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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0:10:11

유현준(건축가)/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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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비판론1.2. 옹호론
2. 그의 지식·추론에 대한 검증
2.1. 전염병건조 기후 간의 추론 관련2.2. 조선 도시 밀도와 상업 발달의 인과 추론 관련2.3. 프랑스 혁명동학 농민 운동의 비교 관련2.4. 안토니 가우디현수선 디자인 의도 관련2.5. 외젠 오스만의 파리 개조 사업 관련
3.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
3.1. ‘이벤트 밀도’ 개념의 독창성 논쟁3.2. 엉뚱한 인용: 귄터 니츠케 관련

1. 개요

건축가 유현준의 여러 발언 등을 비판적으로 읽은 문서.

1.1. 비판론

그의 기고문이나 방송에서의 발언은 대체로 건축학과 관련해서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역사인문학적 사실 관계와 같은 결합 분야에서는 잘못된 추론이 종종 발견된다.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단일한 요인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아, 예를 들어 'A라는 현상은 B로 인해 일어난 것' 또는 'A는 이러이러한 특징과 비례가 있으니 이를 따르지 않는 B와 같은 건축 사례는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곤 한다. 유현준 교수는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대중과 폭넓게 소통하고 있는 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은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항이다.

1.2. 옹호론

전문적인 내용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것은 도전적인 과제이다. 특정 요소만을 강조하다 보면 복잡한 정보가 생략되기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특정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전달 과정에서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오도할 의도는 없더라도, 전문적인 지식을 간단히 풀어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기본부터 차근차근 지식을 쌓아야 하며, 빠른 해답을 추구할 경우 정보 왜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결국 대중 친화적인 전달 방식은 여러 해석의 여지를 남기면서도 핵심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며, 이러한 과정에서 전문성과 대중성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2. 그의 지식·추론에 대한 검증

상술했듯이 대부분 역사(세계사), 인문학에 관한 것들을 건축적 맥락과 접목하다 보니 발생한 오류들이다.

2.1. 전염병건조 기후 간의 추론 관련



2.2. 조선 도시 밀도와 상업 발달의 인과 추론 관련


2.3. 프랑스 혁명동학 농민 운동의 비교 관련



2.4. 안토니 가우디현수선 디자인 의도 관련


2.5. 외젠 오스만의 파리 개조 사업 관련



3.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

3.1. ‘이벤트 밀도’ 개념의 독창성 논쟁



3.2. 엉뚱한 인용: 귄터 니츠케 관련





[1] 출처 2020.02.28 조선일보 " (유현준의 도시 이야기) 백신 예방주사가 만든 현대 도시", 2020.03.07. 중앙일보 "종교단체의 강적은 전염병…한곳에 못 모이면 권력 잃어", 2020.06.19. "KBS1 라디오 최경영의 경제쇼"[2] 출처[3] SBS 교양 공식채널 달리에 2021년 1월 27일 업로드된 유현준의 판타집 개론[4] 이는 "아이스크림 판매율이 높아질수록 상어에게 사망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아이스크림은 위험하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이는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5] 직전 시대인 고려 때 상업이 좀 떴는데 원나라 교초의 대량 부도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던 점과 여말선초에 왜구와 홍건적이 들끓은 점도 영향이 있다.[6] 서울은 예외다. 조선시대에도 한양(서울)에서 성공하려는 사람이 많아 투기도 심했다 한다.#[7] 한국에 아파트가 처음으로 들어선 것도 산업화가 시작하고 1차 산업보다 2차, 3차 산업에 자본이 몰리면서 인구밀도가 높아졌고 주택 부족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려 아파트를 만들게 되었다.[8] 조선시대 부르주아로 불리며 신분 상승을 꿈꾸는 평민, 천민층이 고리대금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이다.[9] 동학 농민 혁명은 도시 스케일이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조선의 200만~300만 민중이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동학 농민 혁명을 진압하려 청나라와 일본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도시 스케일이 아니라 프랑스 + 유럽 규모였다.[10] P. BLOCK, M. DE JONG, J.A. OCHSENDORF (2006) As Hangs the Flexible Chain: Equilibrium of Masonry Arches[11] 알쓸신잡2 영월편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이야기했는데, 다만 이 경우에는 그런 얘기도 있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12] 참고문헌 Merlino, K. R. (2011). Urban grain and the vibrancy of older neighbourhoods: Metrics and measures. Considering research: Reflecting upon current themes in architectural research, 477-488.
SEVTSUK, A., EKMEKCI, O., NIXON, F., & AMINDARBARI, R. (2013). Capturing Urban Intensity. In Conference on Computer-Aided Architectural Design Research in Asia (CAADRIA 2013) (Vol. 551, p. 560).
Palaiologou, G; Vaughan, L; (2014) The sociability of the street interface – revisiting West Village, Manhattan. In: Oliveira, V and Pinho, P and Batista, L and Patatas, T and Monteiro, C, (eds.) Our common future in Urban Morphology. (pp. pp. 88-102). FEUP: Porto, Portugal.
Gehl, J. (2011). Life between buildings: using public space. Island Press.