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함평 이씨[1] |
출생 | 1888년 12월 13일 |
충청도 덕산군 고산면 몽곡리 상몽곡 (現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몽리 140번지) | |
사망 | 1961년 3월 1일[2] (향년 72세) |
학력 |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원속성과[3] / 졸업)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52호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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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이신범 전 국회의원은 그의 셋째 아들이고, 이치범 전 환경부 장관은 그의 조카이다.
2. 생애
1888년 12월 13일 충청도 덕산군 고산면 몽곡리 상몽곡(現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몽리 140번지)에서 아버지 이영헌(李英憲, 1868. 6. 23 ~ 1938. 11. 8)과 어머니 여산 송씨(1864. 8. 25 ~ 1897. 11. 20)[4]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원속성과를 졸업하고, 1914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졸업 후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전라북도 무장공립보통학교 부훈도, 1914년부터 1915년까지 김제공립보통학교 부훈도를 역임했고, 황해도 수안광산사립학교를 거쳐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충청남도 신평공립보통학교 훈도, 1926년부터 1929년까지 결성보통학교 훈도 등 교직에 종사하다가 41세 되던 1929년 퇴직하고 귀향했다. 그 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촌진흥회 회장, 고덕공립보통학교 지방위원 등을 역임했다.
1932년 3월에는 감리교회 상몽리 기도처를 설립하고 선교활동을 하는 한편, 강습소를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1937년에는 2년제 예덕간이학교 설립에 필요한 땅을 기부하는 등 평소 사회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1937년 10월 5일, 그는 예산군 고덕면 상몽리에 있던 바깥사돈[5]인 류기원(柳冀元, 1877. 12. 14 ~ ?)[6]의 집 사랑방에서 류기원과 상몽리 구장 홍종희(洪琮熹)[7], 마을 사람 오수환(吳壽環)을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중국이 잠자는 돼지라면 일본은 잠자는 개보다도 못하다. 중국의 장개석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인물인데 이번 사변[8]에서 중국이 패한 것은 운이 나빠서 진 것이지 결코 장개석의 정치가 졸렬해서 진 것이 아니다. 대체로 일본의 정치는 사기 정치인데 거기에 편승하여 진 것이다. 신문에서 (일본이) 연전연승했다고 하는 것은 반만 옳다고 볼 수 있다."라며 중일전쟁의 전황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사흘 뒤인 10월 8일, 그는 자신의 집 사랑채 앞에서 구장 홍종희로부터 "늘상 당국의 명으로 각 집을 돌며 보리 공출에 대해 신청을 받아 왔는데, 이번에는 군마의 말먹이로 쓰일 것이라 그런지 상당한 시가로 당국에서 보리를 구입할 것이라고 합니다. 선생께서도 알맞게 신청하십시오."라며 일본군 군마의 말먹이로 쓰일 보리의 공출에 대해 들었다. 이에 이계한은 "설령 지금 돈을 준다고 해도 정부에서 돈을 준다는 것은 당최 믿을 수가 없다. 우리 처지에서 먹기에도 부족한데 정부에서 말먹이로 쓰겠다고 내라는 것이 보리 뿐만이 아니었다. 가을에는 쌀이 나오니까 쌀이 나온다면 쌀도 가져 가겠지."라며 보리 공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했고, 공출에 대해서는 3말만 내겠노라며 신청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0월 10일, 고덕면 서기 조일호(趙日鎬)와 구장 홍종희가 그의 집을 찾아와 "요 전날 구장에게 신청한 보리 3말로는 우리 면의 예정 수량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지금 조금 더 많은 수량을 신청해주시지요."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이계한은 "농가에서 보리는 소나 돼지의 사료로도 쓰이고 또 약이나 차 대신으로 만들어서 쓰이므로 먹지 않을 수 없다."라며 면서기의 시정 요구를 거절했다.
이때 면서기 조일호는 "소나 말에게 먹이겠다고 이번 공출에 응하지 않는 것은 시국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중국에서 황군이 싸우고 있는 이 전시에 군마의 말먹이가 부족한데 그 처지는 생각해보셨습니까. 돼지에게는 대체할만한 곡식을 주고, 적당히 보리 공출에 응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것도 국민으로서 하나의 의무입니다."라며 맞섰고, 이계한은 "나 자신도 시국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고, 또 국민의 의무도 알고 있다. 그러나 국민도 먹고 생활해 가는 사람들이다.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생활에 불안함을 느껴서까지 국민의 의무를 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도 똑같다. 먹어야 힘도 나고 일도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 소는 약해서 보리를 먹지 않으면 안 된다. 돼지 사료 때문에 3말 이상은 낼 수 없다. 물론 징발령이라고 하면 밭이나 집을 팔아서라도 내겠다."며 끝까지 시정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조일호가 실태 조사를 하겠다며 집에 들어가려고 하자, 그는 "집에 들어오려면 직권을 통해 들어오라"며 방패로 막아 가택에 대한 수색을 거절했다. 결국 일본 제국 경찰이 현장에 출동했고, 이들에 의해 곧 체포되었다.
1938년 1월 13일 공주지방법원 홍성지청에서 이른 바 조언비어(造言飛語)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금고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검사 측의 공소가 이유 있음으로 받아들여져 2심이 열렸다. 이에 4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조언비어 혐의에 대해서는 금고 3개월형(법정 미결 구류일수 통산 86일)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61년 3월 1일 별세했다.
1998년 8월 15일 광복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예산군 고덕면 상몽리에 안장되었다가, 2006년 10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함성군파(咸城君派) 27세 계(啓) 항렬.[2] 함평이씨대동보 권5 531쪽에는 1월 6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3] 3개월 과정[4] 송염호(宋濂浩)의 딸이다.[5] 이계한의 장남 이상범(李商範, 1917. 1. 10 ~ 1986. 3. 12)은 진주 류씨 류기원(柳冀元)의 딸 류석경(柳錫卿, 1918. 9. 12 ~ 1954. 4. 4)과 결혼했다.[6]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897년 대한제국군 육군 보병 참위(參尉)로 임관해 대한제국군 친위대 1대대에 보임되었다. 이후 대한제국군 시위대 2대대에 보임되었고 부위로 승진했다. 1902년 임시혼성여단(臨時渾成旅團) 제2연대 제3대대로 잠시 보임되었다가 정위(正尉)로 승진해 대한제국군 진위대 5연대 1대대 중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04년 참령(參領)으로 승진했고 황태자 배종무관부(陪從武官府) 무관이 되었다. 1905년에는 시위대 보병 제1연대에 보임되었다. 경술국치 후에는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예산군 고덕면장을 역임했다.[7] 1939년 상몽리 고산식산계(上夢里高山殖産契)를 설립하고 부주사(副主事)에 취임했다.[8] 정황상 1937년 7월 7일 일어난 루거우차오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