례 타석)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나....

2.1.5. 2011 시즌

시즌 초 주전 외야수인 김주찬이 부상을 당하면서 출전 기회를 얻었다. 크게 뛰어나지도 않지만 크게 모자라지도 않은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김주찬의 공백을 메웠다.

2011년 4월 23일 저녁에 어머니가 끝끝내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1년 6월12일 사직 한화전에서 무려 6타수 5안타의 맹타를 휘두르며 팀의 17대2 압승을 이끌었다.

7월 16일 LG와의 경기에서 임찬규를 상대로 9회말 1사만루 동점상황에서 내야를 살짝 넘기는 타구로 끝내기 안타를 만들어냈다.

7월 23일 기준 타율 0.275 홈런 1 타점 11, OPS 0.729[7]를 기록했다

9월 30일 최동원 데이 때 투런홈런을 쳐서 대선배 가는 길에 승리를 거두는 데 수훈선수가 되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대타로 출장하여 1타수 무안타, 타율&장타율&출루율 0을 기록했고 나머지 경기는 모두 결장했다.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2.1.6. 2013 시즌

2013년에는 1군에서 2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안타를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다. 시즌 후 정보명, 권영준, 박건우, 변용선과 함께 방출되었다.

12월 26일날 기사에 따르면 1달이 지나도록 어느 구단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자 현재 지도자 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다.

2014년 1월 21일 기사에 의하면 고양 원더스 입단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23일 훈련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고질적인 손목 통증 때문에 결국 훈련을 포기했다.

3. 지도자 경력

2014년 박정태가 운영중인 사회인 야구 레슨 클럽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같은 해 9월부터 대구고에서 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2016년 현재 부산공고 코치로 있으며 사회인야구에도 뛸 예정이라고 한다.

2017년 7월 중순, 오랜만에 근황이 기사로 나왔는데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야구아카데미를 개설했다고하며 주말에는 양산시에서 유소년 야구단 감독으로도 뛰고 있다고 했다. 참고로 프로 출신 선수들이 야구 아카데미를 연 사례는 제법 있지만, 이인구 정도의 인지도를 갖춘 선수가 직접 운영하는 아카데미는 드물고 이런 아카데미들은 대부분이 수도권에서만 집중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가운데, 지방에 있는 야구인들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는 것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2월 26일 U-17 청소년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고 직접 밝혔다.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롯데 자이언츠 동료 김만윤과 2018년 10월 13일 "양산MK유소년야구단"을 창단하여 물금소재 강민호 야구장 및 황산구장, 양산종합운동장 등에서 야구 꿈나무를 육성하였다.

현재 사회인 야구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fff> 연도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출루율 장타율 wRC+ sWAR
2003 롯데 9 18 .278 5 2 0 0 1 1 1 0 5 .278 .389 51.4 -0.04
2004 41 58 .121 7 0 0 0 0 10 1 2 15 .215 .121 -15.2 -0.58
2005 군 복무(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6
2007 65 167 .198 33 8 2 1 12 18 2 19 34 .310 .287 65.2 0.25
2008 42 149 .289 43 5 0 2 14 23 11 15 27 .361 .362 96.0 1.01
2009 95 271 .269 73 13 3 5 33 34 6 26 61 .340 .395 86.5 1.03
2010 5 2 .000 0 0 0 0 0 1 0 0 1 .000 .000 -126.0 -0.05
2011 81 161 .267 43 5 2 2 14 26 6 17 22 .348 .360 101.0 0.84
2012 7 12 .167 2 0 0 0 0 1 0 0 4 .167 .167 -15.6 -0.12
2013 2 2 .000 0 0 0 0 0 0 0 0 0 .000 .000 -129.8 -0.05
<rowcolor=#373a3c> KBO 통산
(9시즌)
347 840 .245 206 33 7 10 74 114 27 79 169 .326 .337 78.1 2.29

5. 여담

6. 관련 문서


[1] 밀성군파.[가사] 인구 인구 인~구 롯데 이인구~ (HEY!) 인구 인구 인~구 롯데 이인구~ (HEY!) 인구 인구 인~구 롯데 이인~구~ 잘생겼다 롯데 이인구 HEY! HEY! 이!인!구![3] 이용훈이 흥얼거리던 것이 응원가가 되었다고 한다.[4] 최정과 원곡은 동일하지만 사용하는 구간이 다르다.[5] 사실 정수근의 사고 전날 이미 1군에 콜업되어 있었다. 7월 15일 경기에서 정수근이 1번 지명타자, 이인구가 8번 좌익수로 선발 출장했다.[6] 하지만 2007시즌 죽도록 욕을 먹은 가장 큰 이유는 미칠듯한 에러 때문이다.[7] 의외라고 할 수 있겠지만 타율이 낮은 대신 출루율과 장타율이 높기에 이런 것. 장타율이 홍성흔보다도 높다.[8] 조선 세종의 서자 밀성군의 8대손. 서인의 중진으로 경신환국을 통해 남인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으나 기사환국으로 역풍을 맞아 사사된다.[9] 김응국도 서울 출신이지만 동남 방언을 잘 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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