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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3 01:30:05

윤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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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錫禹
1855년(철종 6) ~ 1895년(고종 32)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1. 개요

조선 말기의 군인.

2. 생애

1895년 5월 조선군 훈련대 제1대대 참위(參尉)에 임용되었다.#

같은 해 8월 을미사변이 있었던 음력 8월 20일 오후 4시 제1대대장 이두황과 중대장 이범래(李範來)·남만리(南萬里)로부터 야간 훈련을 하라는 명령을 받아 휘하의 병사를 거느리고 동별영(東別營)에서 출발, 태화궁으로 가서 수비하다가 경복궁 춘생문(春生門)으로 들어가 경복궁 강녕전에 이르러 병사들을 곳곳으로 흩뿌려 보낸 뒤 광화문건춘문 주변을 순시하게 했다. 그러다가 건청궁 동쪽의 녹산(鹿山) 아래에서 불에 타 형체가 문드러진 명성황후의 시신을 발견했으나, 하사(下士) 이만성(李萬成)에게서 나인의 시체가 불에 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튿날인 21일 궁중에서 전하던 말에, 을미사변이 일어난 때에 명성황후파천할 겨를이 없었으며, 피해를 입은 궁녀도 없었다는 것을 듣고 짐짓 지난날 발견했던 불에 탄 시체가 명성황후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 날 밤 제1대대장 이두황과 제2대대장 우범선에게 보고를 올리니, 우범선이 처음에는 유해를 연못에 던지라고 했지만[1], 유해의 혼령에 해코지를 당할까 염려되어 타고 남은 유해의 하체를 거둬 모은 뒤 경복궁 후원 서쪽 오운각(五雲閣) 부근 봉우리 아래에 몰래 안치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배은망덕하게도 정황이 의심스럽다는 억측과 함께 존엄하기 그지없는 황후의 몸에 거리낌 없이 손을 댔다는 얼토당토하지 않는 이유로 윤석우에게 모반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씌웠다. 이에 그해 11월 14일 이주회(李周會)[2], 박선(朴銑)[3]과 더불어 교형처해졌다. 그는 사형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통곡하며 죄를 부인했다고 한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그해 3월 13일 군무 협판(軍務協辦)에 추증되었으며, 같은 달 17일 신원되고 유족들에게 위로금이 지급되었다.#

3. 대중매체

명성황후에 '윤참위' 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는데, 역사와는 달리 살아남아 명성황후를 염하는 데 참여했다.


[1] 우범선이 을미사변 가담자인걸 감안하면 증거를 인멸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2] 군부협판을 지낸 인물. 원래 대원군의 심복이었으나, 친일파로 전향한 인물이다. 왕후 시해음모에도 일정부분 간여한 것으로 보이며, 그 역시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했으나 자기의 처지를 깨닫고 순순히 죄를 시인하여 처형되었다. 다른 두사람과는 달리 1908년에 신원되었다.[3] 원래 날건달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한 부인의 빚을 대신 받아주고 수고비를 받았는데, 돈이 탐나서 그 부인의 집으로 침입하여 협박하였다. 이때 내가 왕후를 칼로 푸욱 쑤셔버렸다라는 드립을 한 것이 결정적 증거(?)로 작용하여 억울한 희생양이 되어 처형되었다. 아관파천 이후 곧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