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16 09:51:59

이명회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2642B, #397431 20%, #397431 80%, #32642B);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d40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덕흥대원군 하원군 당은군 응천군
제5대 제6대 제7대 -
이정한 이홍일 이세정 이명좌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이명회 이형종 이풍 진안군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완성군 완창군 경원군 창산군
제16대 - (제17대)
이덕주 (이우갑) (이영기)
}}}}}}}}}

도정궁 제8대 궁주
조선 중종의 8대손
이명회 | 李明會
직위 돈녕도정(敦寧都正) 
본관 전주 이씨
이름 명회(明會)
제숙(際叔)
생부 이세정
생모 정부인[A] 청송 심씨(靑松 沈氏)
부인 정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
자녀 3남 2녀
생몰
기간
음력 을축년 1월 15일 ~ 정미년 12월 13일
양력 1685년 2월 17일 ~ 1728년 1월 12일
1. 개요2. 생애3. 사망4.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조선왕족 출신 문신. 도정궁 제7대 사손이자 제8대 주인이다.

2. 생애

양력 1685년(숙종 11년)[2] 2월 17일[3]한성부 서부 인달방 이홍일 자택에서 덕흥대원군 7대 사손 이세정과 정부인 청송 심씨 사이에서 적2남로 태어났다. 1718년(숙종 44년)에 식년시[4] 생원에 급제하여 진사를 지내고[5] 정릉의 참봉일을 맡던 중 아버지 이세정의 과옥(科獄)[6]에 엮여서 사헌부의 지탄을 받았다.

1722년(경종 2년)에 일어난 임인사화 때 작은할아버지 이홍술과 형 이명좌가 처형당했다. 남은 일가마저 뿔뿔히 흩어졌으며 그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전라도 부안현 위도로 귀양갔다. 사실 임인사화는 경종 시기 소론 측에서 노론을 찍어내리려는 무고에 가까웠다. 그래서 영조가 즉위하고 1년 뒤인 1725년(영조 1년) 3월에 연좌받았던 친족들이 전부 신원받았고 그도 한성부로 돌아온다. 그리고 형 이명좌 대신 덕흥대원군제사를 받드는 도정궁 사손이 되어 돈녕도정(敦寧都正)에 제수받았다. 이후 잠깐 형 이명좌의 후사로 도정궁의 대를 잇게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이명회와 그의 후손들로 잇게 했다.

3. 사망

양력 1728년 1월 12일[7] 향년 42세로 별세했다.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받았고 훗날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재추증받았다.

4. 가족 관계



[A] 사후 추증.[2] 숙종은 이명회의 아저씨 뻘이다. 즉, 이명회는 경종, 영조와 같은 항렬이다.[3] 음력 1월 15일.[4] 式年試. 조선시대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 시험.[5] 형 이명좌는 3년 뒤에 급제.[6] 항목 참조.[7] 음력 정미년(영조 3년) 1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