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맘루크 왕조 시기의 모스크 유적 | 유대교 시설로 개조된 아부 후라이라 영묘 |
이벨린 성 유적
오스만 시기 다리 유적
1. 개요
히브리어: יַבְנֶה아랍어: يبنى / يبنا
영어: Yavne / Yibna
이스라엘 중남부의 유적. 야브네, 자브네 등으로도 불린다. 아슈도드에서 동북쪽으로 10km, 텔아비브에서 남쪽으로 20km, 라믈라에서 서남쪽으로 12km 떨어진 언덕에 위치한다. 고대에는 얌니아로 불렸고, 유대교 신학에 중요한 도시였다. 중세에는 이벨린으로 불렸고, 십자군 전쟁기 이벨린 가문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기에도 중요한 도시로 유지되었으나 1차 중동전쟁기에 이스라엘 군에게 파괴되어 유적으로 남았다. 서쪽에 1941년에 설립된 유대교도 키부츠인 야브네가 있다.
2. 역사
유적지 전반부
동로마 시기의 양조장 유적
청동기 시대부터 마을이 있었고, 필리스티아 인들이 정착했다. 기원전 160년경 하스몬 왕조의 유다 마카베오가 도시를 함락, 파괴한 후 유대교도들을 정착시켜 재건했다. 로마 제국 들어 도시는 얌니아 (Ἰαμνία)라 불렸고,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사망한 후 살로메 1세가 그 분봉왕이 되었으나 서기 6년에 후자가 사망한 후 로마 황족인 리비아 드루실라와 티베리아스 모자의 영지가 되었다. 서기 41년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가 다시 얌니아를 차지했으나 3년 후 그가 사망하자 다시 로마 제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 로마 당국은 얌니아에 칼리굴라 황제의 제단을 세웠는데, 유대교도들이 우상숭배라 여겨 파괴했다. 그러자 칼리굴라는 예루살렘의 성전산에 자신을 유피테르로 형상화한 조각상을 세우게 하여 유대교도들을 더욱 자극했다. 뒤이어 1차 유대 반란 시에 얌니아는 로마에 협력했고,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전쟁 도중 항복한 유대교 랍비 요하난 벤 자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허가 하에 제자들과 함께 얌니아에 정착했다. 전후 유대교 법관 회의인 산헤드린은 얌니아에 재설치 되었다.
2.1. 중세
맘루크 시기 모스크 유적
아부 후라이라 영묘
오스만 제국 시기의 다리
동로마 제국 시기 얌니아의 언덕 동부에는 제국 최대의 포도주 양조장이 들어섰고, 566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대관식에 납품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640년경 얌니아는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이끄는 이슬람 제국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브나 혹은 유브나로 명명되었다. 이슬람 시기 도시는 언덕의 서부에 위치했다. 9세기 압바스 왕조 시기의 지리가 야쿠비는 도시에 여전히 사마리아인들이 거주한다고 기록했다. 985년 파티마 왕조의 지리가 알 마크디시는 도시가 무화과로 유명하며, 아름다운 모스크가 있다고 기록했다. 1141년 예루살렘 왕국의 이벨린 (이블랭) 영지가 설립되었고, 영주가 된 발리장은 성을 건설했다. 이벨린 가문은 1150년대 들어 빠르게 성장했고, 1177년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살라딘)가 습격했다.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승리한 살라딘은 이벨린을 점령해 불태웠고, 다시 이브나로 명명했다. 13세기 들어 다시 십자군 령이 되긴 했으나 이전과 같은 중요성은 없었다. 한편 12세기의 지리가 야쿠트 알 하마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중세 들어 무슬림들은 이브나에 위치한 사하바 중 하나인 아부 후라이라의 무덤을 신성시 여겼다. 1260년대 이브나는 바이바르스에 의해 맘루크 왕조령이 되었고, 주교구 성당은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맘루크 시기 이브나는 다마스쿠스 ~ 카이로 간의 노상에 위치하여 중시되었고, 1337년에는 모스크에 현존하는 미나렛이 세워졌다. 오스만 제국 시기 이브나는 가자 산작의 가자 나히야에 속했고, 1596년 기준 129가구의 무슬림이 거주했다. 주민들은 1/4 세율로 농축산물의 매년 3만 4천 악체의 세금을 납부했다. 세금의 3/4는 종교 재단인 와크프에 귀속되었다. 오스만 시기에도 이브나는 주요 간선도로 상에 위치한 교통 거점이었다.
2.2. 근현대
이스라엘에 의해 파괴되기 전의 모스크
1799년 나폴레옹의 팔레스타인 침공 당시 도시는 에브네 (Ebneh)로 기록되었고, 1834년 기준 인구는 3천명 정도였다. 도시 북쪽의 농지에는 올리브 나무와 옥수수가 재배되었다. 영국령 팔레스타인 시기인 1921년에 남아 초등학교, 1943년에 여아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1931년에 3600명이던 인구는 대부분의 무슬림과 극소구의 기독교도와 유대교도, 바하이교도로 구성되었다. 주민들은 인근 사구인 리말 이브나에서도 독특한 기술로 농사를 지었다. 1941년 서쪽에 독일계 유대교도들이 키부츠 야브네를 설립했다. 1945년 기준 이브나의 인구는 5400명이었고, 인근에 1500명의 베두인 유목민이 거주했다.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안에서 이브나는 유대 국가로 배정되었다.
2.3. 1차 중동전쟁과 파괴
이브나의 폐허
1948년 3월 아랍 군단의 이라크 병력이 진주했고, 하가나 유대 민병대가 도시를 공격해 수십명의 주민이 살해되었다. 4월에는 이라크인 장교가 취중에 총기를 난사, 2명의 주민을 살해하자 영국 당국에 체포되었다. 1차 중동전쟁 발발 후 인근 자르누카의 주민들이 피신해 왔으나 배신자로 몰렸고, 5월 말엽 자르누카와 쿠바이바가 이스라엘 군에 함락되자 이브나 주민들은 아슈도드 (이스두드)로 도주했다. 다만 무장 인원은 아슈도드에서 거부되어 이브나로 돌아왔다가, 6월에 이스라엘 군에 의해 노약자들과 함께 축출되었다. 1948년 아부 후바이라 영묘는 세파르딤 유대교도들에 의해 랍비 가마리엘 영묘로 여겨져 개조되었다. 1950년 이스라엘 군은 이브나 모스크를 폭파, 현재처럼 미나렛만 남게 되었다. 하마스의 창설자 중 하나인 압델아지즈 알 란티시가 이브나 출신의 실향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